[비즈니스포스트] 서울시청 근처에는 무료로 운영되는 박물관이 참 많다.
서울시청 1km 인근만 봐도 서울역사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세종충무공이야기, 돈의문역사관 등 다수의 박물관과 전시관이 있다.
대부분 정부기관에서 운영하는 곳이다. 이토록 치열한(?) 서울시청 근처 박물관 경쟁시장에 최근 민간에서 운영하는 박물관 하나가 새 단장을 하고 도전장을 냈다. 바로 신한은행이 운영하는 ‘한국금융사박물관’이다.
민간 은행이 무료로 운영하는 박물관은 어떨까? 호기심 생겨 서울 광화문네거리 인근에 있는 한국금융사박물관을 직접 방문해 봤다.
3일 오전 찾은 한국금융사박물관은 외형부터 남달랐다. 대부분 박물관이 현대식 건물 형태인 것과 달리 한국금융사박물관은 1912년 설립돼 1963년 화재로 전소된 한성은행 본점 외형을 본떠 만들었다.
한성은행은 1897년 설립된 은행으로 대한민국 상업은행의 효시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성은행은 1943년 설립된 조흥은행의 전신이고 조흥은행은 2000년대 들어서 신한은행과 합쳐졌다.
신한은행은 이번에 한국금융사박물관을 리모델링하며 내부 전시시설뿐 아니라 외형도 현대식 건물에서 과거 한성은행 모습으로 싹 바꿨다.
박물관을 직접 찾기 전까지만 해도 민간 은행에서 단순히 금융사를 알려주며 홍보하려는 시설에 그치는 것이 아닐까 한국금융사박물관을 얕잡아봤다. 하지만 한성은행을 재현한 외형을 보자 이런 생각이 쏙 들어갔다.
박물관 안에서는 민간 은행의 무료 박물관을 과소평가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한국금융사박물관 안에는 진짜가 가득했다. 몇몇 물품만 복제품으로 전시됐을 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쓰인 화폐를 포함해 전시품 대부분이 진품이었다.
만들어진 지 1천 년도 더 된 고려시대 동국중보, 동국통보, 삼한통보 등의 화폐와 조선 중기에 쓰인 상평통보 등이 알맞은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투명한 유리상자 안에서 관람객을 맞았다.
▲ 한국금융사박물관에 전시된 조선시대 화폐 '상평통보'. <비즈니스포스트> |
1900년대 초반 진행된 국채보상운동과 관련한 취지서와 영수증 등의 유물도 원본 그대로였다.
국채보상운동은 일본 외채를 국민 모금으로 갚고 경제독립을 이룩하자는 취지에서 1907년 전개된 경제주권 회복 운동으로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이런 소중한 유물들의 전시가 가능한 것은 그만큼 한국금융사박물관의 역사 역시 오래 됐기 때문이다.
한국금융사박물관은 1997년 설립된 조흥금융박물관을 모태로 한다. 조흥은행은 전신인 한성은행 창립 100주년을 맞아 1997년 금융박물관을 설립하며 광범위하게 관련 유물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물관 자체로도 설립된 지 벌써 20년이 훌쩍 지난 만만치 않은 역사를 지닌 것이다.
▲ 한국금융사박물관에 전시된 국채보상운동 취지서. <비즈니스포스트> |
이날 박물관을 안내해 준 김다은 한국금융사박물관 학예사는 안내 내내 박물관을 향한 애정을 내보였다.
김 학예사는 “리모델링 기간 유물을 안전하게 옮긴 뒤 보관하고 다시 전시하는 데 애를 먹었다”며 리모델링 과정에서 힘들었던 일을 말할 때도 얼굴에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최근 재개장한 박물관답게 미디어와 AR(증강현실) 등 최신 기술을 활용한 전시시설도 많았다.
벽면을 한 가득 채운 선명한 영상 자료는 자연스레 시선을 끌었고 AR기술을 활용한 전시시설은 조선시대 상인들의 금융 활동을 생동감있게 보여줬다.
▲ AR기술 활용한 전시시설. 조선시대 상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한국금융사박물관은 3층 한국금융역사관과 4층 금융생활체험관 등 두 층으로 구성돼 있다.
3층에는 고대시대 화폐와 조선시대의 각종 거래문서, 금융거래에 사용된 계산 도구, 개항기 은행 설립 초기부터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 금융사 관련 유물 등이 전시돼 있다.
3층에서 만난 금융은 곧 삶이자 생활이었다.
조선 후기부터는 풍부한 유물과 함께 금융의 역사가 펼쳐졌는데 거시적으로는 한국의 근현대사, 미시적으로는 서민들의 생활이 금융이라는 주제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전 세계 화폐가 범람하던 구한말, 힘없는 나라 조선의 화폐 안에는 당시 힘 있는 나라의 상징이 수없이 들어갔다.
▲ 1868년 작성된 노비자매문서. 당시 노비들은 별도의 서명이 없어 문서 가운데 서명 대신 손바닥을 대고 그려 넣었다. <비즈니스포스트> |
한국 최초의 담보대출의 담보물품은 당나귀라는 점도 알게 됐다. 한성은행 직원은 당시 당나귀를 맡기고 돈을 빌려간 고객 때문에 당나귀 먹이까지 줘가며 열심히 돌봤다고 한다.
1897년 한성은행 설립 당시 임직원 봉급명세서도 전시돼 있다. 당시 한성은행장은 월급으로 20원을 받았다. 바로 밑 부사장은 16원, 그 아래 우총무와 좌총무는 각각 12원씩, 가장 아래 검사원은 8원을 받았다.
1953년 한국정부는 제2차 긴급통화조치를 내려 화폐단위를 원(圓)에서 환(圜)으로 바꿨는데 당시 발행된 지폐에는 한글은 원, 한자는 圜(환)이 적혀 있었다. 1962년 화폐개혁에서 환은 다시 원으로 변경됐다.
한글과 한자를 제조한 기관이 달라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한국전쟁 중 한국정부의 정신없는 상황을 미뤄 짐작해 볼 수 있다.
금융은 한국이 국제적으로 중요한 행사를 치를 때나 공익사업을 확대할 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금융사박물관에는 1950년대 후생복표와 애국복권부터 1990년대 엑스포복권까지 지금껏 발행된 여러 복권이 전시돼 있다. 복권은 당첨으로 큰 돈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동력 삼아 주요 사업을 위한 재원 마련의 수단으로 여전히 잘 쓰이고 있다.
▲ 1950년대 발행된 애국복권. <비즈니스포스트> |
4층은 1982년 신한은행 출범 이후 현대 금융의 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4층에 올라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1980년대 이후 한국금융발전사다.
1980년 일반은행자율화 방안을 시작으로 1986년 금융결제원 설립, 1993년 금융실명제 도입, 1994년 금융자율화 발표, 1996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1999년 금융감독원 설립, 2002년 은행권 주5일 근무제 도입 등 최근 40년 동안의 굵직한 한국금융발전사가 한 쪽 벽면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이 벽을 지나면 4층은 대부분 체험 중심으로 전시물이 구성돼 있다.
관람객은 은행원이 돼 직접 수표 발행을 할 수 있고 국내 최초 무인자동화 점포인 신한은행365 바로바로코너에서 모의통장을 정리하고 카드를 넣어 직접 모의화폐도 인출할 수 있다.
전시관 가운데에는 1980년대 은행창구와 지금의 현대적 은행창구를 정면으로 마주보게 재현해 놓았는데 이를 통해 은행의 어제와 오늘도 한눈에 비교할 수도 있다.
▲ 1980년대 은행창구를 재현해 놓았다. <비즈니스포스트> |
4층은 체험 중심인 만큼 어린이 관람객들이 특히 좋아한다고 한다.
4층에는 1982년 신한은행 출범 당시 초대 주주명부도 전시돼 있는데 롯데그룹 창업주인 고 신격호 명예회장의 이름이 있는 점도 눈에 띄었다.
4층 전시관 뒷부분에는 창업 40주년을 맞아 신한은행의 역사와 주요활동을 알리는 기획전시도 진행되고 있었다. 어린 고객들에게 신한의 브랜드를 알리는 데 효과적일 듯했다.
금융업은 상대적으로 한 번 브랜드를 선택하면 좀처럼 바꾸지 않는 ‘락인 효과’가 강한 산업으로 꼽힌다. 어린 시절 금융체험을 통해 신한에 좋은 이미지가 생긴다면 자연스레 홍보 효과를 볼 수 있는 셈이다.
5층은 한국금융사박물관과 별개로 꾸며진 곳이다. 여기에는 재일한국인의 역사를 담은 ‘재일한국인기념관’이 마련돼 있다.
신한은행의 탄생과 성장을 포함해 일제 강점기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갔던 재일한국인의 애환을 소개한다.
6층 개방된 옥상은 덤이다. 박물관을 다 둘러본 뒤 날씨 좋은 날 옥상에 올라 딱 트인 광화문 풍경을 둘러보는 것도 한국금융사박물관의 또 다른 매력일 듯했다.
▲ 한국금융사박물관 옥상. 탁 트인 광화문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즈니스포스트> |
한국금융사박물관 1층에는 스타벅스, 2층에는 신한은행 광화문지점이 들어와 있다.
한국금융사박물관을 나오며 1층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샀다. 한국 최초 은행인 한성은행의 외형을 본떠 만든 건물 1층에 스타벅스가 입점한 것도 금융산업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금융사박물관은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공휴일에는 문을 닫는다.
한국금융사박물관은 신한은행 출범 40주년을 맞는 2022년 7월7일에 맞춰 문을 다시 열었다.
재개관한 지 4개월도 채 되지 않았지만 토요일에는 하루 200~300명이 찾을 정도로 점점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한국금융사박물관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박물관 전시와 연계한 금융역사 교육 프로그램도 무료로 운영한다. 이 역시 사전예약이 가끔 힘들 정도로 인기란다.
교육프로그램 등과 관련한 자세한 사항은 신한은행 사회공헌활동 ‘아름다운은행’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한재 기자
▲ 4층에 전시된 1980년대 쓰인 '동전 교환 카트키'. 당시에는 은행원이 영업시간 중 은행을 찾을 수 없는 시장 상인들을 위해 직접 카트를 밀고 다니며 동전을 바꿔주는 서비스를 시행했다고 한다. <비즈니스포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