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달러 환율이 갈수록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삼성과 LG, SK와 현대차 등 주요 대기업의 해외투자 부담이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
[비즈니스포스트] 주요 공급망의 자국중심주의를 뼈대로 하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완화법(감축법) 통과로 한국기업들의 미국진출 확대가 시급해진 상황에서 원달러 환율의 고공행진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최근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고환율과 관련해 SK그룹의 미국투자 부담이 20조 원 가량 더 늘어날 것으로 우려했다.
SK그룹뿐만 아니라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 LG그룹도 미국 투자를 적극적으로 늘리고 있어 달러 강세에 따른 투자부담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23일 증권 및 금융업계에 따르면 최근 1400원 선을 돌파한 원달러 환율이 연말 1450선까지 상승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적어도 올해 말까지 미국 달러가치의 상승세가 지속되면서 비자발적 환율전쟁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고 짚었다.
원달러 환율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잇단 금리인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국제정세 불안으로 달러 가치가 높아지며 급격한 상승세를 나타내고 있다.
22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3년6개월 만에 1400원을 넘어섰다. 환율이 1400원 대를 기록한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3월31일 뒤 처음이다.
문제는 한국의 주요 기업들이 미국 정부의 자국 공급망 중심의 정책을 담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발맞춰 전기차 및 배터리 시장 선점을 위해 미국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와중에 이처럼 환율익 고공행진하면서 재무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SK그룹은 미국에 배터리, 반도체, 바이오, 그린에너지 등의 분야에 290억 달러 가량을 투자할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최태원 회장은 최근 미국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2030년까지 8년 간 모두 250조 원을 투자할 계획인데 이 가운데 해외투자가 70조 원이다”며 “원래는 해외투자를 50조 원 가량으로 생각했었는데 환율이 올라 70조 원으로 된 것이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도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 달러를 투자해 신규 파운드리 공장을 짓다는 구상을 내놓았는데 환율이 고공행진을 하면서 부담이 커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삼성전자가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한 것은 반도체지원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해당 법안은 반도체 제조에 대한 투자에 대해 25%의 투자세금 공제를 제공하고 반도체 제조 공정에 필요한 특수 공구장비 제조 뿐만 아니라 반도체 제조에 대한 인센티브 혜택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자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고환율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환리스크 관리를 적절하게 진행하기 위해 달러로 집행할 투자진행 과정에서 속도를 조절할 필요성이 있다는 시선도 나온다.
달러 강세에 투자금 부담이 커지면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도 '앞으로 챙기고 뒤로 밑지는' 모양새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신용평가업체 한국신용평가의 분석에 따르면 반도체 분야는 개별기업이 생산비용 등을 감안해 최종 제품가격을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운 구조라서 환율변동에 따른 손실을 외부에 전가하기 어려운 특징을 지닌 것으로 파악된다.
미국에서 전기차 배터리 사업을 확대하고 있는 LG그룹이 애리조나 주에 짓기로 했던 배터리 신규 자체 공장 건설계획을 재검토했던 것도 환율과 대외환경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올해 6월말 12억 달러 규모의 미국 애리조나 주 투자와 관련해 경제환경이 악화되고 투자비가 급증해 투자시점과 투자내역을 면밀하게 재검토한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최근 해당 투자를 다시 기존 방안대로 추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 등 여러 가지 투자환경 변화를 고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북미에서 제조된 전기차에만 보조금 혜택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2023년부터는 연도별 비중에 따라 양극재와 음극재 등 2차전지 소재도 북미에서 생산돼야 혜택을 준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이밖에도 GM 및 혼다와 전기차 배터리 합작공장을 건설하는데 수십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을 내놓은 바 있다. LG그룹으로서는 정책적 변화와 강달러 사이에서 투자 시점을 저울질해야 하는 상황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현대차그룹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바이든 대통령의 방한을 맞아 올해 5월 전기차와 배터리, 자율주행 등과 관련된 105억 달러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특히 현대차그룹은 5월 미국 조지아주에 약 7조 원을 들여 전기차 생산공장 건설을 결정하면서 2023년 상반기에 착공해 2025년 하반기 공장 가동을 시작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현대차그룹은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맞춰 내년 상반기 착공 계획을 세운 조지아 전기차 전용공장의 완공시점을 2025년 상반기에서 6개월 가량 앞당기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북미에서 생산된 전기차만을 대상으로 보조금을 지급하는데 현대차그룹의 전기차는 모두 한국에서 생산돼 보조금 지급대상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은 현재 미국에서 아이오닉5와 EV6, 니로EV, 코나EV, 제네시스 G60 등 5개 차종의 전기차를 판매하고 있는데 올해 12월31일까지 보조금이 적용되는 전기차는 단 한 종류도 없다.
현대차로서는 고환율에 따른 부담을 안고 가더라도 미국의 정책에 따른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투자를 미룰 수 없는 상황인 셈이다.
자동차 산업은 수출 중심 산업으로서 고환율은 수익성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해 달러화가 기준이 되는 해외투자에서는 부담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서민호 한국신용평가 수석연구원은 “한국은 수출중심의 산업구조를 지니고 있어 환율은 주요 수익성 변동 요인 가운데 하나다”며 “특히 최근에는 주요 나라의 통화 긴축 본격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환율 변동성이 커지고 있어 개별 기업의 환리스크 대응력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장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