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총액 1천조 원에 육박하는 그룹사들이 얼마 전 한데 모였다.
9월8일 코리아 H2 비즈니스서밋의 창립총회에서다. 15개 회원사가 여기 참여했다.
이 모임의 키워드는 ‘수소’다. 회원사들끼리 수소사업 협력을 추진하고 수소 관련 투자자 초청 행사를 여는 등 수소경제 확산을 위해 공조하기로 했다. 자산총액 1천조 원 규모의 수소동맹체가 만들어진 셈이다.
수소동맹은 과연 뭘까?
◆ 수소동맹 얼마나 구속력 있을까, 핵심은 ‘오너동맹’
기업들끼리 맺는 수소동맹을 구속력 측면에서 살펴보면 가장 긴밀한 형태의 기업동맹인 해운동맹과 비교해 볼 수 있다.
해운동맹은 해운사들끼리 과당경쟁을 피할 목적으로 맺는다. 각 해운동맹에 소속된 해운사들은 서로 선복을 공유하고 운송 장비나 터미널 등을 공동으로 사용한다. 동종업종 사이 카르텔 성격을 띠기도 하는 셈이다.
해운동맹 가입 여부는 개별 해운사로서는 명운이 달린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 만큼 구속력도 크다.
그런데 수소동맹은 해운동맹과 같은 구속력이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코리아 H2 비즈니스서밋만 보더라도 창립총회에서 논의된 내용은 실제로 사업으로 바로 연결될 것들이라기보다는 앞으로 계획과 목표를 설정하고, 논의 과정을 거쳐 추진방안을 도출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수소동맹은 느슨한 동맹체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수소동맹에는 여느 기업동맹과 비교할 수 없는 특징이 있다.
코리아 H2 비즈니스 서밋에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최정우 포스코그룹 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사장,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부사장, 허세홍 GS그룹 사장, 조현상 효성그룹 부회장, 이규호 코오롱그룹 부사장. 허정석 일진홀딩스 부회장, 최윤범 고려아연 부사장, 구동휘 E1 대표,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 등이 직접 참석했다.
그룹사의 한 계열사 대표가 아니라 총수나 최고위급 인물이 참석한 것이다. 대부분은 오너나 오너가문의 일원이다.
코리아 H2 비즈니스서밋이 얼마나 무게감 있는 수소동맹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수소경제가 오너들에게 중요한 이슈라는 점도 알 수 있다.
오너나 오너급이 모여서 논의한 사안들은 구속력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수소동맹에서 던져진 화두는 어떤 약속이나 계약보다 강력한 집행력을 보일 수 있다.
이들이 내놓은 수소경제 투자계획의 규모도 엄청나다. SK는 18조5천억 원, 현대차는 11조1천억 원, 포스코는 10조 원, 롯데케미칼은 4조4천억 원, 한화는 1조3천억 원, 효성은 1조2천억 원 등이다.
오너의 의지가 있지 않고서는 조 단위 이상의 투자 계획을 세우기 어렵다.
자산가치 1천조 원에 육박하는 그룹사들의 수소동맹과 그들이 만들어나갈 수소경제 생태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오너들이 수소경제에 관심을 보이고 과감한 투자를 결정할 수 있었던 데는 우리 정부의 정책 지원도 한몫한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수소경제를 가장 중요한 경제정책 의제 가운데 하나로 선정해 강력한 육성 의지를 보여왔다.
구체적 목표들이 담긴 수소경제로드맵을 통해 비전을 제시하는 한편 매년 수소경제 예산을 확대 편성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틈날 때마다 수소경제를 강조하며 지원 의지를 보이고 있다. 10월7일 ‘수소경제 성과 및 수소 선도국가 비전 보고’ 행사에 참석해 "정부는 청정수소 선도국가를 대한민국의 핵심 미래전략으로 삼아 강력히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정부가 수소경제 지원에 나섰던 구체적 사례도 많다.
문재인 정부에서 시작된 규제 샌드박스에 적용된 1호 사업에는 수소차 충전소 설치가 선정된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를 통해 서울 도심에 수소차 충전소 설치가 가능해졌다.
최근에는 정부가 수소차의 셀프충전을 할 수 있도록 규제샌드박스 실증을 진행할 계획도 세웠다.
◆ 오너들이 수소동맹을 맺는 이유, 생태계 구성에 외연 확장 필요
대기업 오너들이 동맹을 맺으며 수소경제에 나서는 이유는 뭘까?
수소경제는 의미 있는 시장 규모에 도달하기까지 갈 길이 멀다. 최소한 10년은 지나야 경제성이 가시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수소 생산-저장-운반-충전-활용 각 단계의 생태계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걸음마 단계다. 아직 완성된 생태계가 아니기 때문에 퍼즐 조각 하나만 빠져도 전체 그림이 완성되기 어렵다.
예컨대 힘들게 수소를 생산해 놓았는데 이를 운반할 수 없다면 수소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수소연료전지로 운행하는 수소트럭을 수백만 대 생산했는데 수소 충전소가 구축되지 않아 산업현장에서 외면당한다면 이 역시 낭패다.
나만 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 만큼 수소동맹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수소를 생산하는 기업과 수소 운반에 필요한 소재를 만드는 기업, 소재 충전소를 만드는 기업, 수소차나 수소선박, 수소연료전지 등 활용단계를 담당하는 기업들이 서로의 계획과 사업의 진행상황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어야 각자가 안심하고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소동맹은 좀 더 외연을 넓힐 필요도 있어 보인다.
한국은 수소의 활용부분에서는 상당한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대표적 수소 활용처인 수소차나 수소 연료전지부문에서 강점이 있다. 특히 현대차는 수소차부문에서는 글로벌 선두권 기업이다.
하지만 수소의 생산, 저장, 운반 충전 등의 핵심 기술 경쟁력은 기술 선도국 대비 60~70% 수준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이 때문에 현재 수소동맹에서 생산, 저장, 운반 충전부문을 더 강화해 나가는 것은 물론 해외로도 동맹의 외연을 더 넓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 국가 사이 수소동맹, 대한민국의 수소전략 미흡한 점은 없나
수소경제가 글로벌 차원의 생태계를 구성해야 하는 문제인 만큼 국가 사이 수소동맹도 매우 중요하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국가 사이 수소 개발과 관련한 협약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수소 강국이라 할 수 있는 독일과 일본이 다른 나라들과 활발하게 수소동맹을 맺고 있다.
우리나라와 호주도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국가 사이 수소동맹은 주로 기술강국과 재생에너지 부자나라 사이에서 이뤄지고 있다.
독일과 일본 등이 수소동맹 파트너로 삼고 있는 호주, 칠레,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등은 모두 태양에너지나 풍력발전에 유리한 곳들이다.
자연적 환경도 좋지만 인구보다 땅이 넓어서 많은 부지가 필요한 재생에너지발전에 적합한 측면도 있다. 수소 선진국들이 이들과 손을 잡고 연구개발 등을 추진하는 데는 수소시대가 도래했을 때 충분한 수소를 미리 확보해 놓기 위한 포석이 깔려 있던 셈이다.
수소경제에서 너무나 당연하게도 수소 그 자체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은 수소시대에도 화석연료시대와 마찬가지로 연료를 해외에 의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녹색수소를 생산하려면 재생에너지발전 여건이 자연적으로 좋지 않고 부생수소나 개질수소를 만들려면 결국엔 화석연료를 활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정부의 해외 수소동맹 노력은 이웃이자 경쟁자인 일본 정부와 비교하면 아쉬운 점이 있다. 현재 일본은 상당히 치밀하게 수소 확보전략을 세워 놓은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이, 그리고 한국 기업이 수소 활용부문 경쟁력을 키울 수 있었던 데는 수소경제에 관한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기여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
다만 수소 생산부문을 비롯한 우리의 취약한 지점들은 수소 생태계의 빠진 퍼즐일 수도 있다.
유영호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전략본부 책임연구원은 보고서에서 “미흡한 기술력과 한정된 재원, 부존자원 등을 고려할 때 수소 기술선도국 및 수소 생산 잠재력이 큰 국가와 공동 연구개발, 공동 프로젝트 등을 구체적이고 실질적 국제협력을 추진해 글로벌 수소 경쟁력을 확보하고 안정적 수소 공급망을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채널Who 류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