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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신이 쓴 애경의 주부경영 신화

이민재 기자 betterfree@businesspost.co.kr 2014-06-16 21: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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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신이 쓴 애경의 주부경영 신화  
▲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지난 60년 애경 역사를 돌이켜 보면 뜻하지 않은 고난과 역경을 겪지 않았던 해가 없었던 것 같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이 올 초 신년사에서 한 말이다. 장 회장은 애경이 어려움을 딛고 도약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애경인의 저력과 개척자 정신으로 묵묵히 앞만 보며 담담하고 의연하게 대처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올해로 환갑을 맞은 애경은 대한민국 대표 장수기업 중 하나다. 1954년 비누공장인 애경유지공업주식회사에서 출발한 애경은 현재 유통과 항공, 부동산, 호텔 등 20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애경그룹은 지난해 5조3천억 원의 사상최대 매출을 기록했다. 올해 5조9천억 원 매출을 목표로 한다.


오늘의 애경을 만든 사람은 장 회장이다. 그는 ‘국내 1호 여성 최고경영자(CEO)’이자 대표적인 ‘주부경영인’이다. 신년사에서 자신이 표현한 대로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은 기업으로 애경을 키워낸 주역이다.


장 회장이 처음부터 경영인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장 회장은 남편이자 애경그룹의 창업주인 채몽인 사장이 1970년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애경호의 선장이 됐다. 경영을 맡은 뒤 석유파동과 외환위기 등 크고작은 시련을 겪기도 했다. 가장 큰 시련은 남편 채몽인 사장의 부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 회장이 성공적 경영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장 회장이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정주부였기 때문이다. 또 위기 때마다 장 회장을 든든하게 지원해 준 가족이 있었기에 지금의 애경이 탄생할 수 있었다.


◆ 화장비누 ‘미향’, 애경신화를 열다


애경은 1945년 광복 직후 설립된 무역회사 ‘대륭양행’에서 출발했다. 채 선대 사장이 세운 대륭양행은 설립한 지 얼마 안 돼 국내 무역업계 순위 10위권에 들 만큼 빠르게 성장했다.


무역업으로 출발했지만 오늘날의 애경을 가능케 한 것은 1954년부터 시작한 비누제조사업이다. 채 전 사장은 인천 중구 송월동에 있던 비누공장인 애경사를 인수하면서 국내 제1호 석유화학업체인 애경유지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채 전 사장은 직원 50여명과 함께 순수 국내 기술로 비누를 만들겠다며 사업을 시작했다. 설립 첫 해 세탁비누 23만 개를 생산했는데 한국전쟁 직후 제대로 된 세제가 없었던 까닭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채 전 사장은 이듬해 서울 영등포에 공장을 짓고 사업을 확장했다.


채 전 사장은 1956년 출시한 화장비누 ‘미향’으로 애경신화의 서막을 열었다. 미향은 국내 최초로 우리나라 순수기술에 의해 탄생된 화장비누로 출시 한 달 만에 100만 개 판매라는 기록을 세웠다. 당시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화물차 대부분이 애경 비누를 실어 날랐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미향의 성공은 애경이 창립기념일을 대륭양행 설립일이 아닌 애경유지 설립일인 1954년 6월 9일로 정하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다.


채 전 사장은 1962년 인천공장을 폐쇄하고 영등포로 공장을 확장이전했다. 이후 합성세제사업 진출을 선언한 뒤 1966년 애경의 이름을 국민에게 널리 알린 주방세제 ‘트리오’를 출시했다. 트리오는 출시 후 한 때 시장점유율 90%까지 차지하며 국내시장을 점령했다. 1967년 28톤이던 판매량은 불과 3년 뒤인 1970년 493톤으로 늘어 18배 가깝게 급증했다.

  장영신이 쓴 애경의 주부경영 신화  
▲ 장영신 회장은 1972년 8월 1일 애경유지공업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 ‘왕따’에서 성공한 주부 경영인으로


“네 아이의 엄마 장영신이었기 때문에 주부 CEO로서 성공할 수 있었다.”


장 회장은 주부에서 국내 굴지기업의 경영인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이같이 설명했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어머니로서 아버지 없는 아이들을 돌보듯 오너로서 고 채몽인 사장을 대신해 중소기업에 불과했던 애경을 키워내야 했다는 것이다.


채 전 사장은 1970년 7월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성장을 거듭해 오던 애경은 오너 부재의 위기를 맞았다. 장 회장이 막내아들인 채승석 현 애경개발 사장을 낳은 지 불과 3일 만의 일이었다.


장 회장은 남편의 사망으로 실의에 빠졌으나 평소 다니고 있던 성당의 피터 양 신부로부터 힘을 얻었다. 피터 양 신부는 “이 일이 불행으로 끝날지 아닐지 너 하기에 달렸다”며 “어린 아이들을 위해 정신을 차려야 할 때”라고 장 회장에게 말했다.


장 회장은 남편 사망 1주기가 끝난 1971년 서울 낙원동에 있는 경리학원을 다니며 경영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7월1일 사장으로서 애경유지공업에 첫 출근을 했고 8월1일자로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하지만 장 회장의 경영참여에 대해 가족과 회사 임직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집안 어른들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장 회장이 경영에 나서는 것을 반대했다. 일부 임원들은 “주부가 무슨 경영을 하냐”며 회사를 그만 두기까지 했다. 장 회장은 “당시 나는 왕따였다”며 “사장이었지만 한동안 직원들은 결재조차 받으러 오지 않았고 이사회에서 임원들이 나누는 얘기를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장 회장이 취임한 지 1년 만인 1973년 10월 1차 석유파동이 터졌다. 석유파동의 여파로 1974년 초 유류가격과 전기요금이 각각 82%와 30%나 올랐다. 1970년 문을 연 애경의 석유화학공업 회사인 삼경화성(현 애경유화)은 원료공급이 끊겨 문을 닫을 처지에 놓였다.


위기의 순간에서 장 회장은 경영인으로서 능력을 발휘했다. 장 회장은 한국에 파견된 미국 화학업체 걸프사 사장을 직접 만나 “삼경화성은 앞으로 한국의 석유화학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할 기업”이라며 “양사의 이익을 위해 일본 미쓰비시가스케미컬사와 물물교환을 할 수 있게 중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장 회장의 당찬 요구에 걸프사는 아무런 대가 없이 미쓰비시가스케미컬사를 주선해 줬다. 장 회장 덕분에 삼경화성은 위기를 넘겼다. 지난해 1조1761억 원의 매출을 거둔 애경유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장 회장은 1984년 영국의 세계 최대 브랜드 유니레버사와 합작해 애경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할 때도 독한 주부의 모습을 보였다. 장 회장은 외국기업에 회사를 팔아먹는 게 아니냐는 주위의 비난을 물리치기 위해 최대한 애경에 유리한 조건을 제시했다.


장 회장이 유니레버에 제시한 조건은 ▲기술과 생산설비는 들여오되 로열티는 받지 않을 것 ▲유니레버사의 제품을 한국에 들여올 경우 반드시 애경을 통할 것 ▲합작은 애경과 유니레버가 각각 50대 50으로 하되 애경이 경영을 주도할 것 ▲유니레버사의 기존제품 가운데 애경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제품만 쓰는 것을 허용할 것 등이었다.


장 회장이 내건 조건을 두고 당시 애경 경영진은 합작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봤다. 유니레버에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니레버는 예상을 깨고 합작의사를 밝혔다. 애경과 유니레버는 1984년 11월 애경산업주식회사를 출범시켰다.

  장영신이 쓴 애경의 주부경영 신화  
▲ 장영신 회장(앞줄 가운데)이 2005년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뒷줄 남성은 왼쪽부터 차례로 장남 채형석 부회장, 삼남 채승석 사장, 차남 채동석 부회장, 장 회장의 사위 안용찬 부회장이다.

◆ 가족경영의 새로운 모델 제시


주부경영을 내세워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20년 동안 애경을 성장시킨 장 회장은 1990년대 이후 가족경영을 내세워 사업다각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 사업다각화를 선언한 장 회장의 첫 목표는 유통업이었다. 장 회장은 애경유지 공장이 있던 영등포 부지에 애경백화점 구로점(현 AK플라자 구로본점)을 세우고 1993년 9월 문을 열었다.장 회장은 맏아들인 채형석 현 애경 총괄부회장에게 사업을 맡기며 가족경영에 나섰다. 채 부회장은 이후 본격적으로 유통사업에 뛰어들었고 현재 애경은 전국에 걸쳐 5개 백화점을 운영하고 있다.


장 회장은 애경 창립 50주년을 맞은 2004년 공식적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장 회장은 채형석 부회장에게 그룹총괄을 맡겼다. 차남인 채동석 부회장은 유통과 부동산개발부문을, 막내아들인 채승석 사장은 골프장사업을 하는 애경개발을 물려받았다. 외동딸인 채은정 부사장은 남편인 안용찬 부회장과 함께 애경산업에서 생활 항공부문 경영을 맡고 있다.


애경은 2006년 5월 제주항공을 출범시키며 저비용항공(LCC) 사업에도 진출했다. 제주항공은 올해 1분기 영업이익 49억 원을 기록하며 역대 1분기 최고실적을 경신했다. 제주항공은 국내 저가항공사 최초로 매출 5천억 원과 탑승객 2천만 명 달성을 목표로 삼고 있다.


애경은 부동산사업에도 진출했다. 2008년 군인공제회와 함께 종합부동산 개발회사인 AM플러스 자산개발을 세워 부동산 개발사업에 나섰다. 올해는 호텔사업까지 발을 넓힐 예정이다. 현재 수원애경역사를 증축 중인 애경은 올 연말 백화점과 특급호텔이 복합된 ‘노보텔 엠베서더 수원’을 열어 새로운 지역 랜드마크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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