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는 글로벌 반도체시장에서 중국을 배제하고 패권을 잡겠다는 전략을 구상하고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에 매출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는 만큼 중국시장을 완전히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 김기남 삼성전자 DS부문 대표이사 부회장(왼쪽)과 이석희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
두 회사가 중국에서도 반도체 관련 투자를 진행해 미국 투자와 균형을 맞출 가능성이 떠오른다.
24일 외신들에 따르면 미국이 삼성전자에 중국과 '반도체 분리(디커플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글로벌타임스는 “미국 정부는 도널트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집권기처럼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을 것이다”면서도 “예를 들면 삼성전자에 핵심기술이나 인재를 중국사업에 투입하지 않도록 압력을 넣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앞서 21일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두 나라가 반도체 생산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협력한다는 데 뜻을 같이 했다.
이에 맞춰 김기남 삼성전자 DS부문 대표이사 부회장은 미국에 170억 달러(20조 원가량)를 들여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공장을 짓는 방안을 내놨다.
삼성전자는 바이든 행정부가 구상하는 반도체 동맹의 일원으로 합류하는 것을 사실상 공식화한 셈이다.
현지투자를 통해 미국의 반도체 동맹의 일원이 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SK하이닉스도 중국과 반도체 분리 이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시선이 나온다.
삼성전자만큼 대규모 설비투자를 공언한 것은 아니지만 SK하이닉스도 미국 실리콘밸리에 10억 달러(1조2천억 원가량)를 투자해 반도체 연구개발센터를 신설하겠다는 계획을 내놨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생산설비를 통해, SK하이닉스는 연구개발센터를 통해 미국의 반도체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게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두 회사가 미국의 전략대로 글로벌 반도체시장에서 중국의 성장을 억제하는 데 뜻을 함께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반도체업계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과 보조를 맞추되 중국 반도체시장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에 생산거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회사는 중국시장을 등한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며 “두 회사는 미국에서 투자계획을 내놓은 만큼 중국에서도 투자를 진행하면서 두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으려 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서 낸드플래시공장을, 쑤저우에서 반도체 패키징공장을 각각 운영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자회사 SK하이닉스시스템IC를 통해 중국 우시에 파운드리공장을 보유하고 있다.
때문에 두 회사가 중국에서도 투자를 진행한다면 현지 생산거점의 증설이 우선적으로 고려될 가능성이 높다는 시선이 우세하다.
이에 앞서 SK하이닉스는 박정호 각자대표이사 부회장이 13일 열린 ‘K-반도체 벨트 전략 보고대회’에서 “파운드리 생산능력을 지금보다 2배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4월 시장 조사기관 트렌드포스는 메모리반도체 슈퍼사이클(장기호황)이 다가오고 있는 것으로 내다보며 “낸드플래시는 2분기부터 가격이 장기적 강세를 보일 것이다”고 전망했다.
두 회사 모두 미국에 이어 중국에서도 생산설비의 증설에 나설 이유는 충분하다는 뜻이다.
더구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에서 반도체 설비투자를 진행하기로 한 것은 단순히 투자 요청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지나 러만도 미국 상무부 장관은 20일 삼성전자와 대만의 TSMC, GM, 포드, 인텔, 구글, 아마존 등이 참석한 반도체 화상회의에서 “바이든 정부는 인프라 법안을 통해 반도체 연구개발 지원에 500억 달러(56조 원가량)를 투자하기로 했다”며 투자기업에 금전적 지원을 약속했다.
중국도 해외기업의 반도체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투자에 따른 혜택을 적잖게 제공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나서서 ‘집적회로산업 발전추진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중국 현지에 반도체 생산설비를 짓는 기업에는 국영자본으로 설립한 1930억 위안(24조 원가량) 규모의 반도체산업 투자기금을 통해 지원한다.
중국의 반도체 기술전문가 푸리앙 연구원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와 인터뷰에서 “삼성전자에게 미국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과 중국시장을 공략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며 “둘 다 포기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애초에 두 회사는 중국시장에서 완전히 손을 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삼성전자에게 중국은 단일 국가 기준으로 매출 의존도가 가장 높은 나라다. 삼성전자의 2020년 연결기준 매출 166조3112억 원 가운데 26.3%인 43조7403억 원이 중국에서 나왔다.
SK하이닉스는 2020년 연결기준 매출 31조9004억 원 가운데 38.3%인 12조2176억 원을 중국에 의존했다. 삼성전자보다도 의존도가 높다. [비즈니스포스트 강용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