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국 정상회담이 곧 열린다.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로 반도체가 꼽힌다.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경쟁 속에서 한국도 정상회담을 앞뒤로 두 나라 가운데 한 쪽을 선택하라는 압력을 받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와 기업이 반도체 문제를 함께 풀어가야 한다는 시선이 힘을 받고 있는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면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주목된다.
11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21일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T12(Techno-Democracies 12, 기술 민주주의 12개국) 합류를 요청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T12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글로벌 반도체시장에서 중국을 포위하기 위해 구상하는 기술동맹체다.
미국, 일본 영국, 캐나다, 프랑스, 독일 등 6개 나라가 동참하기로 했으며 이스라엘, 인도, 호주가 추가로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 대만과 함께 글로벌 반도체 생산의 중심지다.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를 산업을 넘어 안보요소로 여기며 중시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을 향한 T12 참여 권유는 압력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이 국내 반도체 수출금액의 40%가량을 차지하는 최대시장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이 T12에 참여하는 것은 반도체산업에 상당한 리스크를 수반하는 결정이 될 수도 있다.
정부로서는 두 초강대국의 반도체 패권 경쟁 속에서 샌드위치 상태가 된 셈이다.
정부가 단독으로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이슈인 만큼 기업이 민간영역에서 함께 풀어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최근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론에 힘이 실리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반도체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급박하고 엄중한 만큼 기업의 의사결정은 정확성뿐만 아니라 민첩함도 함께 요구된다. 전문 경영인이 아닌 오너경영인이 직접 나서서 책임을 져야 이런 결단이 내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 경제 5단체 회장들이 앞서 4월26일 청와대에 낸 이 부회장의 사면 건의서에서도 이런 점이 나타난다.
경제 5단체장은 “지금은 정부와 기업이 손을 잡고 글로벌산업 주도권을 잡기 위해 함께 나아가야 할 중요한 시기다”며 “과감한 사업적 판단을 위해 기업 총수(이 부회장)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이 부회장의 사면 건의와 관련해 검토한 바 없으며 검토할 계획도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10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춘추관에서 취임 4주년 특별연설 뒤 기자들에게 “사면이 대통령의 권한이라고 하지만 대통령이 마음대로 결정한 사안은 아니다”며 “국민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이전 청와대가 내놓은 입장과 비교하면 상당히 여지를 두는 방향으로 돌아선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한국경제에서 반도체산업이 지닌 비중을 문 대통령도 무겁게 느끼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국은행이 4월 발표한 ‘산업 의존도요인 분해를 통한 우리 경제 IT산업 의존도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한국의 전체 수출 5422억 달러 가운데 반도체 비중이 17.9%로 주요 산업 가운데 가장 높았다.
반도체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와중에 한국 반도체산업이 잘못된 결정을 내리거나 흐름에 뒤쳐진다면 자칫 한국경제 전체가 흔들릴 공산이 크다.
이런 상황에 필요한 대응을 놓고 문 대통령으로서는 기업과 호흡을 맞춘다는 차원에서 이 부회장의 사면을 고려할 수도 있다는 시선이 재계에서 나온다.
삼성전자 차원에서도 오너경영인 이 부회장이 필요한 상황을 맞고 있다.
앞서 미국 백악관은 4월12일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과 브라이언 디스 국가경제위원장이 주재하는 반도체 공급난 대책회의를 화상으로 열었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미국 인텔, 대만 TSMC 등 반도체 제조사들도 회의에 참석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회의에 잠시 참석해 “우리의 경쟁력은 당신들이 어디에 어떻게 투자하느냐에 달렸다”며 “중국과 세계가 기다려 주지 않는데 미국도 기다릴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인텔은 바이든 대통령의 투자 요청을 받기도 전에 23조 원 규모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공장 투자계획을 내놨다. TSMC는 미국 생산공장 1기 건설계획을 6기 건설계획으로 확대해 앞으로 3년 동안 118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초대형 계획으로 바이든 대통령에 화답했다.
삼성전자는 백악관 회의에 참석하기 전부터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의 파운드리공장 증설에 20조 원을 투자하는 계획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회의 참석을 계기로 삼성전자가 미국 반도체 투자를 확대할 것으로 반도체업계는 바라본다.
문제는 이미 집행계획이 수립된 시설투자를 확대하는 것이 전문경영인으로서는 쉽지 않은 결단이라는 점이다. 이런 결단은 오너 경영인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재계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미국 반도체 투자는 한미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다”며 “이 부회장 사면 카드는 산업을 넘어 정치적 관점에서 고려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물론 반도체산업이 맞이한 엄중한 상황들을 감안하더라도 이 부회장의 사면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시선도 있다.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 재판의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6개월을 받고 수감됐다. 아울러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과정에서 일어난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사건으로도 재판을 받고 있다.
반도체산업에서 이 부회장의 역할론을 고려해 그를 사면한다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수 있다.
대통령의 사면은 그 자체로 정치행위라는 점에서 이 부회장의 사면 결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현재 이명박
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도 수감 중이다. 이 부회장의 사면으로 형평성을 들며 이들의 사면을 요구하는 목소리에도 힘이 실릴 수 있다.
문 대통령도 이 점을 적지 않게 의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전날 기자들에게 “사면은 국민 통합에 미치는 영향도 생각하고 한편으로 사법정의, 형평성, 국민들의 공감대 등을 생각하면서 판단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강용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