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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은 대우증권 인수를 통해 미래에셋금융을 글로벌 투자금융(IB)회사로 만들려 한다. |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이 품고 있는 야심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박 회장은 아시아 1위 투자금융회사의 꿈을 키워왔다. 박 회장이 대우증권을 인수하면서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박 회장은 증권업계에서 샐러리맨 신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중국투자에서 실패를 맛본 뒤 한동안 부동산 투자에 골몰했다.
박 회장은 대우증권 인수라는 승부수를 던져 ‘미래에셋대우증권’으로 다시 한번 증권업계의 판을 흔들고 있다.
◆ 박현주가 꿈꾸는 글로벌 투자금융회사
박 회장은 24일 미래에셋컨소시엄이 대우증권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직후 “미래에셋증권과 대우증권의 장점을 결합해 아시아를 대표하는 글로벌 투자금융회사로 발전시키겠다”며 “투자금융은 확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밝혔다.
그는 2007년 발간한 자서전에서 “내 인생 목표는 미래에셋금융을 아시아 1위 투자금융회사로 만드는 것”이라며 “미래에셋금융이 모건스탠리, 메릴린치, 골드만삭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를 바란다”고 밝힌 적이 있다.
박 회장은 대우증권 인수를 통해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도전에 다시 나선 것이다.
박 회장은 1997년 미래에셋캐피탈을 창립한 이후 미래에셋금융을 ‘금융재벌’로 키워냈다.
미래에셋금융은 지난해와 올해 연속으로 재계 순위 30위에 들어갔다.
미래에셋금융은 증권사, 자산운용사, 생명보험사 등을 거느린 종합금융그룹의 면모도 갖췄다.그러나 박 회장은 이 정도의 규모는 성에 차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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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 |
투자금융업계 관계자는 “박 회장은 2년 전부터 미래에셋금융의 규모를 확대해야 한다고 지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미래에셋금융이 올해 미래에셋생명을 상장하고 대우증권 인수를 결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박 회장은 대우증권을 인수해도 여전히 만족하지 않는다.
박 회장은 24일 “아직 사인을 하지 않아 밝힐 수 없지만 대형 인수합병 한두 건이 더 있다”며 “국내 증권사는 아니지만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회사들”이라고 밝혔다.
◆ 증권업계로 돌아온 박현주
박 회장은 올해 인터넷전문은행 설립을 검토하다가 그만뒀다. 미래에셋금융을 글로벌 투자금융회사로 만들기 위해서 증권업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박 회장은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강조했다.
박 회장은 그 뒤 대우증권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박 회장은 대우증권 인수가 확정된 뒤 “증권업의 올해 실적과 퇴직연금의 증가세 등을 감안하면 성장탄력이 어느 업종보다도 높다”며 “증권업은 성장하는 산업인 만큼 앞날을 크게 봐야 한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미래에셋금융이 글로벌 투자융회사로 발돋움하려면 자기자본을 늘려야 한다고 봤고 이런 맥락에서 대우증권 인수에 나섰다.
박 회장은 대우증권 본입찰에 참여한 뒤 “대우증권을 인수하면 글로벌 투자금융회사처럼 자기자본투자를 확대하겠다”며 “해외기업의 인수합병 거래에서 직접 지분을 인수하는 등 상상 이상으로 사업영역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자기자본투자는 투자금융회사에서 보유한 자기자본을 주식, 채권, 부동산, 기업 인수합병 등에 투자해 수익을 얻는 것을 말한다. 골드만삭스, JP모건, UBS 등 글로벌 투자금융회사들은 자기자본투자를 통해 전체수익에서 투자금융의 비중을 40% 이상으로 늘렸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올해 3분기 기준으로 1조645억 원의 자기자본을 보유하고 있다. 자산운용사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지만 자기자본투자 비중을 늘리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미래에셋증권은 대우증권을 인수합병하면 자기자본을 8조 원 규모로 늘리게 된다. 박 회장은 2020년까지 증권사의 자기자본을 10조 원으로 늘리는 계획도 세웠다.
이를 통해 일본 노무라증권(28조 원)이나 중국 중신증권(10조 원대 중반)과 경쟁할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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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 |
◆ 금융재벌 된 박현주의 도전
박 회장은 1988년 동양증권(현 유안타증권)에 입사하며 증권업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입사한 지 45일 만에 3억 원의 법인주문을 따내 대리로 승진했고 그 뒤 1년 1개월 만에 과장이 되는 등 초고속승진했다.
박 회장은 1988년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으로 이직한 뒤 3년 만에 국내 최연소 지점장에 올랐다. 당시 32세에 불과했다. 그 뒤 박 회장은 주식 약정액 전국 1등에 오르면서 37세에 동원증권 임원이 됐다.
박 회장은 1997년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첫 번째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구재상 전 부회장, 최현만 수석부회장 등과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설립했다.
박 회장은 자서전에서 “당시 외국계증권사에서 10억 원의 연봉과 임원 자리를 제의했지만 자산운용업을 하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 거절했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1998년 12월 국내 첫 폐쇄형 뮤추얼펀드인 ‘박현주 1호’를 선보였다. 박현주 1호 펀드는 한도액 500억 원을 3시간 만에 모두 채웠다. 수익률도 90%를 넘기며 ‘박현주 신화’를 만들었다.
박 회장은 1999년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했다. 미래에셋증권은 설립된 지 4년 만에 금융상품 판매잔고 4조 원을 넘어서며 승승장구했다.
박 회장에게도 좌절이 있었다. 그는 2007년 중국 증시를 겨냥해 내놓은 ‘인사이트펀드’에서 대규모 손실을 입었다. 이 때문에 ‘중국 몰빵 펀드’ 논란에 휩싸여 명성에 금이 갔다.
인사이트펀드는 출시된 지 2개월 만에 4조8천억 원이 모여 ‘묻지마 펀드’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인사이트펀드는 출시 1년 만에 중국 증시의 폭락으로 원금이 반토막났다.
박 회장은 이때부터 증권업에 거리를 뒀다. 그는 2011년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주식비중이 너무 컸다”며 “자산을 다변화하고 운용방식도 바꾸겠다”고 밝혔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그 뒤 채권과 해외기업 등으로 투자를 다변화했다. 특히 국내외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대체투자에 주력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상하이 미래에셋타워, 하와이 페어몬트오키드호텔, 페덱스 물류센터 등에 투자해 상당한 성과를 냈다. 국내에서도 판교 코트야드 메리어트, 신라스테이 동탄,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 등에 투자하고 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부동산 투자에 치중하면서 “금융그룹이 맞냐” 혹은 “업종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지난 11월 기준으로 전체 운용자산의 약 20%를 주식형 펀드로 운용하고 있다. 주식형 펀드의 비중이 2010년 말 70% 수준이었는데 급감한 것이다. [비즈니스포스트 이규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