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주요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에 팔을 걷어 붙이고 있다.
금융위원회를 중심으로 구성한 범정부 구조조정협의체는 11월 안에 조선 해운 철강 석유화학 등 위기산업에 대한 보고서를 내놓기로 했다.
정부는 강제적 구조조정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에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 업계는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관치논란이 커지는 이유다.
특히 조선업종과 해운업종이 가장 먼저 정부발 구조조정의 서릿발을 맞을 가능성이 점쳐진다. 업계 관계자들도 조선업종과 해운업종에 대한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다.
◆ 조선업 재편, 조선3사 정부 기대 부응할까
조선업의 경우 정부의 대수술이 불가피하다는 진단이 많다. 대우조선해양이 2분기 건국 이래 단일기업으로 최대 분기적자인 3조 원의 영업적자를 내는 등 조선3사가 2분기 연속 적자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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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립 대우조선해양 사장. |
세계적으로 조선해양업황이 침체돼 있기는 하지만 사상초유의 대규모 적자는 국내 조선산업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저가 수주, 기술과 경험 부족에 따른 잦은 설계변경 등이 국내 조선사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산업은행이 최대주주로 있는 대우조선해양부터 메스를 가하려 한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대우조선해양에 4조2천억 원의 자금을 지원하면서 회사에 강력한 자구안 마련을 요구했다. 산업은행은 대우조선해양 노조에게서 경영정상화까지 임금을 동결하고 파업에 나서지 않겠다는 동의서도 받았다.
중소조선사들도 살 길을 찾고 있다. 하지만 지난달 법정관리를 졸업한 대한조선 정도를 제외하면 전망이 썩 밝은 편은 아니다.
산업은행은 STX조선해양에 대한 정밀실사 결과와 처리방안을 11월 말 내놓기로 했다. 일부에서 채권단이 자금지원을 거부해 STX조선해양이 청산에 들어갈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반면 그동안 STX조선해양에 들어간 자금이 수조 원대인 점을 고려할 때 쉽게 청산을 결정하기 힘들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우리은행이 주채권은행으로 있는 SPP조선의 경우 16일 매각공고가 나온다. 하지만 SPP조선 채권단은 최근 SPP조선이 수주하기로 한 8척의 유조선에 대한 선수금환급보증(RG) 발급을 거부해 매각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조선업계 구조조정 수위는 아직 정부가 그리는 큰 그림에 미치지 못한다.
정부는 조선사 개별 구조조정이 아니라 업계 차원의 구조조정을 모색하고 있다. 정부는 중소조선사들을 통합하는 방안과 조선3사와 짝을 지워 업무효율화를 꾀하는 방안 등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삼성중공업이 성동조선해양과 경영정상화 지원을 위한 경영협력 협약을 맺고 대우조선해양이 STX조선해양과 자재를 공동구매하기로 하는 등 살 길을 찾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더욱 진전된 구조조정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조선업 구조조정의 키를 쥐고 있는 조선3사의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채권단 지원으로 간신히 생명을 연장하게 된 대우조선해양은 물론이고 삼성중공업과 현대중공업도 모두 그룹 차원에서 각자 살 길을 모색하는데 여념이 없다.
조선업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중공업과 성동조선해양이 위탁경영까지 가지 못한 것만 봐도 알지 않느냐”며 “정부의 구상대로 조선사들이 순순히 따를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 정부,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어떻게 할까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을 상대로 한 정부의 구조조정 압박 강도는 계속 높아지고 있다.
현대상선은 11일 보유하고 있던 현대증권 지분과 현대아산, 현대엘앤알 등의 지분을 팔아 4500억 원대의 유동성을 확보했다. 이번 조치로 현대상선은 당장 급한 불은 끄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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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하지만 이런 방안이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높다. 근본적으로 현대상선이 영업이익을 낼 수 있는 구조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강력한 구조조정이 이뤄질 것으로 업계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정부는 이에 앞서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에 비공식적으로 자발적 합병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두 회사 모두 어렵다는 뜻을 밝히자 금융위원회, 산업통상자원부, 해양수산부, 국토교통부가 참여하는 구조조정 실무회의에서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구조조정 방안을 2차 차관회의 안건으로 올리기로 했다.
구조조정 차관회의는 사실상 ‘구조조정 컨트롤타워’로 불린다. 정부가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합병을 추진할 가능성이 여전히 열려있지만 관치논란이 불거지면서 합병은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정부가 한진해운와 현대상선의 구조조정을 강제하고 나선 데는 이대로 둘 경우 국내 해운기업들이 모두 망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깔려 있다.
업계 관계자는 "해운업이 구조적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부실이 더 확대되기 전에 확실한 처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대상선은 2011년 3천억 원대의 영업손실을 낸 데 이어 2012년 5천억 원대, 2013년 3천억 원대, 지난해 2천억 원대의 적자를 계속 내고 있다. 누적 부채규모만 6조 원대에 이른다.
문제는 지금 상황을 넘긴다 해도 해운업 불황이 계속된다면 근본적 정상화가 어렵다는 점이다.
정부는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을 합병해 글로벌 해운회사들과 경쟁해야 한다고 본다. 국가별로 상위 대형 해운회사만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로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두 회사의 합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정부가 키운 조선해운업, 다시 손대나
우리나라 조선업과 해운업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적극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조선업은 해방 이후 한동안 수천 톤 이하의 소형 목재선박 만드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1967년 조선공업진흥법을 제정해 조선업 발전에 발판을 놓았고 1970년 대규모 조선소 건설 계획에 따라 현대조선소가 세워지게 됐다.
그 뒤 삼성중공업이 정부의 권유에 따라 우진조선과 대성중공업을 인수하며 조선업에 진출했다. 대우조선도 대한조선을 인수해 지금의 조선3사의 기틀이 놓였다.
정부는 조선사들의 시설확장에 대한 자금 지원은 물론이고 계획조선사업 등 정책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조선업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업으로 발돋움했다.
정부는 1967년 해운진흥법도 제정했다. 정부가 수출주도정책을 펴면서 해운업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대기업들의 해운업 진출을 적극 장려했다. 이에 따라 아세아상선(현 현대상선), 한진해운, 삼미해운, 쌍용해운 등 대기업들이 대거 해운업에 진출하면서 해운업이 급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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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
정부는 1974년 외항해운육성방안을 내놓고 1976년 해운항만청을 설립하는 등 해운업 육성에 힘을 쏟았다. 정부는 1983년 해운산업 합리화조치를 시행해 111개 외항해운기업을 33개로 통폐합하는 등 구조조정도 실시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조선, 해운, 철강, 석유화학산업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중공업육성정책과 수출주도정책에 따라 전략적으로 키워낸 산업”이라며 “박근혜 대통령이 애착을 갖고 손을 보려는 의지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을 곱지 않게 보는 시각도 있다. 특히 정부가 주도하는 산업별 구조조정이 마치 과거 경제기획원 중심의 경제정책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더욱이 박근혜 정부 경제정책의 콘트롤타워인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경제기획원 출신이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가 더욱 짙다.
이제는 예전과 달리 구조조정을 재계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관제 구조조정의 한계가 외환위기 때 이미 드러났기 때문이다.
1990년대 재계 순위 2위까지 커진 대우그룹의 해체가 대표적이다. 정부는 1997년 대우그룹이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도록 했다. 그러나 대우그룹은 쌍용자동차 인수 후유증으로 유동성 위기에 빠져 그룹이 해체됐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지난해 발간한 책 ‘김우중과의 대화’에서 “대우그룹 해체는 정부의 기획”이라며 정부에게 책임을 돌렸다.
김 전 회장은 또 “정부가 대우자동차를 GM에 헐값에 넘겨 한국경제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고 주장했다. 1999년 정부가 주도한 현대그룹과 LG그룹의 반도체 빅딜도 결과가 좋지 않았다.
현대그룹은 현대전자를 통해 LG그룹 반도체사업을 인수했지만 2년 만에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 경영권을 포기했다. LG그룹은 매각자금으로 데이콤을 인수했지만 경영정상화까지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며 큰 이익을 보지 못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과거 20세기와 지금의 기업은 상황이 너무 다르다”며 “정부가 주도해서 구조조정에 나서는 것은 경제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불만을 나타냈다.
이런 지적이 높아지자 정부도 역할을 자제하겠다고 밝혔다.
김용범 금융위원회 사무처장은 10일 “범정부협의체는 산업정책적 판단으로 구조조정의 큰 틀만 제시할 것”이라며 “개별기업 구조조정은 채권단과 기업의 자율적 협의로 진행된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디모데·조은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