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구원이 가상현실 기기를 활용해 쏘나타의 설계를 살펴보는 모습. <현대기아자동차> |
억만장자이자 천재 발명가로 불리는 토니 스타크는 마블 영화 아이언맨에서 3D 홀로그램 영상을 띄워놓고 홀로그램 이미지를 이리저리 만지작하며 슈트를 제작한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도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족을 상대할 때 홀로그램 영상을 활용하는 인류의 모습을 그렸다.
이런 모습들을 머지않아 자동차기업의 연구개발 현장에서도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는 앞으로 자동차 디자인부터 제품 설계 등의 여러 부문에 가상현실(VR)을 접목한 시스템을 도입한다.
실제로 이런 시스템을 직접 접해보니 단순히 ‘놀랍다’는 차원을 넘어 연구개발의 다양한 현장에서 각 시장과 고객 요구에 더욱 빨리 대응할 수 있는 혁신적 틀이 만들어졌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17일 경기 화성에 위치한 남양연구소에서 현대기아차의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 가운데 가상현실을 활용한 디자인 품평장과 설계 검증 시스템을 직접 살펴보고 체험해볼 수 있는 행사가 열렸다.
현대기아차가 일컫는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는 시험 차량을 통해 디자인을 평가하거나 설계를 검증하던 과거의 방식을 벗어나 가상의 자동차 모델을 통해 차량 개발의 상당 부분을 대체하는 혁신시스템을 말한다.
이미 BMW는 가상현실을 활용해 생산라인을 미리 설계해보고 개선사항을 찾아 실제 작업환경에 반영하는 방식의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를 갖추고 있다.
현대기아차도 이런 자동차산업의 흐름에 발맞추기 위해 3년 전부터 버추얼 개발 프로세스 개발에 공을 들여왔다고 한다. 이런 노력 끝에 총 150억 원이 투입된 남양연구소 내 디자인 품평장이 3월에 완공됐다.
가상현실을 활용한 디자인 품평장은 가로세로 모두 20m 남짓한 공간에 들어서 있다. 공간만 보면 일반 품평장과 다르지 않지만 천장 모서리쪽에 일정 간격으로 배열된 36개의 모션캡처 센서가 이 공간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등에다 매는 일종의 백팩PC와 가상현실기기를 함께 착용하면 모션캡처 센서가 사용자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1mm 단위로 감지해 가상현실기기 내부 화면에 띄워준다.
이 화면에는 품평장에 가상현실기기를 착용한 다른 사용자들도 함께 보인다. 디자인 품평에 참가할 수 있는 인원은 최대 20명이다. 굳이 하나의 공간에 있을 필요 없이 세계 어디서든 네트워크를 통한 참여가 가능해 현대기아차 글로벌 디자인센터와 협업도 가능하다고 현대기아차는 전했다.
본격적으로 디자인 품평회 시연이 시작됐다.
관계자의 조작에 따라 현대차가 10월에 미국에서 공개한 수소전용 대형트럭 콘셉트카 넵튠이 가상 품평회장 한가운데 나타났다. 넵튠 옆에는 메르세데스-벤츠와 테슬라 등 대형트럭에서 경쟁하는 기업들의 경쟁차량들도 함께 등장했다.
실제 모습보다 현실성이 덜한 것은 사실이지만 좁은 물리적 공간를 극복해 대형 트럭 5대를 한 가상 품평회장에 모아놓고 비교해가며 둘러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어 보였다. 가만히 서 있어도 사용자 조작에 따라 트럭들을 좌우로 돌려가며 볼 수 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가상현실을 활용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디자인 품평은 진행되기 힘들다. 시험 차량을 직접 만들어 품평장 안으로 들여와야 하는데 이런 시도 자체에 투입되는 예산과 시간이 만만찮다. 경쟁차량과 비교까지 한다는 것은 엄두조차 낼 수 없다.
하지만 비용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다 보니 가능성이 무궁히 열리는 느낌이다. 시스템 입력만 되어있다면 원하는 대로 차들을 비교해볼 수 있고 즉석에서 디자인을 교체해보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넵튠의 외관을 더욱 자세히 살펴볼 수도 있었다. 관계자 조작에 따라 품평장 정중앙으로 들어온 넵튠의 크기는 거대했다. 관계자에 따르면 실제 크기와 똑같이 구현됐다고 한다.
▲ 현대기아자동차 소속 한 연구원이 가상현실 기기를 활용한 설계 검증을 시연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타이어부터 시작해 트레일러와 이음새 부분, 헤드램프, 앞 유리창 등 다양한 디자인적 요소가 모두 실제와 같이 구현됐다.
가상현실을 활용한 디자인 품평의 대미는 배경 전환에 있다.
자동차가 날씨와 시간대, 주행도로에 따라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이는지도 디자인의 중요한 요소지만 실제로 이를 각기 다른 환경에서 비교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가상현실을 이용하면 노을이 지는 배경, 눈 내리는 모습, 험로 등 다양한 상황을 가정해 차량을 각기 다른 환경에 놓아볼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환경에 놓았을 때 주위 환경과 얼마나 어울리는지를 판단할 수 있어 디자인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외부 디자인만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부 디자인 품평도 가능했다. 가상현실기기를 통해 넵튠의 내부에 들어가보니 콘셉트카 특유의 다양한 기능들이 조작에 따라 실제처럼 구현됐다.
설계를 검증하는 데도 가상현실이 활용된다.
자동차는 대략 3만 개 이상의 부품이 조립돼 만들어진다. 대부분 컴퓨터 지원 설계(CAD), 이른바 프로그램을 통해 각각의 부품이 만들어지며 결합됐을 때의 모습도 캐드를 통해 시뮬레이션 할 수 있다.
하지만 부품을 조립해 실제로 구동했을 때서야 개선해야 할 부분이 발견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가상현실을 활용하면 이런 비효율적 요소들을 대폭 줄일 수 있다. 현대기아차는 이미 계량화해 만들어놓은 여러 데이터를 가상현실 시스템에 입력해 엔진을 엔진룸에 넣고 구동했을 때 떨림이 얼마나 나는지, 이에 따라 다른 부품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를 가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가상현실기기를 쓰고 확인해보니 엔진룸 위에서 제한적으로밖에 확인할 수 없었던 여러 진동 요소를 깊숙한 곳뿐 아니라 여러 각도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공간이 좁아 확인하기 힘들었던 부분들도 가상현실을 활용하면 단면을 잘라볼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보였다.
내부 설계도 미리 검증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앞쪽 운전석의 A필러(전면 유리 앞쪽 기둥) 디자인을 변화했다면 이에 따라 운전석에 앉았을 때 운전자의 시야가 얼마나 개선됐는지 혹은 제한됐는지 등을 살펴보고 개선사항을 파악할 수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