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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의 운항 모습 |
“세계 선두권의 조선산업을 보유한 한국에서 수백 명의 학생이 (선박사고로) 사망하고 실종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중국 환구시보가 세월호 침몰 사고를 놓고 던진 질문이다. 세계 1~2위를 다투는 조선 강국이 노후된 일본 여객선을 들여와 운항한 점을 꼬집는 대목이다.
세월호는 1994년 6월 일본에서 건조된 20년차 선박이다. 2012년 9월까지 일본 규슈 남부에서 18년 간 운항한 뒤 노후선박으로 분류돼 외국 매각 과정을 밟았다. 이 배를 사들인 청해진해운은 객실 증설공사 후 지금까지 인천-제주 항로에 투입했다.
선박 전문가들은 여객선의 적정 사용 기한을 15년으로 보고 있다. 그 기준에 맞춘다면 세월호는 지나치게 오래 사용한 배다. 그래서 낡은 선박을 증축해 사용한 것이 이번 사고의 원인 중 하나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선박은 오래될수록 내부 조종 장치가 부식해 고장이 잦기 때문이다. 세월호는 일본에서 운항중이던 2009년 5월 낡은 전기 배선이 합선돼 화재가 일어난 적이 있다.
한국 여객선 중 상당수는 세월호처럼 운항기간 15년을 넘긴 배다.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국내 연안 항로 여객선 173척 중 42척(24%)이 선령 21년을 넘겼다. 16~20년 동안 운항한 여객선도 63척(36.4%)이나 된다. 60% 이상이 적정 선령보다 더 운항한 셈이다. 특히 세월호처럼 일본에서 사들인 여객선 17척은 대부분 중고선박으로 추정된다.
이렇다 보니 자연히 선박대국인 한국이 왜 중고선박을 사들이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해양수산부 관계자의 답은 이렇다. “국내 조선업계가 상선 건조 기술은 좋지만 여객선 제조 능력은 부족한 편이다.”
한국 조선기업의 선박 수주 품목에도 여객선이 들어있다. 생산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2009년 기준으로 국내 기업이 만든 중소형 여객선은 현대중공업 2척, 삼성중공업 8척, 대우조선해양 7척에 불과하다. 특히 관광객이 많이 타는 크루즈선 수주는 전무하다. 핀칸티에리(이탈리아)·크베머(핀란드)·마이어베르프트(독일)·아틀란틱(프랑스)로 대표되는 유럽 기업이 90% 이상 차지하고 있는 크루즈선 시장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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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현장 |
지난해 국내 조선기업은 선박 477척을 수주했다. 전 세계에 발주된 2206척 중 약 20%가 우리나라 기술자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는 셈이다. 전체 수주량은 중국에 뒤진다. 수주 금액으로 따지면 411억 달러(약 42조6824억 원)로 압도적 1위다. 드릴선(원유시추선)·액화천연가스(LNG)선 등 가치가 높은 선박을 많이 수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객선의 대표 주자인 크루즈선은 지난해 국내 기업에 단 한 척도 수주가 들어오지 않았다.
크루즈선은 여객선 생산능력의 평가기준인 동시에 부가가치와 성장 잠재력도 매우 높다. 통상 15만 톤 크루즈선 한 대의 가격은 7억 달러(약 7273억 원)가 넘는다. 우리나라의 주력 고부가가치 선박인 드릴선이 약 5억 달러(5195억 원)인 것과 비교된다. STX조선해양의 한 관계자는 “크루즈선은 수익성이 높은 편인 초대형 유조선보다도 부가가치가 9.1배나 더 높다”고 말했다.
국내 조선기업도 크루즈선 건조 시장의 문을 두드린 적이 있다. 삼성중공업은 2009년 미국 회사 유토피아가 내건 11억 달러(약 1조1429억 원) 규모의 크루즈선 건조 입찰을 단독으로 따냈다. 당시 김징완 삼성중공업 부회장은 “한국 조선업계가 진정한 세계 1위의 위상을 유지하려면 크루즈선 시장 진출이 필수적”이라며 “이번 크루즈선을 세계가 놀랄 만한 명품 선박으로 건조해 한국 조선 업계가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삼성중공업은 1997년 국내 최초로 여객선팀을 만든 조선기업이다. 중대형 여객선 8척을 건조해 다른 기업보다 더 많은 경험을 쌓았다. 유럽회사가 만든 크루즈선을 조사하면서 소음·진동 등 핵심부분의 기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을 살려 국내 자체 기술만으로 크루즈선을 만들 예정이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현재 삼성중공업은 아직 크루즈선 건조에 들어가지 못했다. 세계경기 침체와 유토피아사의 자금난이 겹치면서 계약이 미뤄졌기 때문이다. 결국 삼성중공업은 본래 계획했던 2010년 상반기 중 본 계약 체결을 포기했다.
크루즈선과 관련해 처음 성과를 보여준 국내기업은 STX그룹이다. 강덕수 STX그룹 회장은 2007년 노르웨이 크루즈선 생산기업인 아커야즈를 약 1조4500억 원에 인수했다. 이후 ‘STX유럽’으로 사명을 바꿔 본격적인 크루즈선 시장 진출에 나섰다. STX유럽은 2009년 10월 세계 최대 규모인 22만5000톤 급 크루즈선 ‘오아시스 오브 더 시스’를 만드는 등 크루즈선 시장에서 한 때 1위를 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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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덕수 STX 회장 |
STX유럽의 크루즈선 실적은 사실상 아커야즈의 기술·설비·인력과 예전 수주 물량을 그대로 받아왔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이것조차도 STX그룹이 유동성 악화를 겪으면서 손을 떠날 위기에 처했다. 현재 STX유럽은 매각을 위한 실사 작업을 거친 뒤 구매자를 찾고 있다.
조선업계 전문가들은 크루즈선으로 대표되는 대형 여객선이 부품 공급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지적했다. 여객선은 일반상선이나 해양플랜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탄다. 규모가 클수록 내부 인테리어 등 건축기술도 중요하게 여겨진다. 결국 국내기업의 주력 분야인 일반선박 및 해양시설과 기본적인 설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대형 여객선은 일반선박보다 더 넓은 산업 분야와 연관이 있다. 선박 기본재료인 엔진·후판·기자재에 더해 진동 최소화 장비·객실 내장재·호텔 용품 등 각종 부품이 필요하다. 이것을 시공할 고급 건축 기술과 디자인 역량도 있어야 한다. 선박 뼈대와 몸체를 만들 능력은 갖췄으나 관련 협력업체 인프라가 전혀 없는 국내 기업에겐 큰 부담이 된다.
특히 크루즈선은 관련 부품을 전량 외국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로열티 때문에 원가부담이 커져 시장진입을 힘들게 만든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이를 놓고 “크루즈선은 특급호텔 수준의 인테리어가 필요하기 때문에 문고리 하나도 유럽에서 최고급 브랜드로 수입해 써야 한다”며 “자재 수입을 위한 운송비용 등을 고려할 때 한국에서 건조하는 것이 수익에 도움이 되지 않아 현재 크루즈선 제작은 뒷전”이라는 사정을 털어놓았다.
크루즈선 시장의 진입장벽이 높다는 것도 국내기업의 발목을 잡는 요소다. 유명 크루즈선 회사인 카니발과 스타크루즈는 각각 이탈리아 조선기업인 핀칸티에리와 독일 마이어베르프트의 주요 고객이다. 건조 기술만큼이나 ‘호텔’로서 크루즈선이 갖춰야 할 부분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관련 경험이 없는 국내 기업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국내 조선기업은 크루즈선을 위시한 대형 여객선 사업에 계속 관심을 두고 있다. 부가가치가 높은 것에 더해 조선 4종(상선·군용선·자원개발선·대형 여객선)을 모두 잘 만든다는 인정을 받기 위해서다.
박대영 삼성중공업 사장은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현재 목표는 2020년에 해양의 지존이 되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크루즈선사업에도 진출해 2020년 매출을 31조 원까지 끌어올릴 것”이라고 다짐했다.
대우조선해양의 한 관계자도 “세계 최고의 종합 조선사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크루즈선 사업에 진출해야 한다”며 “크루즈선은 건조할 때 고급 인테리어 기자재산업 등 새로운 산업의 인프라를 구축하고 고용도 창출할 수 있어 반드시 진출해야 할 분야”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