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이 6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재소환조사를 마치고 귀가하고 있다. <뉴시스> |
2013년 4월1일은 사정이 어떻든 강덕수 STX그룹 회장에게 가장 화려한 날이었다. 공정거래위가 발표한 재계순위에서 STX그룹은 13위에 올랐다. KT와 두산의 뒤를 이은 순서였다. 강 회장은 STX그룹 설립 12년 만에 내로라하는 대그룹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하지만 딱 하루였다. 다음날인 4월2일 STX그룹의 주계열사인 STX조선해양이 채권단 자율협약을 신청했다. 그리고 STX그룹이 몰락하기까지 1년도 걸리지 않았다. STX그룹은 해체됐다. 자산은 24조3천억 원에서 3조3천억 원으로 줄었다.
강 회장은 2000년 몸담던 쌍용그룹이 무너지자 그 폐허 위에서 출발했다. 2001년 5월1일 쌍용중공업을 STX로 바꾼 뒤 12년을 거침없이 달렸다. 샐러리맨이 재계의 신화를 쓸 판이었다.
그러나 한번 무너지자 마치 모래성 같았다. ‘제2의 김우중’이라는 질시 어린 찬사, 손만 닿으면 법정관리 기업들도 회생했다는 ‘미다스의 손’이라는 극찬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강 회장은 백의종군을 선언했지만 그마저도 사치로 받아들여졌다. 모든 계열사 대표직을 내려놓고 야인으로 물러났다. 강 회장은 왜 한순간에 무너졌을까? 강 회장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는 없었을까? 그런 기회가 있었다면 강 회장은 왜 그 기회를 잡지 못했을까?
◆ 하늘의 운을 탄 강덕수의 속도경영
강 회장은 속도경영으로 유명하다. 기업경영에서 무엇보다 신속하고 과감한 의사결정이 중요하다는 게 강 회장의 지론이다. 그는 “뒤처지면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며 “환경이 너무나도 빨리 변하기 때문에 신속히 대응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강 회장의 이런 속도경영은 공격적인 인수합병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사상 최고의 조선해운업 호황이 있을 때만 속도경영이 빛을 냈다.
강 회장은 2001년 쌍용중공업을 자비로 인수해 STX를 창업했다. 이어 인수합병을 통해 숨 가쁘게 몸집을 키워왔다. 가장 먼저 2001년 엔진부품 제작부문을 독립시켜 STX엔파코(현 STX메탈)를 설립했다. 같은해 대동조선을 인수해 STX조선해양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2002년 산단열병합발전소를 인수해 STX에너지로 이름을 바꿨다.
2004년 STX엔진을 설립하고 같은해 범양상선을 인수해 STX팬오션을 설립했다. STX그룹이 인수합병을 거듭해가며 성장하자 시장에서 기업이 매물로 나올 때마다 STX그룹이 인수대상자로 거론될 정도였다.
강 회장은 인수합병으로 몸집을 불려가는 데 대해 “인수합병은 현재 사업과 시너지 효과를 내야 한다”며 “STX는 단순히 회사를 인수할 뿐 아니라 피인수기업의 가치를 끌어올려 다른 기업과 차별화를 했다”고 말했다.
그 말처럼 강 회장의 인수합병은 다른 재벌처럼 문어발식은 아니었다. 엔진부품-선박엔진-조선-해운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해가는 인수합병이었다. 이런 몸집 불리기는 그의 말처럼 시너지 효과를 냈고 창립 6년만인 2007년 매출액 10조 원을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쌍용중공업 인수 당시 매출액이 2930억 원이었으니 무려 30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흔히 ‘운칠기삼’이라고 한다. 하늘의 운이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시운도 강 회장 편이었다. 강 회장의 STX그룹은 조선해운업 호황의 최대 수혜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STX조선해양의 전신 대동조선은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대기업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중견기업이었다.
그러나 2004년 무렵부터 조선업 호황으로 선박 건조물량이 급증했고 2006년 수주잔량 세계 6위까지 올랐다. STX조선해양의 2008년 매출은 15조 원에 육박했다. STX조선해양은 2008년 20억 달러 수출의 탑 수상에 이어 2009년 30억 달러 수출의 탑을 받았다. 강 회장은 2009년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강 회장이 2004년 범양상선을 인수해 설립한 STX팬오션 역시 해운업 호황의 혜택을 톡톡히 누렸다. 국내 최대 벌크선단을 거느린 STX팬오션은 2008년 매출 10조 원, 영업이익 6700억 원을 달성했다. STX조선해양과 STX팬오션은 그룹에서 매출 1, 2위로 STX그룹을 견인했다.
▲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은 STX를 재계13위까지 올려놓았다. <뉴시스> |
◆ 후퇴할 때를 놓쳐 추락한 강덕수
STX그룹의 추락은 한순간처럼 보였지만 빨간불은 오래전에 들어왔다. STX조선해양의 경우 2007년 말 차입금 대비 현금흐름 비율은 40%였지만 2010년 11.9%로 떨어졌다. STX팬오션은 더 심각했다. 2007년 말 차입금 대비 현금흐름 비율이 102.8%에서 2010년 9.4%로 떨어졌다. 각각 조선업과 해운업으로 STX그룹을 견인하던 두 축이 유동성 위기로 몰려가고 있었다.
강 회장에게 이때가 STX그룹의 몰락을 막을 수 있는 기회였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변화하는 환경에 신속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강 회장이 지론이 온데간데 없어졌다”며 “속도경영이 그저 죽기 살기로 앞만 보고 달려가는 공격경영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강 회장은 STX그룹의 위기에서 더욱 공격적 경영을 취했다. 그는 글로벌 금융 위기에서도 “세계시장에 과감히 도전할 것”과 “새로운 성장사업에 투자”할 것을 임직원들에게 요구했다. 강 회장은 동시에 유동성 위기 의혹을 불식시키려는 듯 현대산업개발, 대우건설 등의 인수를 계속 시도했다. 2011년 하이닉스 반도체 인수전에도 나섰다. 하이닉스 반도체는 인수금액이 3조 원이 넘는 대형 매물이었다.
STX그룹이 하이닉스 인수에 뛰어든 것을 두고 업계에서 말이 많았다. STX그룹은 사업 다각화를 위해 하이닉스 인수전에 참여한다고 밝혔다. 이종철 STX그룹 부회장은 “조선과 해운 및 엔진사업 의존도를 90%에서 60%로 낮추고 반도체사업을 40% 정도로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수직계열화를 통해 성장한 STX그룹이 신사업에 뛰어드는 것 자체에 위험요소가 많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다.
STX그룹의 자금조달 능력에도 의문이 제기됐다. STX그룹 최고재무책임자(CFO)인 변용희 부사장은 “그룹 전체 현금 보유량이 3조5천억 원”이라며 “유동성 위기가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STX그룹이 하이닉스 반도체를 인수할 자금이 부족할 것으로 내다봤다. 인수에 회의적 의견이 대다수였다.
강 회장도 마침내 하이닉스 반도체 인수에 대해 무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결국 STX그룹은 하이닉스 반도체 인수전에서 철수했다. 전문가들은 “인수에 성공한다고 해도 이후 투자를 할 여력은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STX그룹은 이듬해인 2012년부터 유동성 확보를 위한 재무구조 안정화 계획에 나섰다. 계열사 지분 매각 등으로 2조5천억 원의 자금을 마련한다는 계획이었다.
STX그룹은 유럽계열사 STX OSV를 7680억 원에 매각하는 등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주력 계열사인 STX팬오션 매각도 추진했지만 불발됐다. 결국 지난해 STX조선해양이 자율협약을 신청한 것을 시작으로 STX그룹은 줄줄이 법정관리와 자율협약 체제에 들어가게 됐다. 너무나 허무한 반전이었다.
“하이닉스 반도체 인수에 STX그룹이 뛰어든 것은 유동성 위기가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 강 회장이 규모를 줄이거나 주력 계열사를 과감히 매각했다면 지금의 STX그룹은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재계 한 관계자의 말이다.
STX팬오션과 STX건설은 법정관리 대상이 됐고 STX조선해양, STX중공업, STX엔진은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체결했다. STX에너지, STX솔라, STX전력은 GS-LG 컨소시엄에 매각됐다. 강 회장도 7월 STX팬오션 대표를 사임한 뒤 9월 STX조선해양, 11월 STX중공업을 거쳐 지난 2월 STX 대표자리에서 물러났다.
▲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은 순환출자 방식으로 STX그룹 전체를 지배했다. <뉴시스> |
◆ 취약한 지배구조, 불황 한방에 무너지다
강 회장에게 놀라운 성장을 안겨준 것이 조선해운업 호황이라면 강 회장에게 결정적 한방을 먹인 것도 조선해운업 불황이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조선해운업 상황은 달라졌다. 전 세계 물동량이 줄어들고 해운업은 불황에 빠져들었다. 벌크선 운임지수 BDI는 2007년 7071포인트에서 2012년 920포인트로 7분의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해운업 불황은 조선업 불황으로 이어졌다.
국내 주요 해운사들은 2011년을 기준으로 적자로 전환했다. STX팬오션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1년 219억 원의 순손실을 기록했고 2012년 4668억 원이라는 엄청난 적자를 냈다. 결국 STX그룹은 2012년 STX팬오션 매각에 나서게 됐다.
STX팬오션의 실적 부진과 조선업 불황은 STX조선해양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STX조선해양은 2011년 영업이익 5982억 원, 순이익 1686억 원을 냈지만 2012년 영업손실 4034억 원에 순손실 7820억 원을 기록했다. 문제는 강 회장이 구축한 STX그룹이 이런 한방에 무너질 정도로 지배구조가 취약했다는 점이다.
STX그룹은 순환출자 구조였다. 순환출자는 작은 지분으로 모든 계열사를 지배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식이다. 반면 순환출자는 한 회사가 무너질 경우 다른 회사까지 연쇄적으로 무너질 수 있는 위험한 지배구조다.
STX그룹의 정점은 강 회장이 소유한 포스텍이었다. 강 회장은 70%가량의 포스텍 지분을 통해 STX그룹 전체를 지배했다. 포스텍은 STX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STX의 지분 23.1%를 보유했다. STX는 STX조선해양(지분 30.6%), STX팬오션(27.4%), STX에너지(50.1%), STX엔진(33.6%)을 거느리고 있다. STX조선해양과 STX엔진이 각각 STX중공업 지분 28.0%와 29.2%를 소유하고 있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강 회장은 세대가 달랐지만 대그룹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김우중의 대우나 신선호의 율산과 똑같은 방식을 답습했다고 할 수 있다”며 “성공의 10년이 STX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신화 속에 강 회장을 가둬놓고 말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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