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발렌베리가 벤치마킹은 처음부터 공염불이었다. 사람으로 치자면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바꿀 수 없는 DNA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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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
2003년 여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최측근인 아들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상무, 이학수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을 대동하고 스웨덴으로 향했다. 이들은 발렌베리 가문의 지주회사인 인베스터를 찾아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과 주요 임원들을 만났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에 대해 삼성이 한국의 발렌베리가를 꿈꾸며 벤치마킹에 나섰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삼성이 엄청난 변화를 시도할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10년이 흐른 지금 삼성의 어디에서도 발렌베리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비슷한 것은 두 가문의 외형적 규모뿐이다.
두 가문이 비슷해질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 정반대의 소유 구조
지난해를 기준으로 양가(家)의 규모는 비슷한 수준이다. 발렌베리가는 지난해 약 2030억 달러(미화)의 매출을 올려 스웨덴 국내총생산(GDP. IMF 기준)의 37%를 담당했다. 삼성 역시 지난해 2688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면서 우리나라 국내총생산의 23% 가량을 차지했다. 두 가문 모두 스웨덴과 한국의 대표적인 대기업으로서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비슷한 덩치의 두 가문의 소유구조는 판이하다.
발렌베리가의 경우, 경영권을 가지고 있는 기업의 주식을 경영인이 직접 소유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소유할 수 없다. 대신 지주회사인 인베스터가 해당 기업의 주식을 가지며, 인베스터를 다시 발렌베리 가문이 설립한 3개의 공익재단이 소유하는 방식을 취한다.
발렌베리가는 현재 스웨덴 2위 은행인 SEB(스톡홀롬 엔스킬다 은행), 유럽 최대 가전업체인 일렉트로룩스, 세계 최대 통신 장비 업체 에릭슨 등 19개 기업의 경영권을 소유하고 있다. 19개 자회사는 이익을 배당형태로 인베스터에 보내며 서로 출자관계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삼성가의 경우, 우리나라 대부분의 대기업이 그러하듯 오너 일가가 지주회사 및 계열사 주식을 직접 소유한다. 삼성 그룹은 지주회사격인 삼성에버랜드를 포함해 총 29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으며, 이들은 상호출자관계에 있다.
◆ 전혀 다른 경영권 승계 방식
정반대의 소유 구조는 경영권 승계 방식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발렌베리가는 지주회사인 인베스터의 주식 5.3%을 소유하고 21.5%의 의결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경영권을 가지고 있는 다른 기업들이 상호출자 관계로 묶여 있지 않아 적대적 인수·합병(M&A)은 물론 내부적 부당거래 및 불법행위도 불가능하다. 이들이 보장받는 것은 21.5%의 의결권에 의한 경영권 승계다. 지분과는 무관하다. 이 때문에 5대에 걸친 경영권 세습 과정에서 증여 및 상속에 관해 법적인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
삼성의 경우, 대부분의 대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지주회사 및 계열사 지분확보를 통해 경영권 승계 작업이 이뤄진다. 물론 부당 내부거래 등 불법적인 방법도 동원된다. 삼성은 이미 지난 1995년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사실이 드러나면서 경영권 승계 부당성에 대한 논란이 일어난 바 있다.
최근에도 삼성은 지주회사 격인 삼성에버랜드가 제일모직 패션부문을 매입하고 삼성SDS와 삼성SNS의 합병을 발표하는 등 사업구조 개편을 단행했다. 이를 통해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에버랜드 최대주주(25.1% 소유)로 올라섰으며 삼성SDS의 지분율도 기존 8.81%에서 11.26%로 늘어나게 된다. 주식이 현금으로 환원되는 구조를 따져보면 지분율 확대 및 승계는 자산 승계로도 이어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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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쿠스 발렌베리 현 SEB 회장(좌)과 발렌베리 가문 창시자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우) |
◆ 경영수업, 혹독하게 VS 은밀하게
발렌베리가는 경영권을 중시하는 만큼 경영수업 또한 까다롭다. 해군장교로 군복무를 해야 하며, 부모 도움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 유학을 마쳐야만 한다. 그야말로 서바이벌이다. 5세대 후계자이자 현재 발렌베리가 투톱 중 한 명인 마르쿠스 발렌베리 SEB 회장 역시 스웨덴 해군사관학교와 미국 조지타운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스웨덴 해군에서 중위로 복무한 그는 1980년 미국 시티뱅크 본사를 시작으로 독일 도이치방크, 영국 SG워버그 등에서 금융 실무를 익혔다. 그리고 2010년 SEB 회장자리에 올랐다.
삼성가의 경우 자사를 통해 철저히 내부적인 경영수업을 시킨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우, 1991년 삼성전자 총무그룹에 부장으로 입사했으며, 삼성전자 기획팀 상무 등을 거쳐 2007년 삼성전자 전무, 2009년 삼성전자 부사장, 2010년 삼성전자 사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3년 뒤인 올해 1월 삼성전자 부회장 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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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삼성가의 내부적인 기준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대외적으로 나타난 경영 실적만이 객관적인 기준이다. 2000년 이 부회장이 야심차게 내놓은 삼성e 사업은 2009년 계열사들에 387억원의 손실을 떠넘기며 정리됐다. 한 마디로 실패했다. 이는 이후 이 부회장의 경영자 자질 뒤에 두고두고 물음표가 따라 붙는 계기가 됐다. 이 부회장은 아직까지 이를 지울만한 경영 실적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 경영권과 부(富), 하나만 선택할 수 없는 삼성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기업의 근간이 되는 발렌베리가의 독특한 소유구조는 저절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발렌베리가에게는 선택의 순간이 있었고, 그 순간에 그들은 ‘경영권’을 요구했다. 1938년 스웨덴은 극심한 노사분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에 스웨덴 정부와 스웨덴경영자연합(SAF), 스웨덴노동조합(LO) 등 3자는 샬트셰바덴 협약이라는 역사적인 ‘노·사·정 대타협’을 체결했다. 차등의결권을 도입해 오너 일가의 기업 지배권을 보장하는 대신, 회사 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납부한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차등의결권은 이사회에서 1주당 1표가 아닌 1주당 10에서 1000까지 비중을 부여받는 권한을 말한다. 발렌베리가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이익금 대신 경영권 보장을 선택했다.
삼성은 어떨까? 삼성은 올해 3분기 60조원에 육박하는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지난 2분기에도 57조원의 매출을 올리며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대 기업임을 과시했다. 반면 삼성의 ‘노조 무력화 문건’이 공개되고 삼성전자서비스 근로자가 자살하는 등 화려한 실적에 가려져 있던 삼성의 어두운 면도 드러났다. 이에 전국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은 삼성과의 전면전을 선언했다. 삼성은 창업 이후 최고의 실적과 최악의 노사 상황을 동시에 맞고 있다.
이 시점에서 만약 정부와 전경련, 민주노총 등이 참여해 ‘오너 일가의 기업 지배권을 인정할테니 회사 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납부하라’는 협약을 제시하면 삼성가는 수용할까? 그럴 가능성은 제로다. 당장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3세 경영 승계 형태를 봐도 사회적 지지를 받는 경영권 승계와는 거리가 멀다. 삼성은 그룹 차원의 기업구조 조정 및 인수·합병을 통해 이재용 부회장의 삼성내 지분 확보를 도왔다. 삼성가 내에서 이뤄지는 일들은 국민의 동의와 지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삼성은 지금까지처럼 오너 일가가 계열사들의 주식을 직접 소유하며 기업 이익금을 자신들의 주머니에 차곡차곡 쌓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