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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아는 어떻게 '가구 제국'이 됐나

이계원 기자 gwlee@businesspost.co.kr 2014-09-14 19: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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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케아는 어떻게 '가구 제국'이 됐나  
▲ 이케아 창업자 잉그바르 캄프라드

이케아가 가구공룡으로 성장한 비결은 ‘저가전략’이 전부일까?

이케아 창업주 잉그바르 캄프라드(88)는 구두쇠다. 그는 1원도 아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구두쇠 정신은 이케아에 그대로 주입됐다. 그는 이케아에서 파는 가구가 싸다는 데 그치지 않고 헐값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다. 캄프라드는 이케아가 다른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케아의 존재이유는 고객들에게 더 나은 일상생활을 안겨주는 데 있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이런 창업주의 생각은 스웨턴의 작은 마을에서 출발한 이케아를 전 세계에 걸친 제국으로 발전시켰다.

◆ ‘장사의 신’ 캄프라드, 유럽 최고 갑부

잉그바르 캄프라드는 유럽 최고의 갑부이자 세계 네번째 부자다. 그는 지난해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이 선정한 세계 500대 억만장자 가운데 4위에 이름을 올렸다.

캄프라드의 재산은 517억 달러에 이른다. 캄프라드가 소유한 재산 외에 재단이 보유하고 있는 재산을 합치면 실질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주인 빌 게이츠보다 더 부자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캄프라드는 1926년 스웨덴의 알름훌트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지역은 1년 중 절반은 눈보라에 휩싸이는 척박한 곳이다. 그래서 주민들의 생활력도 강했다.

캄프라드는 어린 시절 용돈을 벌기 위해 장사를 했다. 캄프라드는 5세 때 스톡홀름에서 고모의 도움을 받아 성냥 100갑을 사들여 1갑씩 팔며 이익을 남겼다. 또 크리스마스카드, 장식품, 직접 잡은 물고기까지 온갖 종류의 상품을 팔았다. 11세 때 자전거와 타자기를 살 돈을 벌었다.

캄프라드는 “내 핏속에 장사꾼의 기질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용돈벌이 장사를 경험하다 점점 장사에 일종의 집착 같은 것이 생겼다..

캄프라드는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1943년 잡화상인 '이케아'를 열었다. 그의 나이 17세 때였다.

이케아라는 상호는 잉그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 이름과 그가 소년시절을 보낸 농장 이름인 엘름타리드(Elmtaryd), 그 마을의 이름인 아군나리드(Agunnaryd)의 머리글자인 I, K, E, A를 각각 따 만들었다.

  이케아는 어떻게 '가구 제국'이 됐나  
▲ 이케아 창업자 잉그바르 캄프라드
캄프라드는 1951년 그의 나이 25세 때 가구 판매에 주력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정권이 주택 100만 가구 건설 계획을 발표하면서 가구 수요가 급팽창했기 때문이다.

캄프라드는 경쟁업체에 맞서기 위해 가격을 획기적으로 낮추기로 했다. 이를 위해 조립식 가구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만 해도 스웨덴 가정에서 가구는 대를 이어 사용하는 것으로 간주됐는데 이런 캄프라드의 발상은 시장에 충격을 줬다.

캄프라드는 1958년 이케아 가구 매장을 처음 열었다. 캄프라드는 이곳에서 사회적 통념을 깨는 가구를 내놓았다. 창고의 수납장을 거실로 가져오고 양동이용 플라스틱으로 의자를 만들었다.

◆ 구두쇠 캄프라드, 이케아 근간을 만들다

“1원을 절약하면 1원을 벌 수 있다. 당신이 억만장자라 해도 마찬가지다.” “구두쇠라는 세간의 평가가 자랑스럽다.” “자원을 낭비하는 일은 도덕적으로 큰 죄를 짓는 일이다.”

캄프라드가 한 말들이다. 그는 구두쇠로 잘 알려져 있다. 업계에서 ‘스쿠루지 영감’이라고도 불린다.

캄프라드는 평소 지하철 경로우대권을 이용한다. 주말에 15년 된 구닥다리 자동차를 몬다. 비행기는 무조건 이코노미석만 고집한다. 호텔에 묵을 때 호텔비에 포함됐다며 메모지와 볼펜 등을 챙겨 나온다. 차를 마실 때도 티백을 꼭 2번 이상 우려 마신다.

캄프라드는 일상에 필요한 물품을 1년에 단 한 번 성탄절 직후 대형 할인행사 때 구입한다. 물론 이케아 매장을 이용한다. 그의 집은 값싼 이케아의 가구로 장식됐다.
 
캄프라드의 이런 구두쇠 정신은 이케아 구석구석에 뿌리내려져 있다.

직원들은 이면지 사용이 필수다. 고위 임원들도 비행기는 이코노미석 외에 탈 수 없다. 어떤 고위 임원은 출근 때 저렴한 승용차를 이용하고 퇴근 후에 스포츠카를 몰기도 한다.

캄프라드는 “우리에게 멋진 자동차나 인상적 타이틀, 지위를 나타내는 다른 상징들 같은 게 전혀 필요 없다”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과 의지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캄프라드는 1973년 스웨덴의 세금을 참을 수 없다며 본사를 네덜란드로 옮겼다. 캄프라드는 “회사의 이익이 고객에 돌아가지 않는 사회구조가 불합리하다”고 주장했다.

◆ 가구공룡의 비결은 ‘저가전략’이 전부일까

캄프라드는 평소 “돈이 없는 사람들이 대개 이케아의 상품을 산다”며 “그저 싸거나 조금 싼 게 아니라 사람들이 상품을 보자마자 헐값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저가전략은 다른 가구업체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이케아는 성장하기도 전에 가구업체들의 견제를 받았다. 가구 제조업체들은 이케아에 가구를 납품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케아는 이런 위기를 극복했다. 오히려 기회로 삼았다. 이케아는 스스로 가구를 디자인하고 팔았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세계로 나갔다. 캄프라드는 "가구는 단순하고 다루기 쉬워야 한다"는 철학을 확립했다.

캄프라드는 이케아를 특별한 가구매장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케아만의 독특한 디자인의 가구는 물론이고 조립식 배송방식에다 식품매장이라는 색깔을 입혔다.
 
캄프라드는 “배고프면 아무도 가구를 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구업계 최초로 매장에서 음식도 제공했다. 이케아 매장을 찾는 고객들은 음식을 든든히 먹고 기본적으로 2시간 동안 거대한 이케아 매장을 둘러보고 더 많은 상품을 샀다.

캄프라드는 “우리는 개념(Concept) 기업”이라며 “이케아의 존재이유는 고객들에게 더 나은 일상생활을 안겨주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이케아는 1980년대부터 세계로 매장을 확대했다. 매년 10개 이상씩 매장을 냈다.

이케아는 세계 곳곳에서 모든 고객에게 똑같이 ‘방문경험’과 ‘상품의 가치’를 제공했다. 저렴하고 독특한 가구을 제공할 뿐인데도 ‘가구업계의 디즈니랜드’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이케아는 어떻게 '가구 제국'이 됐나  
▲ 잉그바르 캄프라드가 초기에 이케아 매장을 열 당시의 모습.

◆ 캄프라드를 둘러싼 무수한 논란들


캄프라드는 스웨덴의 ‘스티브 잡스’ 같은 존재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그의 어두운 이면에 대한 비판도 끊임없이 나온다.

캄프라드는 이케아의 몸집이 커지자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지배구조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케아는 영리단체인 ‘잉카홀딩’과 비영리단체인 ‘스티슈팅 잉카재단’이 동시에 지배하는 구조다. 잉카홀딩은 세계 이케아 매장을 운영하는 지주회사다. 캄프라드는 1982년 보유하던 회사 지분을 스티슈팅 잉카재단에 기부해 이 재단도 이케아를 지배할 수 있도록 했다.

캄프라드는 ‘인터 이케아 시스템’이라는 회사를 통해 세계 매장에서 벌어들이는 판매대금의 3%를 로얄티로 받는다. 그런데 이 회사는 또 다른 캄프라드의 재단인 ‘인터로고재단’이 지배한다. 이 재단은 조세피난처로 유명한 리히텐슈타인에 위치해 있다.

이 때문에 캄프라드는 이케아를 ‘탈세왕국’으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는다.

이케아가 저가전략을 유지하기 위해 제3세계 아동노동을 착취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스웨덴의 한 방송사는 1994년 파키스탄 아이들이 저임금을 받고 이케아의 양탄자를 짜는 장면을 방영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이케아는 아이들을 의무적으로 학교에 보내는 조건으로 납품업체와 계약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캄프라드는 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1994년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일자 “젊었을 때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공식사과하기도 했다.

캄프라드는 1986년 이케아그룹 회장에서 물러났지만 고문으로 이케아 경영전반에 조언하는 등 여전히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캄프라드는 “나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죽을 시간도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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