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쩔 수가 없다>는 기계와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사진은 영화 속의 한 장면 캡처본. <네이버 영화 예고편 저장소> |
[비즈니스포스트]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 공개됐다.
관객의 반응은 호불호가 있을 것 같다.
<어쩔 수가 없다>(2025)의 첫 장면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가장’이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요즘은 가장이라는 말도 자주 쓰지 않는 것 같은 데다 아버지만 가장인 시대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어쩔 수가 없다>는 가족을 위한 가장의 고군분투라는 매우 고전적 주제를 풀어간다.
전원주택 정원에서 바비큐를 굽고 있는 아버지 만수(이병헌)의 모습을 클로즈업 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만수는 한 여름 불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회사에서 특별 선물로 보내 준 장어를 정성껏 구워 아이들 입에 넣어준다. 아름다운 아내 미리(손예진)와 아들, 딸, 골든리트리버 두 마리까지 뭐 하나 부족해 보이지 않는 단란한 가족이다.
하지만 이날의 바비큐 만찬이 이들 가족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절정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부터 무려 25년간 제지회사에 근무하면서 ‘펄프맨’이라는 영광스런 상까지 받은 만수는 자신이 정리해고 대상이 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만수의 항의와 애원에도 불구하고 해고라는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반드시 3개월 내로 새 직장을 구하겠다고 다짐한 만수는 아내에게도 실직을 알리지 않고 마트 알바를 하면서 틈틈이 면접을 보러 다닌다.
<어쩔 수가 없다>는 많은 레퍼런스를 떠올리게 한다.
“코스타 가브라스에게 바친다.”는 자막을 통해 알 수 있듯 코스타 가브라스의 <엑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2006)와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엑스]를 한국적 상황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박찬욱 감독의 전작 <헤어질 결심>(2022)과는 결이 완전히 다른 블랙 코미디로 초기 ‘복수 3부작’과 맥락이 유사하다. 만수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취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가짜 광고를 내서 자신의 경쟁자가 될 인물들을 찾아낸다.
제지회사에서 20년 이상 근무하고 특수종이를 다룰 수 있는 전문가는 국내에 몇 안 되기 때문에 후보는 쉽게 가려졌다. 만수는 이들만 제거하면 취업의 문이 열릴 거라 믿는다.
만수가 이토록 절박한 까닭은 그동안 누렸던 중산층의 삶이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남편이 실직한 줄 모르고 3개월 동안 퇴직금을 다 까먹은 아내는 사실을 알게 되자 중대 결단을 발표한다.
자신은 테니스, 사교댄스 같은 취미 활동을 다 그만두고 치기공사 자격증을 살려 알바를 하겠다면서 아이들 학원, 넷플릭스 구독까지 불필요한 건 다 끊어버려야 한다고 선언한다.
가장 결정적인 선택은 집을 팔자는 것이다.
만수는 9살까지 살던 주택을 20년 만에 다시 사서 폐가 같았던 집 안팎을 자기 손으로 하나하나 수리했다. 만수에게 집은 자신의 근원이자 성공의 상징이다.
가장의 고뇌와 외로움을 다룬 영화들은 비상 상태인 사회를 배경으로 한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한국 영화로는 한국전쟁 직후 해방촌 판자 집에 사는 피난민 가족의 가장(김진규)의 옴짝달싹 할 수 없는 현실을 다룬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이 있다.
매일 “가자”라고 소리치는 실성한 어머니, 전쟁에서 장애를 얻은 남동생, 양공주가 된 여동생, 만삭인 아내, 어린 자녀까지 가장의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는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어쩔 수 없다>의 만수처럼 <오발탄>의 가장도 치통 때문에 고생한다. 두 영화에서 치통은 가장의 애환에 대한 환유다.
권투 챔피언이었던 가장(러셀 크로우)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굴욕적인 내기 권투를 하는 <신데렐라 맨>(론 하워드, 2005)의 배경은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다.
IMF가 한국 사회에 던진 충격을 강렬하게 표현한 단편 <소풍>(송일곤, 1999)은 부도가 나서 빚더미에 앉은 가장이 가족들과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 내용을 그렸다.
뉴스에서 비슷한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던 시절이다. 여성 가장의 맹활약이 담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안국진, 2015)에서 아내(이정현)은 공장에서 일하다 장애인이 된 남편 대신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다 하지만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쩔 수가 없다>는 전쟁, 대공황 상황은 아니지만 기계와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만수 가족이 중산층의 삶을 유지하려는 관성에서 조금만 다른 시각을 가졌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직 어린 자녀들을 양육해야 하는 40대 가장으로선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이해가 된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대사인 “어쩔 수가 없다”라는 인식은 만수를 극단으로 몰고 간다. 이현경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으로 평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영화와 인문학 강의를 해오고 있다. 평론집 '영화, 내 맘대로 봐도 괜찮을까?'와 '봉준호 코드', '한국영화감독1',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등의 공저가 있다. 단편영화 '행복엄마의 오디세이'(2013), '어른들은 묵묵부답'(2017), '꿈 그리고 뉘앙스'(2021)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영화에 대해 쓰는 일과 영화를 만드는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