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 소부장 규제만 나오면 한국 반도체 '몸살', 전문가들 "소부장 국산화 시급, 골든타임 지나고 있다"
김호현 기자 hsmyk@businesspost.co.kr2025-09-01 16:5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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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포스트] 한국 반도체 산업이 미국과 일본 등의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규제가 나올 때 마다 크게 흔들리고 있다.
2019년 일본과의 무역 분쟁 과정에서 일본이 반도체 소재 수출을 금지하자 큰 홍역을 치렀던 한국 반도체 산업은 최근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장비 도입 규제 발표로 또다시 긴장감이 커지고 있다.
▲ 한국 반도체 산업이 미국과 일본 등의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규제가 나올 때마다 크게 입지가 흔들리면서, 국산화율이 30% 수준에 머물고 있는 반도체 소부장 산업을 국가적 차원에서 서둘러 키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이에 따라 현재 30%에 불과한 반도체 소부장 국산화율을 빠르게 끌어올려 생산 기술 자립화를 이뤄야 하며, 반도체 제조 전공정의 핵심 장비인 노광 장비 국산화를 적극 추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주승환 인하대 제조혁신대학원 교수는 1일 비즈니스포스트와 인터뷰에서 “한국 반도체 소부장 산업은 골든타임을 지나고 있다”며 “중국이 나노 단위 심자외선(DUV) 노광 장비를 만들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전공정 장비 업체들은 나노 기술력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주 교수는 이어 “메모리반도체 산업은 중국이 빠르게 추격하고 있어 언젠가 패권이 중국으로 넘어갈 것”이라며 “그 상황이 왔을 때 한국은 일본처럼 반도체 소부장을 중국에 팔 수 있는 역량이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세계 메모리반도체 산업은 당초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가 이것이 일본으로 넘어갔고, 현재는 한국이 70%가 넘는 점유율을 차지하며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다만 최근 중국은 DDR5 D램,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첨단 메모리 제품을 개발하며 추격 속도를 높이고 있는 상황이다.
과거 일본은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에 추격당하자, 반도체 개발과 생산에 필요한 소부장 산업을 키웠다. 현재도 도쿄일렉트론은 테스팅, 증착, 식각, 세척 등을 비롯한 다양한 제품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팔고 있다.
도쿄일렉트론이 반도체 장비를 통해 한국으로부터 벌어들이는 이익은 막대하다. 도쿄일렉트론의 2025년 2분기 실적자료에 따르면 회사는 한국으로부터 8300억 원을 벌어들였다. 지난해 한 해 동안은 한국에서 3조8700억 원의 매출을 냈다.
이렇듯 일본이 메모리반도체 패권을 한국에 빼앗긴 후 반도체 소부장 산업으로 만회하고 있지만, 우리나라가 머지않아 중국에 메모리 제조 패권을 빼앗기면 사실상 만회할 길이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한국의 반도체 소부장 국산화율은 30%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대부분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소부장을 수입하고 있다.
이에 비해 중국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이 대중 반도체 규제를 강화하자 중국 정부는 소부장 자립에 나섰다. 낸드플래시를 개발하는 양쯔강메모리(YMTC)는 추후 모든 반도체 제조 장비를 중국산으로 채우겠다는 목표를 밝히기도 했다.
중국은 또 나노 단위 첨단 공정에 필수인 노광장비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은 7나노 이하 공정에 활용할 수 있는 심자외선(DUV) 장비 개발에 진척을 보이고 있으며, 이를 넘어선 극자외선(EUV) 장비 개발에도 도전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여전히 나노 단위보다 1천 배 두꺼운 마이크로 공정 기술에 머물고 있으며, 노광장비 기술은 전혀 보유하고 있지 않다. 중국이 메모리반도체 제조 패권을 가져가면, 한국은 반도체 산업은 완전히 설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는 이유다.
주 교수는 “일각에선 EUV 국산 장비 개발이 무모하다고 말하지만, 한국 반도체 자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투자”라며 “인공지능(AI) 투자 100조 원 가운데 일부라도 반도체 장비 개발을 위해 투자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최근 한 세미나에서 “소부장 산업은 반도체 제조 산업의 기반”이라며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소부장의 기술수준과 역량이 경쟁력을 좌우하는데, 한국은 소부장 국산화율이 30% 수준에 그치고 해외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고 말했다.
▲ 주승환 인하대학교 제조혁신대학원 교수. <인하대 제조혁신대학원 홈페이지 갈무리>
반도체 소부장 자립이 없다면, 현재 한국의 메모리반도체 세계 시장 주도권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게 반도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미국이나 일본, 유럽이 반도체 소부장의 한국 수출을 규제하면, 우리나라 반도체 공장은 멈춰서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달 말 미국 상무부의 중국 반도체 공장 첨단 설비 반입 규제 조치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D램과 낸드플래시 공장은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SK하이닉스는 중국에서 D램의 35%와 낸드플래시의 37%를 생산하고 있고, 삼성전자는 중국에서 낸드플래시의 30%를 만들고 있다.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은 지난달 29일(현지시각) 삼성전자의 중국 시안공장과 SK하이닉스의 중국 우시공장 등을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프로그램에서 제외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앞으로 중국에 반도체 장비를 반입할 때 '건별 심사'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사실상 자국 첨단 반도체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한 것으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는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등 반도체 장비 제조사의 첨단 제품을 제때 중국 공장에 적용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앞선 기술 공정으로 생산라인을 전환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동희 SK증권 연구원은 이번 미국 규제의 중단기 영향은 제한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악영향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미국의 규제가 장기화한다면 중국 내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생산라인은 노후화할 것이고, 중국 구공정(레거시) 반도체 기업과 경쟁 구도가 심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같은 상황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9년 7월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 갈등이 무역분쟁으로 이어지면서, 일본은 불화수소 등 반도체 핵심 소재 3개 품목의 수출을 규제했고, 한국을 전략물자 수출 우대국인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했다.
한일 갈등은 2023년 3월 일본이 수출 규제를 해제하고 한국이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취하하며 4년 만에 마무리됐지만, 한국 반도체 업계는 일본 반도체 소부장 의존도 문제를 절절히 체감하는 계기가 됐다.
주 교수는 “국내 반도체 소부장 제조사들은 규모가 아직 작고, 사업 리스크와 여러 요인으로 첨단 기술에 투자하기를 꺼리는 상황”이라며 “결국 정부가 반도체 소부장 산업을 키우기 위한 체계적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김호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