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이재명 정부가 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100조 원 규모의 '국민펀드' 조성에 나선다.
민간 투자와 정부 재원을 결합한 방식으로 국민 참여를 유도하고 세제 혜택과 배당 수익 등을 통해 성과를 국민과 공유한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과거 '정부 펀드'가 사실상 실패했던 전례를 감안할 때 이번 펀드가 성공하려면 특별한 대책과 각오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이재명 대통령이 19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19일 대통령실 안팎의 움직임을 종합하면 정부는 이재명 대통령의 핵심 금융 공약인 100조 원대 '첨단산업 국민펀드' 구상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앞서 이 대통령은 17일(현지시각) 캐나다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확대 세션에서 내놓은 연설을 통해 "AI 혁신에서 민간의 역할이 크다"며 "민간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과감한 세제 혜택과 규제 혁신, 국민펀드 조성을 통해 국가 전반의 AI 대전환을 추진하고 아태 지역 제1의 AI 허브 구축을 병행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7일 국정기획위원회가 배포한 '대한민국 진짜 성장을 위한 전략(새 정부 성장정책 해설서)'에도 금융개혁의 하나로 AI 투자를 위한 '국민펀드' 구축 방안이 포함됐다.
국민펀드는 정부 출연과 국민 투자가 결합한 모자펀드 형태로 조성될 예정이다. 국민이 투자한 자금은 '자펀드'로 편입되고 '모펀드'는 정부 출연, 국책은행, 공적연금 등에서 재원을 조달하는 방식을 검토하고 있다.
이는 위험 분산과 동시에 규모의 투자가 가능하며 단기적 인기보다 중장기 수익성과 지속성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이번 국민펀드에서 발생한 수익으로 정부의 수입이 발생하면 국민의 납세 부담이 줄어들 수 있다. 이 펀드의 모델은 싱가포르의 국부펀드인 '테마섹'이 꼽힌다. 테마섹은 수익을 통해 국민 전체의 세금 부담을 평균 17.8%까지 줄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투자 성공 시 지분 매각, 배당 수익도 가능하다. 정부는 투자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배당 수익에 대한 소득공제나 비과세 혜택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K-엔비디아' 육성을 위한 국민펀드 구상을 꾸준히 강조해왔다.
그는 3월2일 더불어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의 유튜브 채널 '오피큐알OPQR'에서 "엔비디아 같은 회사가 (한국에) 생기고 30%가 국민 지분이라면 세금에 그렇게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며 "AI와 반도체 같은 미래 전략산업에 국민이 공동 투자하고 성과는 모든 국민이 나눠 갖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과거 정권들도 '정부 주도 펀드'를 조성한 적이 있다.
하지만 역대 정부들의 정부 주도 펀드는 사실상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책 기조를 반영한 펀드들은 출범 초기 큰 주목을 받았으나 정권 교체 후 관심이 줄어들며 수익률이 하락하고 투자자들에게 외면 받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대표적 사례로는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펀드', 박근혜 정부의 '통일펀드', 문재인 정부의 '뉴딜펀드' 등이 꼽힌다.
'통일펀드'를 제외한 관련 펀드 대표 상품의 연간 수익률은 2025년 6월18일 기준 –1.32%(뉴딜펀드)에서 최고 0.18%(녹색성장펀드)로 평균 예금 금리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통일펀드'도 세 달 전까지만 해도 연간 수익률이 1.20%에 머물렀다. 다만 통일펀드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파면 이후 수직 상승해 6월18일 기준 수익률 12.63%을 기록했다.
▲ '통일펀드'의 대표 상품인 '삼성통일코리아증권자1'의 수익률 그래프. 붉은색이 수익률로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이후 급등한 것을 볼 수 있다. <삼성액티브자산운용 홈페이지 갈무리>
통일펀드는 박근혜 정부가 내놓았지만 역설적으로 민주당 계열인 이재명 대통령 취임의 정치적 수혜를 입은 셈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이후 이 대통령 당선이 유력해지면서 남북관계 개선 가능성이 높아지자 수익률이 개선된 것으로 풀이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펀드'는 녹색성장 정책을 타고 만들어졌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저탄소 녹색성장'을 국가 발전 전략으로 제시하면서 친환경 산업을 육성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국내 친환경 산업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녹색성장펀드 역시 내리막길을 걸었다. 녹색성장펀드가 테마성 상품이다 보니 국정 기조에 크게 영향을 받고 해외 시장에 비해 국내 시장이 협소해 편입할 만한 종목도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통일펀드는 지난 2014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독일 드레스덴에서 '통일은 대박'이라고 말한 뒤 출시됐다.
박근혜 정부 시절엔 남북 경제협력을 대비한 통일펀드를 조성해 북한 관련 사업과 경협주 투자 활성화를 목표로 삼았으나 개성공단 폐쇄 등 남북관계 경색으로 투자 동력을 상실했다. 통일펀드는 당시 남북 경협주를 편입하는 방식으로 운용됐다.
뉴딜펀드는 정부가 20조 원 규모를 선도적으로 출자하고 민간 자금을 유치해 신재생에너지·데이터 경제·AI 등 미래 산업에 투자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초기 '국민 재테크 상품'이라고 홍보가 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뉴딜펀드 운영의 동력이 크게 떨어졌다. 새 정부의 부처와 공공기관들은 부서명에 '뉴딜'이라는 단어를 없앴고 관련 예산은 삭감됐다.
이를테면 금융위원회는 2022년 5월 '뉴딜금융과' 명칭을 '지속가능금융과'로 바꿨다. KDB산업은행은 7월 'ESG(환경·사회·지배구조)·뉴딜기획부'를 'ESG기획부'로 고쳤고 한국성장금융도 '뉴딜펀드운용실'을 '혁신금융실'로 바꾸며 뉴딜을 지웠다.
실제 예산 배정도 줄였다. 문재인 정부는 2021년 뉴딜펀드 예산을 5100억 원 배정했고 2022년 6천억 원으로 계획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2022년 9월 국회에 제출한 '2023년 예산안'에 따르면 뉴딜펀드는 혁신성장펀드로 이름이 바뀌었고 투입 예산도 3천억 원에 그쳤다.
해외 사례로 성공적이라 평가 받는 정책 펀드도 있다.
독일은 우리나라의 뉴딜펀드와 같이 정부가 나서 재생에너지산업에 투자하는 펀드를 조성해 20년 넘게 운영하고 있다.
독일은 2000년부터 121GW(발전량) 규모 신재생에너지 관련 사업을 진행했다. 여기에 개별 투자자나 해당 지역 농부가 투자한 비율이 42.5%에 달한다. 지난 20년간 총 160조 원의 민간 자금이 신재생에너지 관련 펀드에 투자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독일의 시민참여형 펀드는 재생에너지산업 육성이 아니라 농업인들이 농한기에도 수익을 낼 수 있는 대안으로 추진됐다.
금융권에선 정책 펀드의 '정치적 한계'를 지적한다. 특정 정권의 국정과제와 맞물려 조성되므로 정권이 바뀌면 후속 정책이 나오지 않아 운영이 중단되거나 축소되기 쉽다는 점이 가장 큰 약점이다.
투자 업계 관계자는 비즈니스포스트와 나눈 통화에서 "역대 정부들의 과거들을 보면 펀드들이 다음 정권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다음 정권에서 정책적으로 이어지지 못해 동력을 잃는다"고 말했다.
또한 특정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과정에서 비효율적인 투자와 시장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도 나온다. 정치권의 입김이 작용할 수 있는데 이는 '표의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어 시장 현실을 간과할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경제학자는 비즈니스포스트와 나눈 통화에서 "과거 사례에서도 확인됐듯 중장기적 정책 추진 과정에서는 시차로 인한 중단이나 축소의 리스크가 존재한다"며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또 정부의 지나친 시장 개입으로 산업 전반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우려가 있다"며 "이러한 점들에 대한 사전 검토와 충분한 고려가 정책 수립 단계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성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