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이재명 시대, 공공금융기관 가운데 갈등비용이 가장 크게 줄어들 곳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한국산업은행이다.
산업은행은 지난 3년 윤석열정부의 본점 부산 이전 정책에 노사가 극한 대립을 겪었다.
▲ 2024년 4월11일 김현준 KDB산업은행 노조위원장(가운데)과 박홍배 더불어민주연합 비례대표 후보(왼쪽)가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에서 열린 이전반대 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윤석열정부는 출범 전부터 인수위원회 아래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회를 두고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 정책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전국금융산업노조 한국산업은행지부(산업은행 노조)는 이에 맞서 무기한 투쟁과 천막농성, 1인시위 등으로 강경 대응했다.
노조는 윤석열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22년 6월부터 2023년 말까지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로비에서 매일 같이 출근 전 노조원들의 반대 집회를 열었고 2024년부터는 서울 여의도 국회 앞 1인 시위, 매주 목요일 국민의힘 당사 앞 집회 등으로 농성을 이어갔다.
노조가 국회 앞 1인 시위를 마친 것은 얼마 전, 대선 이후인 6월5일의 일이다.
노조가 반대 농성을 접은 이유는 명확하다. 이재명정부 출범과 함께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졌기 때문이다.
김현준 산업은행 노조위원장은 5일 ‘승리 서신’을 통해 “우리는 산업은행 이전을 막아낼 수 있다고 확신했고, 투쟁 3년 차를 맞이한 지금, 확신은 현실이 됐다”며 “2025년 6월5일 1094일 간의 싸움을 끝으로 산업은행 이전 반대 투쟁의 1막을 마친다”고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 정책을 사실상 폐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대통령은 후보시절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 대신 동남권산업투자공사 설립을 대안으로 내세웠다.
이 대통령은 1일 페이스북에 “해양수도 부산에 동남투자은행(가칭) 설립을 추진하겠다”며 “갈등만 키우고 진전 없이 반복된 산업은행 이전 논란을 넘어 해양산업금융을 실질적으로 지원하고 청년 일자리 확대까지 실현하는 대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받아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일 ‘동남권산업투자공사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민 의원이 발의한 동남권산업투자공사는 중앙정부와 부산·울산·경남 등 지방정부, 산업은행 등 공공기관이 약 3조 원의 자본을 출자해 만드는 지역 투자기관으로 동남권(부산·울산·경남) 지역 기업들을 위한 산업혁신기금을 조성하고 투자하는 것을 뼈대로 한다.
산업은행 노조는 이 대통령과 민병덕 의원의 동남권산업투자공사 구상에 즉각 환영의 뜻을 밝혔다.
노조는 2일 ‘동남권산업투자공사 설립 밥안을 적극 지지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내고 “동남권산업투자공사 신설이 지역경제 활성화와 국가 금융산업 발전에 실질적 도움이 될 것이라는 데 공감한다”며 “동남권산업투자공사 성장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부산시가 여전히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을 추진한다고 하지만 거대 여당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만큼 추진 동력은 이전만 못할 수밖에 없다.
산업은행이 이재명정부에서 본점의 부산 이전 갈등 없이 본업에 집중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강석훈 전 회장 시절, 산업은행이 주요 과제로 안고 있던 굵직한 구조조정 건을 다수 마무리한 점도, 앞으로 5년 산업은행을 향한 기대감을 키우는 요인으로 꼽힌다.
강 전 회장은 지난 3년 동안 산업은행을 이끌며 대우조선해양 민영화와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통합 등의 성과를 냈다.
산업은행은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 육성, 1980년대에는 부품소재산업 육성과 기계 국산화, 1990년대에는 첨단산업과 기술개발 지원, 2000년대는 벤처생태계 구축 등 시대에 따라 핵심역할을 계속 달리하며 국가 산업발전을 이끌었다.
하지만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대형 부실기업들을 다수 떠안으면서 오랜 기간(윤석열정권이 출범한 이후까지도) 미래 성장동력 육성보다 사후 구조조정에 많은 자원을 투입해 '과거 지향적'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굵직한 구조조정 건들을 대부분 마무리한 만큼 미래산업 육성이라는 본연의 역할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이재명정부가 끝나는 2030년, 하늘에는 미래 자동차인 ‘도심항공모빌리티(UAM)’가 날아다닐 것으로 예상된다. 그나마 UAM은 예상 가능한 일,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전은 어디까지 진행됐을지 가늠조차 힘들다.
▲ 강석훈 전 산업은행 회장. 강 전 회장은 산업은행을 이끄는 3년 동안 줄기차게 '골든타임'을 강조하며 반도체와 인공지능산업 투자 확대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
이 같은 인공지능(AI) 전환의 격변기, 국내 첨단산업 육성을 이끄는 산업은행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인공지능 시대, 기술 패권을 쥐기 위한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나날이 심화하는 가운데 한국은 기술 경쟁력 없이는 경제 성장을 이어가기 쉽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어서다.
한국이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에 집중 투자할 수 있는 금융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첨단산업 금융지원 선봉에 선 곳이 바로 산업은행이다.
산업은행 노조가 부산 이전 투쟁에서 승리를 선언한 5일은 강석훈 전 회장이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날이기도 하다.
강 전 회장은 5일 퇴임식에서 미래를 늘 염두에 두고 업무에 임할 것, AI 기반 산업 전반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지원 해줄 것, 더 큰 한국산업은행을 위해 힘써줄 것 등 크게 3가지를 임직원에게 당부했다.
산업은행 회장은 금융위원장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제 막 새 정부가 출범한 만큼 산업은행에 새 회장이 오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다만 누가 회장으로 오더라도 강 전 회장의 당부를 새겼으면 한다.
산업은행 새 회장은 ‘미래를 염두에 두고’ ‘AI산업 전반 지원을 강화’하며 ‘더 큰 산업은행’을 이끌어야 한다. 이한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