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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부동산은 ‘서울 불패’, ‘인한양’ 꿈꾼 정약용·사채 끌어쓴 유만주

김홍준 기자 hjkim@businesspost.co.kr 2024-04-28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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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포스트] 국내 부동산 시장 열기가 한풀 꺾인 가운데 서울과 지방 사이 시세 온도 차이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부동산 시장에서 ‘서울 불패’ 현상이 나타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심지어 선조들이 남긴 조선 후기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부동산은 ‘서울 불패’, ‘인한양’ 꿈꾼 정약용·사채 끌어쓴 유만주
▲ 다산 정약용 영정. <전남 강진군>

28일 KB부동산의 부동산 빅데이터 통계 분석 플랫폼 데이터허브에 따르면 2024년 2월 기준으로 전국 미분양 매물은 모두 6만4874호였다.

미분양 매물이 가장 많은 곳을 살펴보면 대구로 9927호였다. 그 뒤로 경북 9158호, 경기 8095호였다. 반면 대한민국 인구의 5분의1가량인 939만 명이 살고 있는 서울의 미분양 매물은 1018호에 그쳤다.

아파트 매매 가격에서도 ‘서울 불패’ 현상이 드러난다.

한국부동산원이 25일 발표한 주간 아파트 가격 동향에 따르면 전국의 아파트 가격이 22주째 하락세를 기록한 가운데 서울 아파트 가격은 5주 연속 상승세를 유지했다.

이러한 서울 부동산 중심주의는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확인할 수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오직 한양으로부터 10리 안에서만 살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집안의 힘이 쇠락해 한양 한복판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면 잠시 근교에 살면서 과일과 채소를 심어 생활을 유지하다가 재산이 조금 불어나면 바로 도시 복판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이 발언은 과일과 채소를 심어 생활을 유지한다는 표현의 어색함을 제외하면 마치 요즘의 부동산 시장을 떠오르게 한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로 꼽히는 다산 정약용이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평역한 정약용이 유배 시절 자기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른바 ‘인서울’의 중요성이 담겨 있다.

정약용은 아들들에게 서울살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서울을 한 번 떠나게 되면 다시는 서울로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대개 그늘진 벼랑 깊숙한 골짜기에서는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없고 함께 어울려 지내는 사람들은 모두 버림받은 쓸모없는 사람이라 원망하는 마음만 가득하다”며 “보고 듣는 것이라곤 실속하고 비루한 이야기뿐이기 때문에 한 번 멀리 떠나면 영영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된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서울 문밖에서 몇십 리만 떨어져도 태곳적의 원시사회 같은데 하물며 먼 시골은 어떻겠느냐”며 “서둘러 먼 시골로 이사 가버린다면 무식하고 천한 백성으로 일생을 끝마치고 말 뿐”이라고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정약용은 서울 거주에 실패했다. 그는 유배에서 돌아온 뒤 고향인 경기 광주부(지금의 경기 남양주)에 머물면서 저술 활동에 힘쓰다 1836년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이 살던 경기 남양주에는 현재 다산신도시가 위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산신도시는 서울 접근성이 좋고 주거환경이 쾌적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산신도시 대장아파트로 꼽히는 다산자이아이비플레스 전용면적 84㎡ 매물은 서울과 비슷한 가격인 9억 원에서 11억 원 사이에 거래된다.
 
조선시대에도 부동산은 ‘서울 불패’, ‘인한양’ 꿈꾼 정약용·사채 끌어쓴 유만주
▲ 조선 후기 양반 유만주가 남긴 일기 ‘흠영(欽英)’ 표지. <서울대학교 규장각>

조선시대에는 짧은 서울 생활을 만끽한 뒤 좌절해 우울증에 걸린 사람도 있었다.

조선 후기 양반 유만주가 남긴 일기 ‘흠영(欽英)’에 따르면 그는 현재 서울 도봉구 창동 지역 초가집에다가 집안 살림이 어느 정도 넉넉해지자, 서울 생활을 꿈꾸며 이사를 준비했다. 

지금이야 창동이 서울이지만 당시에는 서울이 아닌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 창동리였다.

유만주는 기계 유씨로 경북 포항 북구 기계면을 본관으로 하는 조선시대 명문가 사람이다. 기계 유씨는 조선 초기부터 사육신 유응부를 배출한 가문이며 영조와 정조시기에는 관직이 재상에 이른 유척기, 유언호 등을 배출해 명성을 드높였다.

유만주의 아버지 유한준 또한 관직으로는 종5품 해주목 판관을 역임한 것이 전부지만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라는 평가를 받는 유명인이었다. 다만 유한준은 어린 시절 부모가 돌아가시고 형도 일찍 사망하게 되면서 형의 집안까지 돌본 탓에 집안 사정은 넉넉하지 못했다.

유한준이 1782년 해주목 판관을 지내게 된 이후로는 살림살이가 상당히 나아졌다. 그가 판관을 맡은 해주목이 황해도 행정과 군사의 거점이자 중심지로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부를 쌓아 황해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고을로 꼽혔기 때문이다.

이에 유만주는 1783년부터 창동을 떠나 서울 도성 안에 있는 기와집을 구하기 위해 집을 보러 여러 차례 돌아다녔다. 창동, 낙동(지금의 명동), 수서 등 여러 곳의 집을 살폈으나 결국 그해에는 집 구매에 성공하지 못했다.

유만주가 자신의 맘에 쏙 드는 집을 찾아 이를 구매하는 데 성공한 것은 1784년이다. 그는 명동에 있는 100여 칸짜리 기와집을 구매하는데 자그마치 2천 냥이라는 큰돈을 썼다. 2천 냥은 노예 400명을 살 수 있고 여덟 식구가 25년 동안 쌀을 사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다.

비록 유한준이 해주목 판관을 지내 살림이 여유로워졌다고는 하나 2년 만에 2천 냥을 구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유만주가 선택한 방법은 친척 집에서 돈을 빌리고 사채를 끌어다 쓰는 것이었다.

김대중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서강대 조교수를 지내던 2014년에 쓴 ‘유만주의 가옥구매’ 논문에 따르면 유만주는 영조 시절 영의정을 지냈던 유척기의 아들인 면천 군수 유언현에게 집을 구하기 위해 돈을 빌렸다. 이것도 모자라 한양을 중심으로 장사를 하던 경강상인에게 사채까지 끌어 썼다.

유만주가 집을 구하기 위해 ‘레버리지(외부자금 차입)’를 동원하자 집안은 난리가 났다. 유만주의 어머니는 이사계획을 당장 중단하라고 반대했으며 아버지 유한준은 계약을 당장 물리고 집값을 도로 찾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유만주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명동 기와집 구매를 강행했다.

그 뒤 유만주는 좋은 정원이 갖춰진 서울 명동 기와집 생활을 상당히 즐겼던 것으로 나타난다.

1784년 10월17일에 작성한 일기를 살펴보면 유만주는 “생각건대 찬 떨기 꽃이 피어 있고 달이 둥근 맑은 밤, 가령 애오라지 명동 집 정원에서 발길 닿는 대로 자유롭게 거니는 것도 시절인연(時節因緣)이니 인생은 다만 이와 같을 뿐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살고 있으므로 인생에서 더는 바랄 것이 없다는 뜻이다.

다만 유만주의 ‘인서울’ 생활은 1년 남짓으로 끝났다. 익산 군수로 자리를 옮긴 유한준이 해주목 판관을 지내던 시절의 일로 파직되면서 명동 생활을 접고 창동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서울살이를 접고 창동으로 돌아온 유만주는 극심한 우울증을 앓은 것으로 보인다. 계속 명동 기와집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던 그는 잇따른 과거 실패에 아들의 죽음이 겹치자 1788년 34세의 나이로 아버지 유한준보다 먼저 사망했다. 김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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