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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 김한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

정치판에서 대표적 기획 전문가, 윤석열의 정치 멘토 [2023년]
김홍준 기자 hjkim@businesspost.co.kr 2023-11-30 08: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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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Who Is ?] 김한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
▲ 김한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

김한길은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이다.

1953년 9월17일 일본 도쿄에서 한국사회당, 통일사회당 당수를 지낸 혁신계 정치인 김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중앙여고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소설 '바람과 박제'로 문학사상에서 소설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군 생활 때 썼던 ‘병정일기’가 문제가 되자 미국으로 건너가 미주 한국일보와 미주 중앙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귀국한 뒤 방송위원회 기획국 국장, 방송위원회 사무총장 서리와 기조실장을 지냈다.

방송에서 토크쇼 ‘김한길과 사람들’을 진행했다.

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16, 17, 19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김대중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과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다.

열린우리당 분당 사태 때 열린우리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계 개편 상황에 따라 합당과 탈당을 반복해 '정치 철새'라는 비판을 받았다.

18대 대선에서 민주통합당이 패배한 뒤 열린 당대표 경선에선 민주통합당 대표로 뽑혔다.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안철수 무소속 의원과 손을 잡고 새정치민주연합을 창당한 뒤 공동대표를 맡았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취임한 뒤 2016년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했다.

폐암 4기 진단을 받으면서 암 투병으로 오랜 기간을 보냈다.

2021년 윤석열 국민의힘 대통령선거 후보 캠프의 새시대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정계에 복귀했다. 윤 대통령이 취임한 뒤 대통령 직속 기구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경영활동의 공과
[Who Is ?] 김한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
▲ 김한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오른쪽)이 2022년 7월27일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민통합위원회 출범식에서 과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4년 총선 맞아 '김한길 역할론' 커져
2024년 총선을 맞아 국민의힘 안팎에서 김한길 역할론이 커지고 있다.

2023년 11월 현재 정치권에서는 김한길이 2024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국민의힘에서 비상대책위원회 또는 선거대책위원회에서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말이 퍼져 있다. 일각에서는 윤석열 대통열을 중심으로 한 중도보수 성격의 신당을 창당하는데 주축이 될 것이란 이야기까지 나왔다.

이준석 국민의힘 전 대표를 중심으로 '보수 신당' 창당 움직임이 가시화 되고,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도 이른바 반이재명계 의원들이 모종의 행동을 결행할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런 정치권 지각변동에서 김한길이 일정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3년 10월17일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 위원 및 국민의힘 지도부 등 90여 명을 초청해 만찬을 진행하며 “위원회의 다양한 정책 제언을 우리 당과 내각에서 좀 관심 있게 꼼꼼하게 한번 읽어달라”고 당부했다.

당시 윤 대통령은 서울 강서구청장 선거에서 국민의힘이 참패하면서 정치적 궁지에 몰렸는데 선거 직후 김한길에게 공개적으로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에 정치권에서는 김한길 역할론이 급격히 확대재생산됐다.

다만 김한길은 2023년 10월2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진행한 국민통합위원회의 ‘자살예방 상담신고 통합운영’ 브리핑 뒤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최근 민주당 비명계까지 아우르는 제3지대를 언급한 걸로 알려졌다는 보도가 있는데 어떤 입장이냐’는 질문을 받자 “일부 언론 등이 말해주고 있는 신당 창당은 생각해 본 일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다”고 답변했다.

그는 이어 “나도 얘기를 들었는데 우선 나는 정치를 떠나 있는 사람이고 또 지금은 내가 맡고 있는 국민통합위원회 일에 전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국민통합 국가전략 내놔
김한길은 국민통합위원회를 이끌면서 국민통합을 위한 국가전략을 내놨다.

국민통합위원회는 2023년 2월22일 라마다프라다 제주에서 열린 전체회의에서 국민통합 4대 정책과 12대 핵심과제를 담은 ‘국민통합 5개년 국가전략’을 발표했다.

4대 정책으로는 △대전환의 시대, 갈등의 예방과 대응 △성숙한 자유민주주의로 국민통합 △경제 양극화 완화와 지속가능한 산업 생태계 뒷받침 △소통과 연대를 통한사회문화 기반 구축 등이 제시됐다.

12대 과제에는 △인구구조 및 기후변화 등에 따른 갈등 완화 △세대·젠더 갈등 완화 △공동체 복원 및 사회적 연대 강화 △상호 관용의 정치문화 토대 마련 △다원민주주의에 기반한 정치제도 개선 △지방분권과 풀뿌리 민주주의 강화 △경제적 약자를 위한 신속하고 촘촘한 안전망 강화 △견고한 계층이동 사다리 복원 △대중소 기업, 신구 산업 간 상생협력 강화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사회복지 서비스 △다양성과 포용성을 존중하는 제도와 문화 △문화‧예술‧스포츠 보편적 향유권 등이 포함됐다.

김한길은 “지난해 ‘윤석열 정부 제1호 위원회’로 출범한 이후 지금까지가 국민통합위원회가 나아갈 방향과 전략을 수립하는 시기였다면 올해부터는 구체적인 성과를 도출해 국민들이 생활 속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국민통합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강화하고 그 방안에 한 발자국씩 더 다가서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 멘토,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 맡아
김한길은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된 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됐으며 취임 뒤에는 대통령 직속 기구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 자리에 올랐다. 김한길을 두고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 멘토'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한길은 2022년 3월14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산하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서울 종로구 금융감독원 연수원에 마련된 당선자 집무실에서 “김한길 대표께서는 세대와 계층을 아우르고 국민 통합을 이뤄낼 수 있는 분”이라며 인선 배경을 설명했다.

김한길과 윤 대통령의 인연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 대통령이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때 “저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발언을 했는데 이때 민주당 대표였던 김한길은 이를 지켜봤고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게 ‘수사팀 신분보호’를 요청했다. 그 이후 김한길은 윤 대통령에게 국회의원 출마 또한 권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21년 정계 복귀 이후로는 윤 대통령의 정치 멘토로서 한 달에 두세 차례 만나 정치 현안과 관련해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한길은 윤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대통령 직속 기구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윤 대통령은 2022년 7월27일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민통합위 출범식에 참석해 국민통합 추진 방향과 관련해 논의했다.

김한길은 “국민통합은 우리 사회의 도약과 발전을 위한 미룰 수 없는 과업이자 반드시 이뤄야 하는 시대정신이라는 점에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며 “담론 수준에 그쳤던 기존 위원회 방식을 탈피해 실용적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문제해결형 위원회로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국민통합위원회는 출범 이래 대중소기업 상생 특별위원회를 포함해 장애인 이동 편의 증진 특별위원회, 팬덤과 민주주의 특별위원회, 건강한 일터 특별위원회, 자립청년 특별위원회, 이주민과의 동행 특별위원회 등 다양한 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3년 10월17일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 위원 및 국민의힘 지도부 등 90여 명을 초청해 만찬을 진행하며 “국민통합은 전문성만 갖고 되는 게 아니라 실제 어려움을 우리가 공감해야 한다”며 “위원회의 다양한 정책 제언을 우리 당과 내각에서 좀 관심 있게 꼼꼼하게 한번 읽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윤석열 캠프의 새시대준비위원회 위원장
김한길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캠프의 새시대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정계에 복귀했다.

김한길은 2021년 11월21일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윤 후보를 만나 영입 제의를 수락한 뒤 “정권 교체야 말로 우리 시대의 시대 정신이고 정권교체를 통해서 새시대를 여는 데에 저도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저는 중도 또는 합리적 진보로 말씀되는 분들과 함께 어우러져서 정권교체에 기여하겠다”며 “국민의힘도 이제는 중원을 향해 두려움 없이 몽골 기병처럼 진격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새시대준비위원회는 선거대책위원회와는 별도로 윤 후보 직속으로 마련된 조직이다. 예산은 당에서 받지만 당의 통제를 받지 않는 조직으로 국민의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기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담긴 위해 만들어졌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보수판 열린우리당’ 창당의 준비 단계로서 중도보수 성향에 속하는 인사들을 모아 새시대준비위원회를 만든 것이 아니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021년 12월28일 YTN 인터뷰에서 “윤석열 후보가 김한길 전 의원을 비롯해 민주당에서 탈당한 분들을 모아 신당 창당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윤 후보가 당선되는 순간 이준석 대표를 비롯한 홍준표 의원은 팽 당해 배제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새시대준비위원회는 즉각 반박했다.

윤기찬 새시대준비위원회 대변인은 2021년 12월31일 보도자료를 통해 “창당이나 정계개편과 관련된 고려나 계획이 전혀 없다”며 “정권교체를 실현하고자 중도와 합리적 진보 성향 분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플랫폼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새시대준비위원회가 페미니스트로 알려진 신지예씨를 수석부위원장으로 영입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결국 신지예 수석부위원장이 사퇴하고 김한길도 이에 책임을 지고 위원장에서 물러났다. 그 뒤 새시대준비위원회는 명칭을 정권교체동행위원회로 바꾸고 윤 후보가 직접 위원장을 맡았다.

다만 새시대준비위원회 위원장을 그만둔 것과는 별개로 김한길은 윤 후보의 ‘직책 없는 책사’ 역할을 계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Who Is ?] 김한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
▲ 김한길 국민의당 상임 선거대책위원장이 2016년 3월1일 서울 마포구 국민의당 당사에서 열린 선거대책위원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연합뉴스>
△3년에 걸쳐 안철수와 동행
김한길은 안철수 새정치연합창당준비원회 위원장과 단일화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전격적으로 합당 선언을 하며 안철수 위원장과 동행을 시작했다.

김한길은 2014년 3월2일 국회 사랑재에서 안철수 위원장과 기자회견을 열고 “양측은 가장 이른 시일 내에 새 정치를 위한 신당창당으로 통합추진하고 이를 바탕으로 2017 정권교체를 실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갑작스런 합당 발표에 정치권이 크게 놀란 가운데 김한길은 다음날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저는 ‘1여 2야’의 정치구도를 1대1의 구도로 바꾸지 못하는 한 우리 미래를 꿈꿀 수 없다고 판단했다”며 갑작스럽게 합당을 발표한 이유를 밝혔다.

합당은 제3지대에서 새로운 정당을 만들고 그 정당에 민주당이 합류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새로운 정당은 2014년 3월26일 안철수 위원장이 단독으로 대표가 되는 형태로 창당됐으며 2014년 3월27일 민주당이 합류하면서 김한길이 공동대표가 되는 과정을 거쳐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은 2014년 상반기 재·보궐 선거에서 잇달아 패배했고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 두 명이 모두 사퇴했다. 이후 안철수와 김한길은 비노(비노무현)계의 대표 인사로서 정치적 행보를 같이 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당대표로 선출된 2015년 2월8일 이후로 이들과 친노(친노무현)세력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결국 안철수 전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는 2015년 12월13일 탈당했다.

이후 당명마저 더불어민주당으로 바뀌는 등 김한길·안철수의 색채를 빼려는 움직임이 강해지자 김한길 또한 2016년 1월3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고 안철수 전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의 신당 창당 작업에 합류했다. 안 전 대표는 당시 국민의당 창당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한길은 국민의당이 창당한 뒤 2016년 2월2일 국민의당의 상임 선거대책위원장이 됐다. 그러나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제시한 ‘야권 통합론’과 관련해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심한 갈등을 빚고 선거대책위원장을 그만두고 총선불출마를 선언했다.

이후 2017년 19대 대통령선거에서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의 지원유세에 합류했으나 같은 해 10월부터 폐암 4기로 투병을 하게 되면서 정치권과는 멀어졌다.
[Who Is ?] 김한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
▲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2013년 9월1일 서울 여의도 민주당 당사에서 열린 당사 입주식에서 당기를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당 대표 당선, 비주류에서 당의 중심으로
김한길은 친노(친노무현) 세력의 계파 정치를 비판하며 민주통합당의 만년 비주류라는 평가를 들었으나 2012년 대선 패배의 후폭풍 속에서 비노(비노무현) 세력의 중심 인사로 떠오르며 당권을 손에 쥐는 데 성공했다.

김한길은 2013년 5월4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된 뒤 수락연설을 통해 “계파도 세력도 없는 제가 당대표로 선택된 것 자체가 민주당의 큰 변화를 상징한다”며 “계파정치를 청산하라는 요구이고 책임정치를 구현하라는 명령”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민주당 혁신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도 내놨다. 구체적으로는 △정당 민주주의 회복 △정책정당 면모 강화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탕평 인사 등을 제시했다.

앞서 김한길은 앞서 2012년 열렸던 당대표 결선에서는 이해찬 의원에게 패배해 집단지도체제의 당 수석최고위원이 됐다. 다만 안철수 무소속 의원과 단일화 여부를 놓고 당 지도부와 갈등이 생기자 수석최고위원직을 그만두는 등의 행보를 보이며 비노계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김한길은 당 대표로 지내면서 서울 영등포 당사 폐쇄 및 중앙당 슬림화를 위한 혁신안을 내놓고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 반발해 촛불집회, 서울광장 천막당사 등을 주도하며 민주통합당을 이끌었다.

민주통합당의 이름을 민주당으로 돌리고 당의 상징색을 파란색으로 바꾸는 한편 여의도로 당사를 옮긴 것도 김한길이 민주당 대표를 하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민주당의 상징색이 파란색이 된 것은 민주당의 60년 역사에서 처음 있던 일로 민주당은 이때 이후로 계속 파란색을 당의 상징색으로 쓰고 있다.

김한길은 2013년 9월1일 서울 여의도 민주당 당사에서 입주식을 열고 “민주당의 새 상징은 국민과 함께 변화와 희망의 시대로 가겠다는 약속과 서민·중산층 벗이 되겠다는 다짐, 대한민국이 미래로 나가는데 나침반이 되겠다는 비전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열린우리당 지각변동 와중에 탈당·창당 반복
김한길은 열린우리당 등 민주당계열 정당의 지각변동 과정에서 탈당과 창당을 반복했다. 2번의 탈당과 1번의 합당을 나섬으로써 6개월 만에 4개의 당적을 보유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먼저 김한길은 범여권 통합을 명분으로 2007년 2월 열린우리당 의원 23명의 집단탈당을 주도했다.

김한길은 2007년 2월7일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지낸 사람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면서도 “우리당 틀 안에서 아무것도 생성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패배를 기다린다면 책임지는 자세가 아니다”라며 탈당의 불가피함을 강조했다.

김한길은 이렇게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고 3개월 뒤 2007년 5월7일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했다. 중도개혁통합신당은 2007년 5월30일부터는 본격적으로 박상천 대표의 민주당과 통합협상에 나섰다.

이에 같은 해 6월27일에 민주당과 합당해 중도통합민주당을 창당했다. 중도개혁통합신당은 창당한 지 52일 만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한길은 중도통합민주당의 공동대표로 취임했으나 당의 방향을 두고 박상천 중도통합민주당 공동대표 대립하면서 8월5일엔 중도통합민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의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했다.

나중에 김한길은 제17대 대선에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가 패배하자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치가 실패한 데 대한 책임을 지겠다”며 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Who Is ?] 김한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
▲ 김한길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2006년 11월7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원내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열린우리당의 원내대표 선출
김한길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캠프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노무현 대통령의 정권 재창출을 도왔으며 열린우리당 창당에도 합류했다.

김한길은 노무현 대통령이 강력히 추진했던 신행정수도 방안이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표류 위기에 처했을 때 열린우리당 내부 의견을 조율하고 한나라당을 설득해 행정중심복합도시 협상을 타결시키며 노무현 대통령의 어깨를 가볍게 만들기도 했다.

김한길은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2006년 1월6일 열린우리당의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다만 당내 중도 보수 입장을 대변하던 김한길과 친노 세력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김한길은 2006년 11월7일 국회에서 진행한 원내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열린우리당의 창당은 우리 정치사에 크게 기록될 만한 의미 있는 정치실험이었다”면서 “이제는 정치실험을 마감하고 지켜가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서 또 한 번 ‘다시 시작하는 아침’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친노세력과 선을 그었다.

이에 더해 노무현 대통령이 정계 개편과 관련해 의견을 밝힌 것을 두고 김한길이 2006년 12월5일 열린 고위정책조정회의에서 “정치와 당의 진로는 당에 맡기시고 대통령은 국정에 전념해주시면 우리당은 대통령과 정부를 적극 뒷받침해 드리겠다”고 반발하면서 둘의 관계는 멀어졌다.

김한길은 결국 2007년 2월6일 자신을 따르는 김한길계 의원 23명과 함께 열린우리당을 떠났다.

△DJ의 홍보전문가를 넘어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김한길은 김대중 대통령의 홍보전문가로서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의 방송대책팀을 이끌어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큰 공을 세웠다.

1997년 대통령 선거는 사상 최초로 대선후보 TV합동토론회가 열렸다. 김한길은 이 시절 대통령의 2분짜리 TV멘트 문구를 고치기 위해 호텔방에서 밤을 새우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보전문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은 김한길은 대통령 당선인 공보팀장,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대변인,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등 홍보 분야에서 주요 요직을 잇따라 맡았다.

김 대통령은 1998년 6·4 지방선거에선 김한길에게 수도권 미디어대책본부장을 맡겼고 2000년 총선에서는 총선기획단장을 맡겼다. 이로 인해 일각에서는 김한길을 ‘DJ의 딕 모리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딕 모리스는 20여 년간 많은 정치인들의 선거캠페인을 지원해 승리로 이끈 미국의 정치전략가이다.

전통적인 동교동계도 아니고 영입인사였던 김한길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높은 신뢰를 받아 2000년 김대중 정부의 문화관광부 장관을 맡기도 했다. 1년 동안 남북 협력,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 등을 다루며 내각 경험을 쌓은 김한길은 2001년 서울 구로을 재·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사표를 던졌지만 낙선했다.

비전과 과제/평가

◆ 비전과 과제
[Who Is ?] 김한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
▲ 김한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이 2023년 10월2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자살 예방 정책 제언 브리핑을 마친 뒤 '총선 역할론'과 관련한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한길은 윤석열 정부의 국민통합위원장으로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국민통합위원회는 2023년 2월22일 라마다프라다 제주에서 열린 전체회의에서 국민통합 4대 정책과 12대 핵심과제를 담은 ‘국민통합 5개년 국가전략’을 발표했다.

4대 정책으로는 △대전환의 시대, 갈등의 예방과 대응 △성숙한 자유민주주의로 국민통합 △경제 양극화 완화와 지속가능한 산업 생태계 뒷받침 △소통과 연대를 통한사회문화 기반 구축 등이 제시됐다.

정치권에서는 김한길이 2024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국민의힘에서 비상대책위원회 또는 선거대책위원회에서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일각에서는 윤석열 대통열을 중심으로 한 중도 보수 성격의 신당을 창당하는데 주축이 될 것이란 이야기까지 나왔다.

김한길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신뢰가 두터워 2024년 총선에서 어떤 형태든 모종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측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 평가
[Who Is ?] 김한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
▲ 김한길 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등 열린우리당 23명 의원들이 2007년 2월6일 집단 탈당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국회 브리핑룸에 들어오고 있다. <연합뉴스>
김한길은 대표적 ‘기획 전문가’라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조은희 전 청와대 행정기획비서관은 “그는 정치적 감각과 상상력이 대단히 뛰어나다”라고 평가했다.

김한길은 김대중 대통령의 대선 선대위에서 선거기획을 총괄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TV토론이 있을 때마다 늘 김한길을 곁에 둔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에서 맡은 직책도 정책기획수석이었다. 김한길은 1999년 3월4일 임명장을 받은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홍보기술자로 비쳐지는 것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국민과 대화 등을 준비할 때 분장, 제스처 등의 문제에 들이는 시간은 5분도 채 안 되고 어떤 내용을 어떻게 말할까 취사선택하는 게 주된 내용”이라고 말했다.

탈당과 합당을 수차례 반복하며 제3지대 정당과, 민주당계 정당 범위 내부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당에 몸담은 적이 있다는 점 때문에 '정치 철새'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대해 김한길은 2022년 4월7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내가 요즘 다시 등장하니까 탈당, 창당을 많이 했다고 공격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며 “정치하는 내내 양당 중심 정치를 어떻게 해서든 깨보려고 계속했는데 매번 실패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가 탈당·창당을 시도하고 했던 것은 나름대로 의지와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기 때문에 좌절했어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며 “최근에 본 멋진 말 중에 하나는 ‘우리가 이만큼이나마 누리고 있는 세상은 수많은 이상주의자들의 좌절을 통해서 이뤄졌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건사고
[Who Is ?] 김한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
▲ 김한길 새시대준비위원회 위원장(왼쪽)이 2021년 12월20일 서울 여의도 위원장실에서 새시대준비위 수석부위원장으로 영입된 신지예 한국여성정치 네트워크 대표(가운데)를 소개하고 있다. 오른쪽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연합뉴스>
△새시대준비위원회에 신지예 영입해 ‘이준석 패싱’ 논란 키워
김한길이 신지예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직속의 새시대준비위원회 수석부위원장으로 영입한 것으로 알려지며 ‘이준석 패싱’ 논란이 커졌다.

신지예 대표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젠더 갈등을 놓고 대립해 왔기 때문이다. 신 대표는 2018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도 역임했다.

김한길은 2021년 12월20일 서울 여의도 새시대준비위원회 위원장실에서 신지예 수석부위원장을 소개하며 “신 수석부위원장이 역할을 할 공간이 넓고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대표와 신 수석부위원장의 갈등 가능성에 관련해 질문을 받자 “며칠 전 이 대표에게 신 수석부위원장 영입 가능성을 얘기했을 때 서로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며 “정권교체에 도움이 되면 됐지 마이너스 요인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같은 날 MBC 뉴스외전에 출연해 신 수석부위원장 영입으로 이 대표와 충돌을 빚지 않겠냐는 질문을 받자 “신 수석부위원장이 지금까지 본인이 하던 말을 지속하기 위해 들어온 것이라면 그것은 강한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준석 패싱’ 논란이 나오는 것을 두고는 “김한길 위원장이 의견을 물었고 ‘다소간의 우려가 있지만 김 위원장이 목적이 있어서 영입한다면 최소한 당의 방침과 어긋나지 않게 활동하게 해달라’고 말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신지예 수석부위원장 영입은 국민의힘 지지층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신 수석부위원장의 사퇴와 김한길의 사퇴로까지 이어졌다.

김한길은 2022년 1월3일 신지예 수석부위원장 사퇴와 관련해 “우리 사회의 심각한 젠더 논쟁이 불러온 유감스러운 결과”라며 “그에게 덧씌워진 오해를 넘어서지 못한 현실에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한 뒤 윤 후보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정치 ‘달새’ 행보
김한길은 2007년 거의 매달 당적을 바꾸는 행보를 보이며 정치 철새를 넘은 정치 ‘달새’라는 비판을 받았다.

김한길은 2007년 2월 23명의 의원을 이끌고 열린우리당을 떠났다. 같은 해 5월엔 중도개혁통합신당을 만들었으며 6월 말엔 박상천 민주당 대표와 손을 잡고 중도통합민주당을 창당했다. 8월5일엔 중도통합민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의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했다.

이를 통해 6개월 만에 탈당 2번과 합당 1번을 통해 4개의 당적을 보유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해찬 대통합민주신당 당 대표 경선후보는 2007년 9월21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TV토론회에서 김한길이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당 대표 경선 후보지지 선언을 한 것을 겨냥해 “철새가 아니라 어디 인터넷을 보니깐 달새라고 불리는 분들이 정 후보를 지지선언 했던데 정 후보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김한길은 2014년에도 안철수 무소속 의원과 손을 잡고 새정치민주연합을 창당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2015년 취임한 뒤 당명을 더불어민주당으로 바꾸는 등 김한길, 안철수의 색채를 빼려는 행보를 보이자 2016년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했다. 그 뒤 신당 창당을 준비하고 있던 안철수 의원과의 연대를 선언하고 국민의당에 들어가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김한길은 2022년 4월7일 연합뉴스 인터뷰를 통해 “내가 요즘 다시 등장하니까 탈당, 창당을 많이 했다고 공격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며 “내가 탈당·창당을 시도하고 했던 것은 나름대로 의지와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기 때문에 좌절했어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 맺은 인연과 친노 세력과 벌인 갈등
김한길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캠프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정권 재창출의 꿈을 위해 노 대통령과 길을 함께 했다. 김한길이 열린우리당 창당에 합류할 정도로 김한길과 노 대통령의 관계는 매우 두터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열린우리당 내부에서 중도 보수 성향 인사들을 주로 대변했던 김한길과 386세대를 중심으로 정권을 운용하던 노무현 대통령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2006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로 뽑힌 뒤에는 열린우리당을 ‘실패한 정치실험’으로 간주하고 여권 통합을 중심으로 한 정계 개편을 주장하며 친노 세력과의 관계는 수습 불가능한 수준으로 악화됐다.

2007년 열린우리당에서 탈당을 한 뒤로는 노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던 옛 민주당 계열과 손을 잡고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하기도 했다.

김한길은 2007년 5월23일 김광웅 서울대학교 교수가 마련한 ‘현대사회와 리더십’ 특강에서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게 되는 과정에서 노 후보와 의견이 갈렸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김한길은 노 후보를 만나 대선후보가 해야 할 일과 관련해 이야기 했지만 노 후보는 “저는 마음에 없는 짓은 못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노 후보와 제가 만나서 ‘나는 마음에 없는 짓은 못 한다’고 했던 그런 입장차가 계속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측면이 있다”며 “지나치게 내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못할 일이 많다는 생각을 정치를 하면서도 많이 한다”고 덧붙였다.

김한길과 친노 세력의 악연은 이후로도 지속됐다. 사실상 비노 세력의 수장을 맡아 2013년 민주당의 새 당대표로 선출되기도 했다.

김한길은 2015년 5월2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민주당의 후신) 대표를 겨냥해 “친노의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패권정치를 청산하라”며 “편 가르기와 갈라치기로 우리당의 상당수를 타협 불가 대상으로 규정하는 ‘분열의 프레임’을 보였다”고 비판했다.

다만 김한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2015년 5월22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평생 동안 특권과 기득권에 맞서 싸우셨다”며 “패권정치에 맞서 낡은 정치 청산과 새로운 정치를 외쳤고 패권적 지역주의에 맞서 국민통합을 이루고자 했다”고 말했다.

△조동만 전 한솔 부회장에게서 정치자금 1억 원 수수
김한길은 조동만 전 한솔 부회장에게서 정치자금 1억 원을 받았다는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다만 해당 의혹은 김한길이 받은 정치자금을 선거용 여론조사 비용으로 쓴 것이 확인됨에 따라 합법적인 정치자금으로 판단돼 처벌을 피했다.

서울지검 특수1부는 2004년 9월15일 조 전 부회장이 김한길에게 1억 원의 불법자금을 전달했다는 진술을 확보해 자금의 명목과 전달 경위 등을 따져 보겠다고 밝혔다.

김한길은 같은 날 보도 자료를 통해 “16대 총선을 앞둔 2000년 3월 민주당총선기획단장으로 일하면서 평소 알고 지내던 조동만씨로부터 1억 원을 받아 총선 여론조사 비용으로 쓴 일이 있다”고 발표했다.

다만 그는 정치자금의 대가성 의혹과 관련해선 부인했다.

김한길은 “조씨와 이권이나 청탁 또는 그 비슷한 이야기도 나눈 적이 없다”며 “당시 총선기획단장으로서 피치 못할 상황으로 받아들였으나 돌이켜보면 이미 단절했어야 할 잘못된 관행이었다”고 해명했다

△굿모닝시티 정치 후원금 받은 것으로 알려져 논란 일어
김한길은 굿모닝시티 분양사기 사건을 일으킨 윤창열 굿모닝시티 대표로부터 정치 후원금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굿모닝시티 분양사기 사건을 수사하고 있던 서울지검 특수2부(부장 채동욱)는 2003년 7월1일 윤창열 굿모닝시티 대표가 김한길에게 후원금을 낸 사실을 확인해 로비 관련성을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윤 대표는 2001년 10월 서로 구로구을 보궐선거를 앞둔 김한길의 지구당 후원회에 500만 원의 후원금을 냈다.

김한길은 2003년 7월15일 윤 대표에게 받은 후원금을 분양사기로 피해를 입은 굿모닝시티계약자협의회에 전달했다.

그는 “지난 2001년 10월 재선거를 앞두고 연 후원회 행사에서 윤 대표 명의로 된 후원금 500만원을 받아 영수증처리하고 선관위에 신고했다”며 “적법한 후원금이긴 하지만 굿모닝시티 분양 피해자들의 억울한 사정을 감안, 후원금과 같은 금액을 15일 굿모닝시티계약자협의회에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별장 탈법건축’ 오보로 곤욕 치러
김한길은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기획수석비서관으로 일하던 1999년 위장전입 등 탈법 수단을 써서 그린벨트 안에 주택과 농지를 매입·보유해 왔다는 언론 보도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다만 이는 오보로 판명됐다.

중앙일보는 1999년 10월13일 ‘한강변 별장 탈법건축’이란 제목으로 “김한길 수석이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대지 255평, 건평 60평의 주택과 208평의 농지를 보유하고 있는데 위장전입을 하다 적발된 적도 있고 중과세 대상에서도 누락됐다”고 보도했다.

김한길은 1999년 11월17일 서울지방법원에 자신이 위장전입을 통해 그린벨트 내부에 위치한 주택 농지를 매입해 보유중이라는 중앙일보의 기사 때문에 명예가 훼손됐다며 5억 원의 손해배상 및 정정보도 요구 소송을 제기했다.

김한길은 소장에서 “위장전입을 한 것이 아니라 집과 땅을 산 뒤 전입신고를 하고 1년 이상 실제로 살았다”며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보도를 하는 바람에 중책을 맡고 있는 공직자로서 도덕성에 흠집으로 남게 됐다”고 강조했다.

중앙일보는 1999년 12월8일 ‘위장전입 탈법건축 없었다, 김한길 수석 관련 기사 사실과 달라’는 제목의 보도를 통해 위장전입이나 탈법건축을 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정정 보도를 했다.

김한길은 정정보도 소식을 듣자 “중앙일보의 정정보도와 사과표명으로 명예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신문이 잘못된 기사를 바로잡고 사과하는 것은 용기 있는 일”이라며 고소를 취하했다.

경력/학력/가족
◆ 경력
[Who Is ?] 김한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
▲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2013년 9월22일 서울광장 천막당사에서 노숙 투쟁을 하며 앞으로의 정국과 관련해 고심하고 있다. <연합뉴스>
1981년 ‘바람과 박제’로 문단에 데뷔했다.

1982년부터 1985년까지 한국일보 미주지사 기자로 일했다.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중앙일보 샌프란시스코지사 지사장으로 활동했다.

1988년 방송위원회 기획국장을 지냈다.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제15대 새정치국민회의의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

1996년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의 특별 보좌역을 맡았다.

1997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공보팀장을 맡았다.

1999년 국회의원을 그만두고 김대중 정부의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을 지냈다.

2000년 제16대 새천년민주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뽑혔다.

2000년부터 2001년까지 제7대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일했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기획특보를 맡았다.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국회 건설교통위원장을 맡았다.

2006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로 활동했다.

2007년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뒤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해 대표최고위원을 지냈다.

2007년 민주당과 합당해 중도통합민주당 대표가 됐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으로 합류해 정동영 대선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을 지냈다.

2012년 민주통합당 소속으로 출마해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됐다.

2012년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에 오른 뒤 2013년 민주당 대표가 됐다.

2014년 안철수 의원과 새정치민주연합을 창당해 공동대표에 올랐으나 재·보궐선거 패배 책임을 지고 4개월 만에 물러났다. 대표에서 물러난 후 상임고문을 맡았다.

2016년 1월 더불어민주당(구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고 2월 국민의당에 들어가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가 3월11일 물러났다.

2021년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캠프 선거대책위원회의 새시대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22년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2022년 7월부터 윤석열 대통령 직속 기구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 학력

1971년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0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 가족관계

아버지는 김철 전 사회민주당 당수이고 어머니는 윤초옥씨다.

김철 당수는 통일사회당과 사회당, 사회민주당 대표를 거치며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씨의 딸 이민아씨와 1981년에 결혼했으나 이혼하고 1995년 배우 최명길씨와 재혼했다. 슬하에 장남 김무진씨와 차남 김어진씨를 두고 있다.

◆ 상훈

1980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탔다.

19904년 베스트드레서 백조상을 수상했다.

2000년 자랑스런 건국인상 수상자로 뽑혔다.

2003년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11년 자랑스러운 이대부고 동문인상의 제1회 수상자가 됐다.

2013년 백봉신사상을 수상했다.

◆ 기타

1993년 불교방송(BBS) ‘아침저널’, MBC ‘김한길과 사람들’, MBC라디오 ‘MBC초대석 김한길입니다’ 등을 진행했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인생의 책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저서로 ‘병정일기(1978)’, ‘대학일기(1980)’, ‘바람과 박제(1981)’, ‘세네카의 죽음(1981)’, ‘미국일기(1984)’, ‘담박질(1986)’,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1989)’, ‘여자의 남자(1991)’, ‘음치가 부르는 연가(1993)’, ‘눈뜨면 없어라(1993, 미국일기 개정판)’, ‘아침은 얻어먹고 사십니까(1996)’, ‘김한길의 희망일기(2000)’ 등이 있다.

‘여자의 남자’는 1993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혈액형은 O형이다. 종교는 기독교다.

선거에 떨어졌을 때 부인 최명길씨는 남편에게 “이럴 때일수록 멋지게 하고 다녀야 한다”며 드라마 계약금 전액이 든 봉투를 건넸다고 한다.

어록
[Who Is ?] 김한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
▲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2013년 12월29일 국회 당대표회의실에서 열린 국정원 개혁 방안 관련 긴급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당 창당은 생각해 본 일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다.” (2023/10/23,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자신은 정치를 떠나 있는 사람이고 국민통합위원회 일에 전념하고 있다며)

“어디 안 간다. 동요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 (2023/10/17, 국민통합위원회 간부회의에서 자신의 총선역할론에 선을 그으며)

“위원들과 당정이 더 많이 협력하고 깊게 어우러져 일한다면 대한민국과 대통령의 성공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2023/10/17,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민통합위원회 만찬에서 국민통합을 위해 당정이 더욱 깊이 협력해야 한다며)

“사회적 고립·은둔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다.” (2023/09/06,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사회적 고립에서 일상으로’ 정책 제안 패키지 브리핑에서 사회적 고립·은둔자의 일상 복귀를 위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강조하며)

“배경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거나 소외되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가 보장될 때 통합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2023/05/17, 대통령실에서 열린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 산하 ‘이주민과의 동행 특별위원회’ 15차 회의에서 이주민 사회 통합 문제의 실용적인 해법 마련을 고민하겠다며)

“시설이나 위탁가정을 떠나 홀로 자립해야 하는 청년들에게 우리 사회는 의지할 수 있는 사회적 가정의 역할이 돼야 하고 또 긴 호흡으로 이들의 자립을 지지할 수 있어야 한다.” (2023/04/20,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에서 열린 ‘자립준비청년과 함께 서기 특별위원회’ 출범식에서 자립준비청년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정책과 제도 개선과 관련한 고민이 계속돼야 한다며)

“일터에서 건강을 지키는 것이 일과 삶의 조화를 이루는 나라의 밑바탕이자 기본 조건이다.” (2023/03/22, 정부서울청사에서 ‘건강한 일터 만들기 특별위원회’ 출범식을 열고 근로자의 건강은 더이상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가가 적극적으로 증진시켜야 하는 중요한 문제라며)

“청년이 희망을 버리지 않도록, 사회적 약자가 소외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위원회는 국민이 서로에게 건너가는 다리가 되겠다.” (2023/01/11, 서울 정동 1928아트센터에서 첫 국민통합위원회 콘퍼런스를 열고 국민통합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경계 없이 어울려 사는 사회를 실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우리 앞에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이 놓여있다.” (2022/11/14, 서울 송파구 장애인고용 모범사업장인 ‘오픈핸즈’를 방문해 장애인 등 교통약자를 비롯한 우리 모두를 위해 이동 편의 증진 개선 정책을 세밀하게 마련해야 한다며)

“팬덤은 국민의 능동적 정치 참여 기회를 확대하는 긍정적 기능도 있으나 극단적 팬덤으로 인한 국민 분열과 정치 양극화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2022/10/26,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팬덤과 민주주의 특별위원회’ 출범식에서 실사구시 정신으로 팬덤의 본질을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연구해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초석을 놓겠다며)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 양극화 해결을 넘어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을 달성하기 위해 대·중소기업 간 상생 협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국가 경쟁력을 높이려면 대기업들도 중소기업과의 긴밀한 상생 협력이 꼭 필요하다.” (2022/09/13,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대·중소기업 상생 특별위원회’ 출범식에서)

“정계 개편은 누가 인위적으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무르익어야 한다.” (2022/04/07, 서울 종로구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에서 열린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갈등과 분열의 늪을 벗어나 대한민국 국민통합으로 가는 길을 내기 위해 열심히 지혜를 모으겠다.” (2022/03/14, 언론에 배포한 입장문을 통해 국민통합은 시대정신이고 국민의 명령이라며)

“우리 사회의 심각한 젠더 논쟁이 불러온 유감스러운 결과다.” (2022/01/03, 입장문을 통해 신지예 새시대준비위원회 수석부위원장 사퇴를 안타까워하며)

“젊은 여성층은 아직 특정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 못 한 분들이 제일 많은 지점이다.” (2021/12/20,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신지예 새시대준비위원회 수석부위원장이 정권 교체를 위해 역할을 할 공간이 넓고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라며)

“국민의힘도 이제는 중원을 향해 두려움 없이 몽골기병처럼 진격했으면 좋겠다.” (2021/11/21, 서울 용산구 사무실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와 회동한 뒤 기자들과 만나 정권교체야말로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이라며)

“광장의 함성 한가운데 서서 함성을 함께 내지르기보다는 함성을 경청하는 것이 옳았고 함성 속에서 우선 나부터 깊이 반성하고 자책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2016/12/15,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집회와 관련해)

“작금의 정치상황에서 집권세력의 압승이 불러올 끔찍할 상황을 막아내고 동시에 우리 당이 수도권에서도 의석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당 차원의 야권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왔으나 이를 성사시키지 못한 데에 스스로 책임을 묻겠다.” (2016/03/17, 입장 발표를 통해 야권연대를 성사시키지 못한 것에 책임을 지고 20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다며)

“흔히들 김한길은 중도라고들 한다. 김한길은 강성이 아니라고들 한다. 김한길을 무어라고 부르든지 분명한 것은 이번 총선에서 김한길은 결과적으로 수구보수의 집권세력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주는 일만은 절대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2016/03/14,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여당이 개헌선을 확보하는 것을 막기 위한 야권 연대를 요구하며)

“통합적 국민저항체제가 꼭 필요한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2016/03/07 선거대책위원회 회의에서 집권세력의 개헌선 확보를 막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총선에 임해야한다며)

“인재 영입에 신당의 명운이 걸렸다. 인재 영입이 아니라 인재 징집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2016/01/07, 국회 의원회관 식당에서 안철수 의원과 오찬회동을 마친 뒤 국민의 당 합류를 공식 선언하며)

“오늘 당을 떠난다. 새해를 여는 즈음에 새 희망을 향해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이제 백지 위에 새로운 정치지도를 그려내야 한다.” (2016/01/03,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를 통해)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 (2015/09/10,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일제시대 소설가 이상의 글귀를 인용해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전날 재신임 기자회견을 비판하며)

“창조적 파괴와 새로운 도전 나설 때다.” (2015/08/14,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대립의 양당정치 체제를 극복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며)

“새해를 여는 즈음에 새 희망을 향해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보수의 탈을 쓴 수구세력에게 기필코 승리해야 하고 애오라지 계파이익에 집착하는 패권정치의 틀 속에 주저앉아 뻔한 패배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2016/01/03 더불어민주당 탈당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위기인 줄 모르는 게 심각한 위기다. 문 대표는 오로지 친노의 좌장으로 버티면서 끝까지 가볼 것인지, 아니면 그야말로 야권을 대표하는 주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결단을 할 것인지 정해야 한다." (2015/05/11,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지금은 문재인 대표의 결단을 촉구하며)

“아버지는 한반도의 모든 사람이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지만 군사독재시대는 그 꿈을 이루기에 암울하기만 했다. 아버지의 꿈인 평화통일, 경제민주화, 복지국가가 현실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2014/11/20,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아버지 ‘당산 김철선생기념사업회’ 20주기 심포지엄에 참석해)

“이겨야 하는 선거에서 져 죄송하다. 국회에서 비공개 최고위원회의를 열어 모든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나겠다.” (2014/07/31, 7.30 재보궐 선거 참패 책임지고 안철수 새정치연합 공동대표와 함께 사의를 표명하며)

“세월호 참사 100일이 지났어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야말로 참사 이전의 대한민국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가는 첫걸음.” (2014/07/24,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에서 세월호 특별법의 조속한 입법을 촉구하며)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식을 둔 어른으로서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지 못한 데 대해서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 (2014/04/17, 국회에서 열린 여객선침몰사고 대책회의에서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한 것에 안타까워하며)

“새로운 정치를 위한 선의의 경쟁이 구태 정치를 살려내는 결과가 돼서는 안 된다.” (2014/01/31, 여수 향일암에서 열린 해맞이 행사에 참석해 안철수 무소속 의원 측과의 경쟁 때문에 새누리당이 이득을 봐선 안 된다며)

“치유하고 갈등을 통합해도 모자랄 판에 국민을 향해 싸우겠다고 한다. 내년 지방선거는 박근혜 대통령 불통의 중간심판이 될 것이다. 선거에 왕도는 없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게 아니라 민심을 얻는 자가 승리한다.” (2013/12/24 ‘2014년 지방선거 전망과 과제토론회’에 참석해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며)

“요즘 민심은 요약하면 ‘응답하라 대통령’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민주주의 위기에 응답하고 서민과 중산층 민생의 위기에 응답하고 동북아 등 외교위기에 응답하라는 것이다.” (2013/12/02, 의원총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근본적 인식의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라며)

“미지근한 물로는 밥을 지을 수 없다.” (2013/11/18,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첫 시정연설을 놓고)

“경쟁적 동지 관계라고 정리할 수 있다.” (2013/09/30, 광주시의회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민주당과 안철수 의원 세력의 관계를 놓고)

“보름달은 차오르는데 민주주의의 밤은 길어지고 민생의 그림자는 점점 짙어진다.” (2013/09/17,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에 와서 야당 대표와 만나준 일을 두고)

“많은 얘기가 오갔지만 정답은 하나도 없었다.” (2013/09/16, 국회 사랑재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과 여야 대표 3자회담을 마친 뒤)

“국가가 밀실에서 운영되던 시절, 20대 청년으로 아버지 재판을 지켜봤다. 이제 정의의 법정에서 아버지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게 됐지만 대한민국 정치 현실은 여전히 어둡다.” (2013/09/13,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긴급조치 9호와 반공법을 위반한 혐의로 옥고를 치른 아버지 고 김철 전 통일사회당 당수가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자)

“메르켈 총리가 나치 만행에 거듭 사죄하는 이유는 그가 독일의 국가수반이기 때문이다. ‘나는 직접 책임질 일이 없으니 사과할 것 없다’고 메르켈 총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박 대통령도 참고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2013/09/09,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직접 사과를 재차 요구하며)

“새누리당은 그 뿌리가 독재정권, 군사 쿠데타에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역사를 부정하고 틈만 나면 매카시즘, 종북몰이에 여념이 없다.” (2013/09/08, 서울 수유동 국립 4·19 국립 민주묘지에서 새누리당이 다시 집권하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다시 위협받게 됐다며)

“민주당은 원내외 병행투쟁에서 국회와 광장의 균형이 깨지지 않게 노력할 것이다.” (2013/08/26, 서울광장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결산국회나 정기국회를 전면 보이콧하지는 않을 것임을 시사하며)

“민주당 대표인 저부터 민주주의 회복에 정치적 명운을 걸겠다. 민주주의를 지키지 못하는 민주당의 대표는 존재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2013/08/18, 서울 동작구 국립 서울현충원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에서 열린 고 김대중 대통령 서거 4주기 추도식에서)

“어떤 망언과 왜곡도 독도가 대한민국 땅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2013/08/13, 독도를 방문해 일본 정부가 방위백서에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명시한 것을 두고 새로운 한일관계의 미래가 열리도록 일본 정부의 대오각성을 촉구한다며)

“민심에 승복할 때 정통성도 리더십도 확립될 것이다.” (2013/07/17,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 등과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은 민주주의 헌정질서 유린하는 상황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며)

“도탄에 빠져 신음하는 국민이 아파하고 절규하고 있는데 국정원은 여전히 정치공작에만 몰두하고 있고 대통령은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다.” (2013/07/10, 국회 본관 계단에서 열린 현장 최고위원회의 발대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에 개혁안을 마련하라고 주문한 것을 겨냥해 박근혜 정부의 책임회피라고 비난하며)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를 지키는 게 중요한데 박근혜 정부에는 ‘신뢰프로세스’란 이름만 있고, 신뢰는 없다. 내가 그런(남북간 신뢰의 다리를 놓는 특사)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북한에 특사로) 가라고 하면 가겠다.” (2013/05/16,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개성공단 가동중단 등 위기에 처한 남북관계의 돌파구 마련을 위해 특사 역할을 수행할 용의가 있다며)

“당의 주인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계파 패권주의가 들어앉아 있다.” (2013/03/14, 기자간담회를 열고 친노무현 진영을 겨냥해)

“계파 패권, 기득권을 내려놓는 것이 쇄신의 출발점이다.” (2012/09/14,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려면 당이 진짜로 변해야 한다며)

“보기 좋은 그림이었지만 영전 앞에 꽃을 바치는 것만으로는 사회통합이 실현될 것 같지 않다.” (2012/08/22, 최고위원회의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것을 겨냥해)

“권력자의 아들, 딸이 다시 권력자가 되는 나라는 정치민주화가 더 필요한 나라다.” (2012/08/20, 서울 영등포 민주통합당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경선 후보를 비판하며)

“예법에 의하면 3주기는 상복을 벗고 상주에서 벗어나는 탈상의 날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탈상하는 날은 대선 승리로 정권을 되찾아 오는 날일 것이다.” (2012/08/17, 국회의원·지역위원장 연석회의에서 12월 대선 승리를 위해 모든 걸 내려놓을 각오로 죽기로 싸워야 한다며)

“옛날 왕실에서는 왕세자가 잘못을 저지르면 대신 매 맞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2012/08/06, 최고위원회의에서 공천헌금 수수 사실이 드러나면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아니라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책임지기로 한 것을 꼼수정치라고 비판하며)

“후보 사이 음해와 흑색선전, 인신공격은 아무에게도 도움 되지 않을 것이다. 경선 초반의 (이해찬) 대세론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대의원들은 공정하면서도 대선 승리를 가져올 능력을 지닌 당대표를 원하고 있다.” (2012/06/03, 민주통합당 대표선거를 일주일 남기고 기자간담회에서)

“만약 서울시장 선거가 있다면 반드시 이겨야 하는 선거기 때문에 (야권에서) 가장 경쟁력있는 선수가 출마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한 원칙이다. 나도 그 저울 위에 올라가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2011/08/25,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기자들과 오찬간담회를 열고 서울시장 출마를 고민하고 있다고 전하며)

“대선참패 이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지적이 매우 아프다. 나를 버려서 우리가 살아나는데 도움이 된다면 우선 나부터 기득권을 버려야 하겠기에 총선 불출마를 결심했다. 거창하게 말하기 민망하지만 다시는 정치에 돌아올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 (2008/01/06, 국회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당을 무력화시키고, 민심을 등지고, 민생을 아랑곳하지 않는 노무현 프레임에서 벗어나 반성하고 참회해서 당을 쇄신해야 한다.” (2007/12/27,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노무현 대통령이 말실수 몇 번 한 것 말고는 우리가 잘못한 게 뭐냐며 정면 돌파를 주장했던 사람들은 이제 앞줄에서 물러나 자숙해야 한다며)

“실패에 대한 반성 없이 다함께 무조건 합치자는 것은 대집합에 불과하다,” (2007/06/19, 국회에서 열린 통합추진회의에서 열린우리당의 기득권을 고수하면서 대통합을 논하자는 것은 억지라며)

“백의종군하는 자세로 중도개혁세력 대통합의 밀알이 되겠다.” (2007/02/07, 열린우리당 탈당 기자회견에서)

“열린우리당을 중심으로 한 변화로 과연 국민의 지지와 신뢰 회복이 가능한지 따져봐야 한다.” (2007/01/30, 국회에서 열린 고위정책조정회의에서 열린우리당이 처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면서)

“정치는 당에, 대통령은 국정에 전념하면 당은 대통령을 적극 뒷받침할 것이다.” (2006/12/05, 국회에서 열린 고위정책회의에서 당청관계를 놓고 이제는 국민이 짜증을 내는 것 같다며)

“한국전이 공식 종전되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북미 수교가 가능해지며 세계 유일의 분단지역인 한반도에 진정한 봄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의미 있는 선언이 될 것이다.” (2006/11/20,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할 경우 정전상태에 있는 한국전쟁의 종료를 공식선언하는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지자)

“열린우리당의 창당은 우리 정치사에 크게 기록될 만한 의미 있는 정치실험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치실험을 마감하고 지켜가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서 또 한 번 ‘다시 시작하는 아침’이 필요하다.” (2006/11/07, 국회 본회의에서 열린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열린우리당의 발전적 해체와 통합신당 추진을 공식화하며)

“북한의 깡패 같은 행동에 배신감을 느끼지만 거기에 똑같이 맞대응하는 것은 평화를 포기하는 것이다.” (2006/10/13, 국회에서 열린 열린우리당 확대간부회의에서 한나라당의 대북 강경론을 겨냥해)

“찬성하는 분을 생각이 없다고 하거나, 반대하는 분을 애국자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우리의 고민은 협상에서 어떻게 국익을 극대화하느냐는 것이다.” (2006/09/27,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열린우리당 토론회에서 당내의 찬반양론을 극복해야 한다며)

“운전하면서 백미러를 보는 것은 후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전진하기 위해서다.” (2006/06/30, 열린우리당 워크숍에서 창당 당시의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처음부터 고민하자며)

“국민들께 우리가 짝사랑을 해왔는데 실연당한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이 진정이기 때문에 자세를 가다듬고 다가가면 뜨겁게 받아주실 것이라는 생각에 변함없다.” (2006/06/29, 청와대에서 열린 열린우리당 지도부 초청만찬에서 5·31 지방선거 패배와 관련된 소회를 밝히며)

“보이고 싶지 않은 국회의 모습이고 안타까운 점이 없는 것 은 아니지만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해냈다. 민생과 국익을 위해서라면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오늘을 통해 재확인했다.” (2006/05/02, 한나라당 의원들과 몸싸움 끝에 본회의장에서 법안 처리를 무사히 마친 뒤)

“이 시대의 벽 하나를 허물었다.” (2006/04/19, 열린우리당 의원총회에서 한명숙 국무총리 임명을 놓고 예전 같으면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여성총리 시대를 열었다며)

“이대로 가면 우리 사회가 그야말로 양극화가 된다. 옛날처럼 귀족계급이 생기고, 아무리 노력해도 기회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 (2006/03/06, 교육 양극화 해소를 위한 실업계 고교 일일교사 체험 행사에 참석해)

“양극화 해소는 절대 필요한 시대적 요구사안이지만 서민들의 호주머니를 털어서까지 양극화 재원을 마련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2006/02/09, 원내대책회의에서 양극화 해소 재원은 재정지출 구조 혁신과 공평과세를 통해 마련하겠다며)

“앞으로 당정협의 없이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거나 불안케 하는 정부 당국자를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 (2006/02/06,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박병원 재정경제부 제1차관이 열린우리당이 반대하고 있는 소수공제자 추가공제 폐지에 추진 강행 방침을 밝힌 것을 겨냥해)

“협상의 마지막 순간은 원래 외로운 법이다. 막판에는 혼자 십자가를 걸머지고 갈 수밖에 없다.” (2005/11/27,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행정중심복합도시 추진 과정과 여야 협상과 관련해 소회를 밝히며)

“개인적 의견으로는 지금의 서울시 청사가 너무 비좁아 이전하는 것도 검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05/03/16, 기자간담회에서 수도권 발전에 대한 종합적인 청사진이 그려진다면 서울시청 이전도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며)

“신행정수도 건설에 따라 청와대가 이전하면 그 주변에 대한 건 물 고도제한과 토지이용 제한조치가 풀리는 게 상식이다.” (2004/08/05, 기자회견에서 행정수도를 이전하면 청와대 인근 35만-40만 평이 녹지가 될 가능성이 크고 용산기지 90만 평도 녹지로 조성돼 쾌적하게 된다며)

“유신하자는 것도 아니고 3선 개헌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2004/07/25, 기자회견을 열고 신행정수도 반대론을 비판하며)

“국가에 대한 애국심에서 만주로 갔다는 얘기 등을 사실 그대로 적시했다. 그 책을 보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자제하기 어렵다.” (2004/07/20, 당 중진 모임인 기획자문위원회의에서 ‘벌거숭이 박정희’라는 책을 소개하는 등 박정희 전 대통령의 행보를 비판하며)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국민 투표가 또 다른 논란의 불씨가 될 가능성이 많고 종국적 해결책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2004/07/14, 국회에서 열린 대정부질문에서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해 국민투표를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며)

“마지막까지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안타깝게 분당이 현실로 다가선 지금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상황이 됐다.” (2003/09/26, 탈당의 변을 통해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에 더욱 적극 기여하기 위해 신당 창당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며)

“정상적인 언론기능의 극대화를 위해 정부가 제도적ㆍ법적으로 장려할 것은 장려하고 좋은 언론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표다.” (2003/01/24,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노무현 정부의 언론정책 방향은 ‘언론개혁’이라기보다 ‘언론정상화’라는 표현이 옳을 것이라며)

“취임식을 900명가량 참석한 가운데 국회 중앙홀에서 열자는 안도 있었으나 `승자들만의 축제'로 가선 안 된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2003/01/23, 기자들과 만나 제16대 대통령 취임식을 여의도 국회 앞마당에서 개최하기로 최종 결정했다며)

“한 후보가 질문하면 정해진 순서대로 대답을 하는 등 경직되게 규칙을 정하다보니 토론이 밋밋해질 수밖에 없다. 질문과 대답 순서를 혼합해 토론의 흥미를 높일 필요가 있다.” (2002/12/04, 대선후보 TV합동토론회의 진행 절차와 방식이 후보들의 자질과 정책을 검증하기에는 미흡하다며)

“이회창 후보가 TV토론을 거부하는 것과 병역비리가 연관돼있다.” (2002/10/24, 확대간부회의에서 검찰이 병역비리 은폐대책회의에 대한 새로운 진술이 나왔는데도 무혐의로 수사를 종결할 것이라는 의혹을 성토하며)

“일본 정부가 교과서 문제에 대해 성의 있는 조치를 취할 때까지 일본 대중문화의 추가개방 자체를 검토하지 않겠다.” (2001/07/12,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대책반’ 전체회의를 마친 뒤 기자회견에서 교과서 문제와 대중문화 개방은 분리할 수 없다는 기존 방침을 재확인하며)

“보존과 개발 사이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문화재보존과 함께 국민의 재산권 보호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문화재 행정의 나아갈 방향이다.” (2001/05/31, 대전청사 문화재청을 순시한 뒤 열린 회의에서 문화재 행정은 균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며)

“하나의 모국어를 쓰는 나라가 영어 사용국의 식민지도 아니었으면서 자진해서 영어를 공용어로 택한 경우는 지구상에 한 나라도 없었다.” (2001/05/29, 제주도영어 제2공용어화 논란과 관련해 어문정책의 근간을 흔드는 정책이라며 반대 입장을 밝히며)

“고치고 싶다거나 지워버리고 싶은 곳이 있어도 그것을 냉정히 인식하기 위해 일기를 쓰는 것 아닐까. 그런 용기가 미래 발전에 커다란 힘이 될 것이며 역사를 정리해 공부하는 이유 또한 거기 있는 게 틀림없다.” (2001/05/19, 일본 아사히 신문에 기고한 ‘미래를 위해 과거의 직시를’이란 제목의 글에서)

“일본 대중문화개방은 역사교과서 문제와 분리해 생각하기 어렵다.” (2001/05/04, 도야마 아쓰코 일본 문부상과의 면담 내용을 설명하는 기자간담회에서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일본 대중문화 추가 개방을 중단할 수 있음을 시사하며)

“반드시 정부가 대주주의 입장에서 언론사 주식을 보유하거나, 정부가 언론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001/03/16, 국회 문화관광위원회에서 대한매일과 연합뉴스 소유구조 개편문제와 관련한 의원 질의에 답변하며)

“국민의 정부는 언론개혁에 대해 불개입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2001/02/15, 국회에서 열린 대정부질문에서 김대중 정부가 언론개혁을 전반적 사회개혁과제의 하나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직접적으로 관련법 개정에 개입하겠다는 뜻은 아니라며)

“맥주 한 잔과 더불어 프로야구를 즐길 수 있는 일상의 기쁨을 되찾게 돼 만족한다.” (2001/01/20, 문화관광부에서 열린 프로야구 구단 사장단과 선수협의회의 협상을 중재한 뒤 소감을 밝히며)

“제1당이 그 같은 문건을 만들었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이라면 언론자유를 침해한 매우 유감스럽고 중대한 사안이다.” (2000/12/13,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사회·문화 분야 부별심사에서 한나라당이 이회창 총재에 적대적인 언론인의 비리 수집 등 대선 전략을 마련해 추진하고 있다는 의혹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며)

“내가 양수리 집에 바친 정성과 양수리집이 내게 준 기쁨에 대해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아내가 다 이해해주기를 기대한 게 무리였는지 모른다. 이 때문에 한동안은 나는 양수리 집에 아내는 서울의 아파트에 머물며 별거 아닌 별거를 하기도 했다. 아내는 새벽까지 일하기 일쑤였고 아무리 그래도 집보다는 아내가 훨씬 더 소중했다.” (1999/11/08, 개인성명을 통해 자신이 소설을 쓰던 시절 살던 양수리 주택을 위장전입에 의한 그린벨트 탈법건축으로 보도한 중앙일보의 보도에 반박하며)

“국민과 대화 등을 준비할 때 분장, 제스처 등의 문제에 들이는 시간은 5분도 채 안되고 어떤 내용을 어떻게 말할까 취사선택하는 게 주된 내용이다.” (1999/03/04,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은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홍보전문가’라는 자신의 이미지가 TV분장, 제스처 등의 ‘홍보기술자’로 비쳐지는 것에 거부감을 나타내며)

“최근 선관위가 발표한 여야 대변인 ‘순화대상용어’에 내가 발표한 성명이나 논평은 단 한 줄도 인용되지 않았다. 나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억울하다.” (1996/03/25, 연합뉴스 보도에서 대변인을 맡은 뒤 논평이 강경해야 한다는 지적에 대해)

“원칙 없는 권력의 편에 서서 안주하는 정치인이 되기보다 분명한 변화를 위해 야당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야 한다고 생각했다.” (1996/01/23, 새정치국민회의 입당 기자회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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