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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인텔 제국을 살린 앤드류 그로브의 '전략적 변곡점'

이재우 sinemakid222@gmail.com 2023-08-31 08:5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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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인텔 제국을 살린 앤드류 그로브의 '전략적 변곡점'
▲ 앤드류 그로브는 ‘편집광만이 살아 남는다.(Only the Paranoid Survive)’는 어록을 남긴 인텔의 전설적인 경영자다. 그의 경영방식인 ‘전략적 변곡점(Strategic Inflection Points)’과 목표 관리기법인 ‘OKR(Objective, Key Results)’은 실리콘밸리를 넘어 전 세계 기업에 큰 기여를 했다. <인텔>
[비즈니스포스트] Only the Paranoid Survive.(편집광만이 살아 남는다)

인텔의 전설적 경영자 앤드류 그로브(Andrew Grove: 1936~2016)의 경영철학은 이 한 문장으로 부족함이 없다. 이 말은 그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표준국어대사전은 편집광(偏執狂)을 ‘어떤 사물에 집착하여 몰상식한 행동을 예사로 하는 정신장애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앤드류 그로브는 미친 사람일까?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가 생각컨대 이것 만은 분명하다. 부정적인 의미가 강한 편집광(편집증)이라는 단어가 그로브에 의해 어느 정도 인식 전환이 됐다는 점이다. 적어도 편집증은 그로브의 신념이나 다름 없었다.

애칭인 ‘앤디 그로브(Andy Grove)’로 더 잘 알려진 앤드류 그로브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클레이튼 크리스텐슨(Clayton Christensen) 교수의 ‘파괴적 혁신 이론(Theory Of Disruptive Innovation)’을 일찌감치 기업에 수용했던 혁신적인 경영자였다. 

스스로 편집광이라고 말하는 그로브는 그에 버금가는 ‘문하생’(?) 하나를 뒀다. 스티브 잡스다. 1985년 애플에서 쫓겨난 스티브 잡스가 다시 애플로 돌아오는 데는 12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1997년, 잡스는 애플 복귀 여부를 두고 그의 비즈니스 멘토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그 멘토가 바로 앤드류 그로브였다. 

당시 그로브가 잡스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잡스는 그로브 덕에 난파선 상황이던 애플에 다시 올라타 방향키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런 앤드류 그로브는 잡스뿐만 아니라 메타(페이스북)를 이끌고 있는 마크 저커버그, 오라클 창업자 래리 엘리슨, 인텔 전 CEO 팻 갤싱어 등 실리콘밸리 경영자들의 멘토이면서 친구였다.
 
우리는 이들 중 팻 갤싱어(Pat Gelsinger)의 입을 통해 직장 상사였던 앤드류 그로브의 성향을 엿볼 수 있다. 1979년부터 2009년까지 인텔에 몸 담았던 갤싱어는 31세 나이에 최연소 부사장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는 2019년 글로벌 직장 평가 사이트인 글래스도어(Glassdoor)가 선정하는 미국 최고의 CEO(Glassdoor Employees’ Choice Awards)에 선정된 바 있다. 

그런 갤싱어가 잡스처럼 12년 만에 인텔 CEO로 복귀한 건 2021년이었다. 당시 갤싱어는 신임 CEO 역할을 시작하기 전 자신의 30년 멘토였던 앤드류 그로브에 대해 “그로브보다 인텔을 위해 더 치열하게 싸운 사람은 없었다”며 “인텔을 그로브 시절로 되돌려 놓겠다”고 했다. 그는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문장을 트위터에 올렸다. 

“앤디 그로브에게 받는 멘토링은 마취를 하지 않고 치과 치료를 받는 것과 같았다.” (Mentoring with Andy Grove was like going to the dentist and not getting Novocaine.)

갤싱어는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을 이런 재치있는 말로 표현했다. 도대체 둘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85년의 일이다. 인텔의 젊은 개발 담당자였던 갤싱어는 어느 날 경영진 앞에서 컴퓨터 시스템 개선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 슬라이드조차 넘기지 못하고 제지를 당하고 말았다. 건너편에서 듣고 있던 그로브가 갤싱어의 아이디어를 산산조각 내버린 것이다. 갤싱어는 쏟아지는 질문에 ‘멘붕’ 상태였다. 

“형편없는 답변입니다. 일주일 안에 더 나은 답변을 갖고 제 사무실로 오세요.”

갤싱어는 35년 전 그로브에게 호되게 당했던 상황을 되돌아보며 주위 사람들에게 “만약 충분한 자료 없이 또는 확고한 생각 없이 회의에 참석한다면 당신은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충고했다. 

회의장에 들어갈 땐 적어도 상대를 설득할 자료나 데이터, 그리고 확실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갤싱어의 경험을 빌려보면 준비되지 않은 자는 언제든 마취 없는 고통을 겪을 각오를 해야 한다. 비즈니스 현장이든 일반적인 삶이든.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인텔 제국을 살린 앤드류 그로브의 '전략적 변곡점'
▲ 인텔을 강력한 제국으로 만든 초창기의 ‘삼두 마차’ 고든 무어, 로버트 노이스, 앤드류 그로브.(왼쪽부터) 콧수염을 기른 그로브의 젊은 시절 모습이 인상적이다. 고든 무어는 ‘무어의 법칙’(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이 2년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법칙)으로 잘 알려져 있다. 로버트 노이스는 잭 킬비와 함께 집적회로를 발명한 카리스마 경영자였다. <인텔>
앤드류 그로브의 또 다른 악행(?) 사례를 보자. 1998년 그로브는 11년 간의 인텔 최고경영자 임기를 마감하며 물러났는데 그 후임자가 크레이그 바렛(Craig Barrett)이었다. ‘칩워(Chip War)’의 저자 크리스 밀러 교수는 크레이그 바렛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적었다. 

“앤드류 그로브가 가장 선호하는 경영 기법은 '사람을 붙잡아 놓고 머리를 망치로 후려치는 것'이었다고 크레이그 바렛은 빈정거리기도 했다.” (‘칩워’, 부키출판, 2023)

그로브가 설마 망치를 내려쳤겠는가. 크레이그 바렛의 말을 보자면 녹록하지 않은 상사를 모신 건 분명해 보인다. 자, 이제 앤드류 그로브가 어떻게 인텔 제국을 살려냈는지 그 위기의 순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인텔은 창업(1968년) 2년 만에 D램을 출시하며 반도체 시장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 기업들이 더 저렴하게 D램 칩을 생산하게 되면서 인텔의 D램 세계시장 점유율은 곤두박질쳤다. 당시의 상황을 크리스 밀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칩 제조사들이 그 어떤 저주의 예언을 퍼붓건 일본 반도체는 승승장구했고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곧 실리콘밸리 전체가 반죽음이 되어 나가떨어질 판이었다.” (같은 책 인용)

앤드류 그로브는 마침내 1985년 결단을 내렸다. 인텔의 메모리 사업을 포기하고 PC용 마이크로프로세서로 전환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메모리를 담당하던 직원 25%가 해고됐고 여러 공장들이 폐쇄됐다. 크리스 밀러 교수는 이렇게 말을 이어간다.

“앤디 그로브는 인텔의 비즈니스모델이 고장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텔의 창업 아이템이었던 D램을 포기함으로써 인텔을 스스로 ‘파괴’했다. 대신에 인텔은 PC용 칩 시장의 목줄을 움켜쥐었다. 인텔을 구해낸 것은 혁신도, 전문성도 아닌 그의 편집증이었다.” (같은 책 인용) 

결정적으로 그로브의 편집증(편집광)이 회사를 살렸다는 얘기다. 그런 앤드류 그로브의 경영방식을 이야기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할 개념 2가지가 있다. ‘전략적 변곡점(Strategic Inflection Point)’과 ‘OKR(Objective, Key Results)’이다. 

그로브는 메모리에서 마이크로프로세서로 비즈니스 모델을 전환시키면서 ‘전략적 변곡점’이라는 개념을 세상에 내놓았다. 기업의 흥망성쇠를 가르는 결정적인 위기 시점을 그렇게 표현했다. 변곡점에서 위쪽으로 상승곡선을 그리면 기업은 살아남고 아래로 떨어진다면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으로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로브는 자신이 겪었던 전략적 변곡점에 대해 “길고도 고통스러운 투쟁이었다(it's a long, torturous struggle)"고 술회했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멘토였던 그로브의 전략적 변곡점에 주목하며 주위 기업인들에게 이렇게 권고하기도 했다.  

“당신도 전략적 변곡점에 대해 배워야 한다. 언제든 이 변곡점을 지나 가야만 할테니까.” (You must learn about 'Strategic Inflection Points', because sooner or later you are going to live through one.)

잡스의 말처럼 독자 여러분들도 자신의 전략적 변곡점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기 바란다. 앤드류 그로브는 OKR(Objective, Key Results)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OKR은 목표(Objective)와 핵심 결과(Key Results)의 약자다. 측정 가능한 팀 목표를 설정하고 목표 달성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는 일종의 경영도구이다. 

그로브는 피터 드러커가 제안한 경영 관리 기법인 MBO(Management by Objectives: 목표관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텔만의 성과관리 툴을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iMBO(Intel Management by Objectives)라는 이름의 OKR이다. 

이런 OKR은 세계적인 벤처투자기업인 클라이너 퍼킨스의 존 도어(John Doerr) 회장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OKR은 실리콘밸리를 넘어 한국의 삼성 등 대기업에도 접목됐다.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인텔 제국을 살린 앤드류 그로브의 '전략적 변곡점'
▲ 앤드류 그로브는 스물한 살에 조국 헝가리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계 이민자다. 헝가리 이름은 안드라스 그로프(Andras Grof). 대학에 다니면서 앤드류 그로브(Andrew Grove)라는 미국식 이름으로 바꿨다. <인텔>
존 도어 이야기를 더 해보자. 1975년 존 도어가 인텔 엔지니어로 들어갔을 때 당시 인텔에서는 앤드류 그로브의 OKR 시스템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 그로브로부터 직접 OKR을 배운 존 도어는 “그로브는 걸어 다니는 OKR의 아버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존 도어를 통해 이런 OKR을 전수받은 대표적인 회사가 구글이었다. 구글 공동 창업자 래리 페이지는 “OKR은 오랜 기간에 걸쳐 우리가 열 배 성장에 도전하도록 재촉했다”(존 도어 저, ‘OKR’, 세종서적)고 말하기도 했다. OKR이 구글의 성공 방식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경영 경험이 부족했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 자신의 동료였던 에릭 슈미트를 CEO로 영입하라고 조언한 것도 존 도어였다. 그런 점에서 구글에게 존 도어는 여러모로 ‘키다리 아저씨’였다. 

다시 인텔. 집적회로를 발명한 로버트 노이스(Robert Noyce: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의 잭 킬비와 공동 발명)과 ‘무어의 법칙’으로 유명한 고든 무어(Gordon Moore)가 페어차일드반도체를 나와 1968년 설립한 회사가 인텔이다. 인텔(Intel)은 집적 전자공학(Integrated Electronics)의 줄임말이다. 

이에 앞서 1963년 페어차일드에 헝가리 유대계 출신의 한 젊은이가 입사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앤드류 그로브다. 그로브 역시 페어차일드를 나와 인텔에 곧바로 합류했다. 로버트 노이스, 고든 무어와 함께 사실상의 창업자였다.

나치의 침공 등 홀로코스트에서 간신히 탈출해 스물한 살에 단돈 20달러를 들고 미국에 건너온 그로브의 원래 이름은 헝가리식인 ‘안드라스 그로프’(Andras Grof)였다. 그는 대학을 다니면서 비슷한 발음의 미국식 이름을 찾기 시작했고 ‘앤드류 그로브(Andrew Grove)’라는 공식 이름을 갖게 됐다.

인텔이라는 회사의 작명 과정도 흥미롭다. 실리콘밸리를 30년 넘게 취재한 언론인 마이클 맬론(Michael Malone)은 두 창업자(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 이름에 얽힌 사연을 이렇게 적었다. 

“회사명을 휴렛-팩커드의 이름을 본떠서 ‘무어 노이스’(More-Noyce)라고 이름 짓는다. 그러나 ‘너무 소음’(more-noise) 같이 들려서 불편했다. 마치 전자제품에서 발생하는 소음 같았고 이런 소음은 연구자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소리 중에 하나였다.”(‘인텔 트리니티’, 디아스포라, 2016)

얼마 뒤 '무어 노이스'는 회사명을 인텔(InteIntegrated Electronics Corporation)로 바꾼다.

앤드류 글로브는 로버트 노이스, 고든 무어에 이어 최고경영자에 오르면서 인텔을 강력한 제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1997년 타임지는 그런 그로브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당시 타임지의 편집장이 훗날 전기작가로 명성을 날리는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이었다. 미국 최고의 경영대학원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은 앤드류(앤디) 그로브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미국 비즈니스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흥미로운 CEO 중 한 명이다." (Andy Grove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and intriguing CEOs in American business history.)

‘흥미로운(intriguing)’이라는 표현에 그로브의 모든 것이 담겨있지 않을까. 이재우 재팬올 발행인
 
이재우 발행인(일본 경제전문 미디어 재팬올)은 일본 경제와 기업인들 스토리를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열성팬으로 '원령공주의 섬' 야쿠시마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부캐로 산과 역사에 대한 글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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