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 <안동시> |
[비즈니스포스트] 이상룡 선생 이회영 선생 일가는 전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 왔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자금이 바닥났습니다. 광대한 땅을 구입하고, 농지를 개간하고, 학교를 운영하고, 일제에 대항하여 무력항쟁을 이끌어갈 인재들을 양성하느라 많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시급한 일은 독립 전쟁을 위한 무기 구입이었습니다. 많은 동포들이 성금을 보내왔지만, 그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이에 이상룡 선생은 아들 준형에게 고국으로 가서 마지막 남은 재산, 안동 고성 이씨의 종택인 임청각을 팔아 자금을 마련해 오도록 합니다.
이준형 선생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귀국하여 문중 일가들을 만나 그 뜻을 전했습니다. 이에 문중 일가들은 종택을 남의 손에 넘길 수는 없다며 이를 만류하고 대신 성금을 모아줬습니다. 이상룡 선생은 동포들과 문중의 성금으로 동지들을 러시아로 보내 무기를 구입했습니다.
1911년부터 서간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상룡 선생은 1925년에 잠시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수반인 국무령 직을 맡아 활동했습니다. 1919년 처음 수립 당시 상해임시정부는 내각제 형태의 정부였습니다. 또, 정부 수반은 총리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총리로 취임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명예욕과 권력욕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국가 수반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통령제를 선호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미국에서 활동하며 영어로 만든 명함에 자신의 직함을 총리가 아닌 대통령으로 표기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안창호 선생이 강력하게 비판하고 항의했다고 합니다.
1919년 9월, 이승만 대통령이 주도하여 임시정부 체제를 대통령제로 바꿨고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이 돼서도 일제의 위협이 미치지 않는 미국에서 활동했습니다. 이에 대한 비판 여론이 고조되자 1년 뒤인 1920년에 상해로 왔습니다.
그는 독선적인 정부 운영으로 각료들과 갈등을 겪다가 1년 후에 또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게다가 미주 지역 동포들이 독립운동에 쓰라고 보내주는 성금을 대부분 자신의 활동비로 쓰고 임시정부엔 소액만 보냈습니다. 이 때문에 탄핵을 당하고 1925년 3월에 대통령직을 잃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때문에 큰 홍역을 치른 임시정부는 다시 정부체제를 고치고 정부수반 직도 국무령으로 바꿨습니다. 불미스러운 일로 대통령을 탄핵한 임시정부 인사들은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임시정부 내에서는 여러 인사들과 산하 단체들이 주도권을 차지하려고 경쟁하며 알력이 심했습니다. 이런 갈등을 치유하고 여러 단체의 통합을 이뤄줄 지도력이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이 때 여러 인사들이 그런 지도력을 갖춘 인물로 이상룡 선생을 꼽았습니다. 특히 임시정부 수립과 활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안창호 선생이 이상룡 선생을 국무령으로 추대해야 한다고 적극 주장했습니다. 안창호 선생은 이상룡 선생이야말로 사욕이 없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다른 동지들을 존중하여 앞세우니 이런 분이 국무령직을 맡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이상룡 선생은 많은 독립지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국무령에 취임했습니다. 선생은 임시정부 내 여러 단체와 인사들의 갈등을 치유하고 화합과 통합을 이루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높은 덕망과 노력으로도 그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또, 선생의 내각 구성이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명예와 지위에 일체 욕심이 없고 오로지 대의에 따라 살고자 했던 선생에게 이런 비판은 참으로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선생은 겸허하게 선선히 그 비판을 받아들였습니다. 모두 부덕하고 부족한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하며 스스로 국무령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선생의 인품과 지혜와 역량을 잘 아는 수 많은 독립지사들이 극구 말렸지만, 선생은 표표히 상해를 떠나 만주로 돌아갔습니다. 이에 많은 이들이 선생의 사퇴는 독립운동 전체에 큰 손실이라 여기며 애석해 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지난 회에 임청각의 정기로 정승 세 명이 태어난다는 예언에 관해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조에 정승 두 명이 태어났고 마지막으로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 선생이 태어났으니 이 예언이 이뤄졌다 할 수 있겠습니다.
임시정부의 위상을 한껏 낮춰 폄하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임시정부의 힘은 비록 미약했으나 나라 잃은 겨레에게는 암흑을 밝히는 한 줄기 광명이었으니 장하고 자랑스러운, 또 겨레의 역사가 다하는 날까지 오래 오래 기림 받아야 할 우리 겨레의 어엿한 정부입니다.
또 임시정부 내 일부 인사들의 불만과 비판에 대해서 자신의 잘못이라고 겸허히 받아들이고 물러난 선생의 태도,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지 않고 자신에게 돌리는 지도자의 모습 또한 많은 귀감이 되었습니다.
만주로 돌아온 선생은 노령에도 불구하고 온갖 고생을 하며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193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별세하기 전, 선생이 남긴 유언은 자신을 만주 땅에 안장했다가 나라를 되찾은 뒤에 고국으로 옮겨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생의 유해는 1990년에야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선생이 작고한 뒤 선생의 아들 이준형 선생은 남은 가족을 이끌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임청각 사람들은 고국에 돌아와서도 숱한 고초를 겪으며 일제에 항거했습니다. 그런데 임청각에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매우 큰 변고가 생겼습니다.
▲ 임청각을 가로지르는 중앙선 철로를 철거하고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안동시> |
일제는 중앙선 철도 건설을 계획하면서 임청각 안으로 철도가 지나가게 설계했습니다. 공사가 시작되고 99칸 임청각 건물 중 무려 50여 칸이나 되는 행랑채와 부속 건물들이 헐렸습니다. 남은 건물 중 바깥 끝쪽 건물과 철길 사이의 거리는 10여 미터 밖에 안 되었습니다.
훼손된 건 건물만이 아니었습니다. 임청각 터를 좌우 양 옆에서 보호해주는 산줄기인 청룡과 백호도 크게 파괴되었습니다. 청룡과 백호가 파괴되면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많은 고난을 겪습니다.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인명이 상하고, 재물이 흩어지며 여러 큰 어려움을 당합니다.
중앙선 철도는 1942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기차가 다니기 시작한 바로 그 해에 이준형 선생은 '하루를 더 살면 하루 더 친일하게 된다'는 유언을 아들 이병화 선생에게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 뒤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되었습니다.
일제의 패망과 해방은 온 겨레의 간절한 염원이었습니다. 삼천리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기쁨의 환호성이 메아리쳤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의 시간은 잠시였습니다. 어이없게도 외세에 의해 나라가 둘로 쪼개지고, 또 거기에다 친일파가 득세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며 애국지사와 애국지사 가족들을 탄압했습니다.
많은 애국지사와 가족들은 일제시대에 버금가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임청각의 마지막 각주인 이병화 선생은 정의가 사라진 나라의 현실에 울분을 삭이며 탄식하다 1952년에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생의 가족들은 극심하게 궁핍한 생활을 했습니다. 너무 가난하여 선생의 자녀 중 두 사람은 한동안 고아원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이상룡 선생은 임시정부 수반인 국무령을 역임했음에도 친일파와 함께 권력을 장악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4월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지 2년 뒤인 1962년에야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 또 선생의 직계 가족과 방계 가족 13명이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았습니다.
임청각 사람들의 고귀한 업적은 독립을 위해 바친 전 재산보다 백 배 천 배 더 가치 있다 하겠습니다. 아니 그 가치를 서로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취임 첫 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임청각은 대한민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상징하는 공간'이라고 천명했습니다. 그리고, 임청각 복원사업을 추진했습니다.
2018년에는 복원을 위한 종합계획이 수립되었으며 2021년엔 임청각 앞의 중앙선 철도도 철거했습니다. 복원 공사는 2025년 완공할 예정으로 지금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임청각이 옛 모습을 찾으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임청각 사람들의 드높고 아름다운 정신을 기리게 될 것입니다. 또 그 고귀한 뜻이 임청각 앞에 흐르는 낙동강 강물이 머나먼 바다로 퍼져가 듯 멀리 멀리 전해지리라고 봅니다. 류인학/자유기고가, '문화일보'에 한국의 명산을 답사하며 쓴 글 ‘배달의 산하’, 구도소설 ‘자하도를 찾아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