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텔이 실적 부진과 재무구조 악화에도 파운드리 투자를 축소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고 있다. 인텔 미국 애리조나주 반도체공장 건설 현장. |
[비즈니스포스트] 인텔이 PC시장 침체와 서버용 반도체 경쟁 심화로 역대 최악의 적자를 기록했지만 파운드리사업 진출에 들이는 연구개발 및 시설 투자를 축소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3나노 이하 미세공정 기술 경쟁에서 수 년 안에 TSMC와 삼성전자를 큰 격차로 따돌리지 못하면 이미 파운드리사업에 들인 막대한 비용을 회수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14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인텔이 세계 반도체시장에서 선두 지위를 지켜내지 못한 결과가 최근 들어 더 뼈아픈 실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인텔이 미세공정 반도체 생산에 EUV(극자외선) 장비 도입을 늦추는 사이 TSMC와 같은 경쟁사가 선수를 치며 시장 판도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바라봤다.
삼성전자는 2018년부터 7나노 공정에 EUV를 세계 최초로 적용했고 TSMC가 얼마 지나지 않아 뒤를 이었다. 반면 인텔의 EUV 도입 시기는 2023년 4나노 공정부터로 크게 뒤처진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미중 무역분쟁 등 지정학적 리스크로 반도체가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부각되는 시점에 인텔이 경쟁사에 밀려난 것은 상당한 타격이 될 수 있다고 바라봤다.
인텔은 2021년 파운드리사업 진출을 선언한 이래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목표를 두고 4년 안에 EUV공정 기반의 새 공정기술을 5차례에 걸쳐 도입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다른 반도체기업이 약 10년에 걸쳐 이뤄낼 만한 성과를 절반도 되지 않는 기간으로 단축하겠다는 것이다.
자연히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들여야 하는 연구개발 및 시설 투자 비용도 상당할 수밖에 없다.
파운드리사업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공정 기술뿐 아니라 실제로 고객사 반도체를 위탁생산하기 충분한 수준의 생산 능력도 갖춰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텔의 이러한 계획은 글로벌 경제 성장 둔화와 인플레이션에 따른 PC 및 서버시장 위축으로 큰 차질을 피하기 어려워졌다.
인텔은 1분기에 매출 117억 달러, 15억 달러의 영업손실과 28억 달러의 순손실을 냈다. 2010년 이후 가장 큰 손실을 기록하며 반도체시장 침체에 직격타를 맞은 것이다.
자연히 인텔의 재무구조도 악화하면서 아직 매출을 내지 못하고 있는 파운드리사업에 경쟁사를 웃도는 수준의 투자를 이어가는 일도 무리한 과제로 남았다.
▲ 팻 겔싱어 인텔 CEO가 파운드리에서 TSMC와 삼성전자 추격에 사활을 걸고 있다. |
팻 겔싱어 인텔 CEO는 2025년까지 연간 100억 달러에 이르는 비용 절감을 목표로 인력 감축과 인건비 삭감, 주주 현금배당 축소 등을 실시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매년 최대 수백억 달러의 자금이 드는 파운드리사업 투자를 줄이지 않기 위해 다른 영역에서 최대한 허리띠를 졸라매는 ‘고육지책’을 선택한 것이다.
인텔이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도 파운드리 투자를 절대적 우선순위에 두는 이유는 업계에서 확실한 선두를 차지하지 못하면 사업이 완전히 실패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으로 분석된다.
TSMC와 같은 선두 기업에 반도체 위탁생산을 맡기던 고객사들은 여러 리스크를 감수하고 인텔로 파운드리 생산공정을 이동할 만한 이유가 크지 않다.
인텔이 수주 기회를 확보하려면 공정 기술력이나 생산 능력, 규모의 경제효과를 통한 반도체 공급 단가 등 측면에서 유의미한 수준의 차이를 보여야만 한다.
결국 인텔이 TSMC나 삼성전자보다 새 공정기술 개발 속도를 크게 앞당기겠다는 목표를 실현하고 또 공장 증설 시점도 앞당겨야만 파운드리사업에서 최소한의 성과를 보장할 수 있는 상황이다.
만약 이러한 계획이 실패한다면 인텔이 그동안 파운드리에 투자한 비용은 대부분 손해로 남게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인텔이 당분간 재무구조 개선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도 이처럼 파운드리에 연구개발과 시설 투자를 예정대로 유지해야만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된 것이다.
삼성전자 역시 선두기업인 TSMC의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을 추격해야 하는 상황에서 1분기 반도체 실적이 큰 폭으로 감소하며 비슷한 고민을 안게 됐다.
더구나 인텔마저 삼성전자에 만만찮은 경쟁 상대로 등장해 파운드리사업 진출에 독기를 품고 있는 만큼 앞으로 더욱 치열한 대결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인텔은 기존의 회사 안에 TSMC와 같은 회사를 하나 더 세우겠다는 쉽지 않은 도전을 하고 있다”며 “반도체 시장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더욱 어려운 과제가 쌓이고 있는 셈”이라고 바라봤다.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