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원회 의장이 20일 국회에서 열린 ‘전기·가스 요금 관련 민·당·정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날 박 의장은 “한전이 도덕적 해이의 늪에 빠진 채 전기요금을 안 올리면 다 같이 죽는다는 식으로 국민을 겁박하는 여론몰이만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전기요금 인상이 절실한 한국전력공사(한전)를 향한 집권 여당의 압박이 거세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한전의 전기요금 인상 요구에 대해 ‘도덕적 해이’나 국민겁박‘이라는 거친 말을 쏟아냈다.
한전 경영이 ‘방만’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뜻은 아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지적받은 억대 연봉자 증가, 외유성 출장 등은 천문학적 적자 공기업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보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하지만 지난해 32조에 달한 한전의 적자는 엄밀히 말하면 한전 탓이 아니다. 특히 한국의 전기요금 결정 구조를 살펴보면 정치권, 특히 집권 여당이 한전에게 책임을 돌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전력공급을 공기업인 한전이 담당하고 있는 만큼 전력 소비자인 국민들은 한전의 명의로 발행된 전기요금명세서를 받고 전기요금을 납부한다. 한전이 전기요금을 결정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전기요금은 전기사업법에 따라 분기마다 ‘전기위원회’의 심의, 의결을 거친 뒤 산업통상자원부의 최종 인가로 결정된다.
한전, 전기위원회 모두 산업부 산하 기관이고 한국에서 공기업 등 공공기관에는 주무부처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산업부가 전기요금 결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정부 내에서 부처 위의 부처로 불리는 기획재정부 역시 전기요금 결정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주체다. 기재부는 물가 관리를 이유로 전기요금 결정 과정에 강하게 개입한다.
정부 부처인 기재부, 산업부는 의회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결국 정치권의 영향력에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현재 기재부의 수장인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민의힘 소속 현역 의원인 데다 내년 총선 출마가 확실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한전은 직접 전기를 판매하고는 있지만 전기요금 결정 과정에서는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처지인 셈이다. 비유하자면 장사는 직접 하지만 물건 가격은 물론 매장 인테리어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름만 ‘사장’인 프랜차이즈 가맹점주와 비슷한 처지다.
게다가 올해 들어 한국 경제가 연이은 무역적자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고 대통령과 여당을 향한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정치권은 전기요금 결정에 이전보다 더 강하게 개입하고 있다.
올해 2분기 전기요금은 분기 시작 전인 3월에 결론이 났어야 했지만 당정협의회에서 합의를 보지 못하면서 현재까지 인상 여부에 관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특히 여권은 최근 한전을 향해 임원들의 외유성 출장 논란 등 내부 비위를 비롯해 한전공대 출연 등을 문제 삼으며 전기요금 인상을 주장하기 전에 경영쇄신을 하라고도 요구하고 있다.
물론 한전 경영에 문제가 있는 부분은 개선해야 한다. 하지만 전기요금 문제와 한전의 비위, 방만경영 논란 등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여권이 주장하는 한전의 방만경영 문제는 한전의 재정난과 크게 관계가 없다. 한전이 대규모 적자에도 방만하게 자금을 투입했다는 한전공대 출연금도 2019년부터 현재까지 1588억 원 정도다. 반면 한전 영업손실은 지난해 32조6551억 원이다.
한전이 수십 조 단위의 영업손실을 보는 주된 원인은 '원가 이하의 낮은 전기요금'에 있다. 특히 한국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미국 상무부가 ‘사실상 철강 업계에 주는 보조금’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낮다.
시장 논리에서는 나오기 어려운 ‘원가 보다 낮은 요금’이라는 기현상은 지지율이라는 정치 논리로 움직이는 정치권이 전기요금 결정 과정을 주도한 데 따른 결과다.
윤석열 정부뿐만 아니라 역대 어느 정권도 이 비판에서는 벗어나기 어려울 정도로 전기요금 결정 과정에서 정치 논리의 개입은 꾸준히 누적돼 온 문제다. 그만큼 전문가들의 문제 제기 역시 꾸준히 이어져 왔다.
하지만 한전이 별 탈 없이 굴러가는 상황에서는 현상을 바꾸려는 문제 제기가 좀처럼 동력을 받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수십조 원에 이르는 영업손실로 한전이 초유의 위기 상황을 겪는 지금이 오랜 기간 이어져 온 구조적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결정적 시기가 아닐까?
윤 대통령도 2022년 출범 당시 에너지 분야의 주요 국정과제로 원가기반 요금체계, 전기위원회의 전문성과 독립성 강화를 내세운 바 있다. 이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