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희헌 기자 gypsies87@businesspost.co.kr2022-12-25 14:5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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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포스트] 올해 유통업계의 주요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가치 소비’였다.
단순히 가격과 품질만으로 상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제품을 만드는 기업이나 브랜드가 지닌 철학을 판단해 지갑을 여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 올해 소비자들의 ‘가치 소비’ 문화가 뿌리내린 대표적 영역은 바로 친환경이다. 현대백화점은 올해 6월부터 모든 점포에 도입한 친환경 쇼핑백(사진)으로 소비자들의 긍정적 호응을 얻었다.
25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올해 소비자들의 ‘가치 소비’ 문화가 뿌리내린 대표적 영역은 바로 친환경이다.
불과 수 년 전만 하더라도 친환경이라는 말은 기업들이 내거는 여러 추상적 구호 가운데 하나로만 여겨졌다. 기업을 홍보하는 수단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기업이나 브랜드가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중요하게 판단하는 소비자도 적었다. 기업과 브랜드 입장에서 보면 이와 관련해 진심을 다할 필요가 적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올해 유통업계 흐름을 보면 친환경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소비자나 기업, 브랜드에게 단순한 구호로만 머물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환경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생산된 제품이라면 소비자들은 제품을 사는데 망설였다. 대신 폐플라스틱, 폐타이어, 폐비닐 등 재활용 소재를 사용해 생산된 상품들이 각종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회자되는 일이 잦아졌다.
이러한 제품에 관심을 갖고 실제 소비까지 하는 고객들 또한 눈에 띄게 늘어난 것으로 파악된다.
대한상공회의소가 4월 발표한 ‘MZ세대가 바라보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과 기업의 역할’이라는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전체 조사 대상 380명 가운데 64.5%가 추가 지불을 하더라도 ESG 경영을 실천하는 기업의 제품을 사겠다고 응답하기도 했다.
기업들은 이러한 고객들의 변화에 발 빠르게 움직였다. 대표적인 곳은 현대백화점이다.
현대백화점은 2월부터 친환경 쇼핑백 사용을 시범운영하기 시작해 6월부터 전국 모든 점포로 확대했다. 해마다 8700톤씩 배출되는 포장박스와 서류 등 폐지를 재활용하면 나무를 보호하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현대백화점의 친환경 쇼핑백 도입 취지였다.
이는 ‘백화점 쇼핑백은 고급스러워야 한다’는 통념을 과감하게 깼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백화점이 놓아서는 안 될 가치인 ‘고급화’를 너무 한 번에 놓아버린 것 아니냐는 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MZ세대는 오히려 투박한 쇼핑백에 열광했다.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보면 현대백화점의 행보를 ‘용감하다’ ‘멋지다’고 평가하는 누리꾼들의 반응을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었다.
친환경 여부를 중요한 소비 기준 가운데 하나로 정립한 젊은 세대에게 ‘좋은 기업’으로 인식된 것은 친환경 쇼핑백 도입이 가져다 준 긍정적 효과였다.
친환경에 신경 쓴 기업은 현대백화점뿐만이 아니다.
이마트는 코로나19 시기에 폭발적으로 수요가 늘어난 밀키트 상품의 친환경성을 강화하기 위해 패키지의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는 방안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롯데그룹의 통합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는 롯데온은 최근 서울 잠실 석촌호수에 전시했던 초대형 고무오리 러버덕을 업사이클링 상품으로 제작해 판매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폐방화복 업사이클링 기업과 협업했다.
패션기업들 역시 친환경 소재를 활용한 가방과 의류 개발에 투자를 늘리며 소비자들의 친환경 소비를 장려하는 문화가 업계의 표준으로 자리잡고 있는 모양새다.
하지만 가치 소비에 대응을 잘 한 기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치 소비 때문에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기업도 있다.
▲ SPC그룹은 올해 10월 일어난 노동자 사망사고 탓에 소비자 불매운동의 직격탄을 맞았다. 허영인 SPC그룹 회장(사진)이 10월21일 서울 서초구 SPC본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빵공장 사망사고와 관련해 재발방지 대책을 발표하며 사과하는 모습. <연합뉴스>
대표적인 기업은 SPC그룹이다.
올해 10월 중순 SPC그룹의 계열사 SPL의 제빵공장에서 한 20대 노동자가 소스배합기에 끼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SPC그룹은 논란의 한복판에 섰다.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의 안전을 배려하지 않았던 여러 구조적 문제점이 알려지면서 SPC그룹은 소비자 불매 운동의 직격탄을 맞기 시작했다.
가치 소비 문화의 중심에는 얼마나 직원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지가 놓여 있는데 준 대기업 SPC그룹에 아직 이런 문화가 없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소비자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온라인 커뮤니티 반응을 보면 케이크 판매 성수기인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에도 불매 운동의 여파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예년같으면 SPC그룹이 운영하는 파리바게뜨에 케이크를 사전예약했지만 올해는 다른 프랜차이즈나 동네 빵집을 사용했다는 소비자들의 인증 글이 온라인에 꾸준히 올라왔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노동자의 안전을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면서 SPC그룹에 대한 소비자 분노도 커진 것으로 보인다”며 “좋은 가치를 추구한다고 일컬어지는 기업은 힘을 받고, 그렇지 않은 기업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는 흐름이 유통업계의 대세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