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완성차 브랜드들이 러시아에서 하나둘씩 철수한 가운데 현대차 공장은 자재를 조달하지 못해 멈춰선 상태에 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가 현지 사업에서 철수하는 글로벌 기업의 생산시설을 사실상 몰수하고 있어 철수를 결정한다면 상당한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 현대차그룹이 러시아 공장(사진) 철수와 관련해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24일 러시아 현지 매체 등에 따르면 현대차는 이달 안으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의 철수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러시아 온라인 매체인 ‘러시안 카’는 현대차가 불완전한 차량을 포함해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1500여 대 차량을 완제품 창고에서 완전히 처리한 뒤 조만간 철수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보도했다.
현대차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은 2021년 기준 20만 대의 자동차를 생산한 공장이다. 현대차 글로벌 전체 생산량 가운데 5%가량의 비중을 차지한다.
러시아가 지난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은 3월 말부터 자재공급 중단 등으로 조업을 축소한 데 이어 현재는 가동을 멈춘 상태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이 완전히 철수를 결정하게 되면 추가적 재무 부담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글로벌 완성차업체인 르노나 닛산 등이 러시아에서 생산을 철수하면서 러시아 정부로부터 사실상 자산을 몰수당했다. 현대차그룹도 철수를 결정해 같은 절차를 밟게 된다면 큰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르노그룹은 5월 러시아에서 철수하면서 러시아 국영연구소에 공장 등이 단 1루불에 매각됐다. 이에 따른 르노그룹의 예상 손실 규모는 22억 유로(3조800억 원)에 이른다.
닛산도 10월에 상태페테르부르크 공장과 R&D센터, 마케팅 센터를 러시아 국영연구소에 1유로에 매각했다. 예상 손실 규모는 1천억 엔(9500억 원)으로 추산됐다.
더구나 현대차러시아생산법인(HMMR)은 2020년 말 제너럴모터스의 상트페테부르크 공장까지 인수하면서 러시아 사업을 키울 준비를 해왔다는 점에서 피해 규모가 더욱 클 수 있다.
현대차그룹 계열사 가운데 러시아에 판매법인을 둔 기아나 현지 부품공장을 운영하는 현대모비스와 현대위아도 현대차가 철수를 결정하면 함께 빠져나와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현대차와 기아는 가뜩이나 3분기 세타2 엔진 관련 충당금 3조 원가량을 추가로 설정하면서 3분기 영업이익이 기존 예상치보다 대폭 낮아졌는데 러시아 사업 관련해 실적 불확실성이 커지게 된 셈이다.
김준성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현대차그룹이 러시아에서 철수를 결정해 이미 강제 매각이 진행된 르노와 닛산의 전철을 밟는다면 대규모 손실 반영이 불가피하다”며 “보유현금과 처분 가능한 자산은 제한적인 반면 상환해야 할 비용과 손망실된 자산 규모가 크다”고 분석했다.
현대차가 러시아 사업과 관련해 구체적 재무제표를 공개하고 있지 않지만 러시아 공장 자산 규모만 해도 2022년 2분기말 기준으로 2조6200억 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대부분이 손실로 처리될 위험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
다만 러시아가 최근 미국과 영국 등 서방과 잇따라 접촉을 하면서 우크라이나와 전쟁에서 출구를 마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물론 러시아 국영매체 리아 노보스티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부 장관이 서방국가와 통화에서 “우크라이나가 자신들의 땅에서 이른바 ‘더러운 폭탄’ 폭발과 관련한 도발을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을 전달하면서 핵폭탄 사용을 위한 기만 전술을 펴고 있다는 의구심도 제기된다.
하지만 러시아가 미국과 접촉이 잦아지면서 오히려 입장을 선회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고 있다는 시선도 만만치 않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부 장관은 현지시각 23일 미국과 영국, 튀르키예(터키) 국방장관 등과 연쇄 전화 회담를 진행했다.
특히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과 전화 통화는 21일에 이어 사흘 만에 2번째 통화를 한 것으로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휴전이나 종전을 위한 별도의 협상이 진행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시선도 나온다.
미국과 러시아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현대차그룹으로서는 러시아 공장 철수문제에 대해 한숨을 돌리며 시간을 벌 수 있게 된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전쟁이 장기화되고 상황이 수시로 변함에 따라 러시아 공장에 대한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은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