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정부가 반도체 지원 법안과 관련해 대만과 공식 논의를 앞두고 있다. 대만 TSMC 반도체 생산공장. |
[비즈니스포스트] 미국 정부가 반도체 지원 법안의 본격적 시행과 대상 기업 선정을 앞두고 대만과 외교적 교류를 확대하며 구체적 지원 방안도 논의하기로 했다.
한국과 미국, 대만의 주요 반도체기업들이 정부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만 소외되는 처지에 놓일 가능성이 떠오르고 있다.
14일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미국 외교당국 고위 관계자는 10월 중 미국 정부와 대만 측이 공식적으로 반도체 지원법 관련한 논의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서명한 반도체 지원 법안은 520억 달러(약 72조 원)에 이르는 자금을 미국 내 반도체 생산투자 및 연구개발에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약 240억 달러의 세제혜택 등 인센티브도 주어지는데 미국 정부는 내년 초까지 반도체기업들의 신청을 받아 평가를 거친 뒤 지원 대상과 규모를 선정하기로 했다.
미국 정부가 이런 시점에 대만과 공식적으로 반도체 지원 관련한 논의를 진행하기로 한 것은 대만에 어느 정도 특혜를 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대만 TSMC가 글로벌 주요 반도체기업 가운데 가장 먼저 미국 반도체 지원법을 겨냥한 대규모 현지 공장 투자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로이터는 미국 정부에서 최근 대만 반도체 소재기업 글로벌웨이퍼가 한국 대신 미국을 신규 공장 부지로 최종 결정한 점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만이 최근 중국의 거센 압박에 따른 지정학적 리스크에도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 미국과 반도체 등 경제 협력 강화에 힘쓰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배경으로 분석된다.
미국 정부가 대만의 이런 노력을 어느 정도 보상해주는 차원에서 반도체 지원법에 따른 수혜를 TSMC 등 대만 기업에 몰아줄 가능성이 충분한 셈이다.
미국 외교당국 관계자는 미국과 대만의 반도체 협의체가 그동안 두 국가의 반도체 공급망 차질 극복에 중요하게 기여했다는 점도 강조하면서 10월 열리는 회담에서 반도체 지원법과 관련한 세부 내용을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반도체 지원법에 따른 보조금을 포함해 대만의 여러 산업 발전을 돕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계획도 언급됐다.
반도체 지원법 시행 과정에서 대만이 큰 수혜를 받을 것이라는 점을 사실상 미리 예고한 셈이다.
미국 정부는 마이크론과 인텔 등 반도체 지원법 시행을 노려 잇따라 대규모 투자 계획을 내놓은 미국 반도체기업도 적극적으로 지원하려 할 공산이 크다.
마이크론 CEO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반도체 지원법 서명식에 참석했고 바이든 대통령은 인텔의 미국 반도체공장 건설 현장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반도체 지원법 시행에 필요한 대규모 예산이 미국의 세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 기업이 혜택의 중심에 놓이는 일은 당연한 이치로 꼽힌다.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 기업이 소외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 삼성전자 텍사스주 오스틴 반도체 파운드리공장 내부. |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에 이미 170억 달러 규모 반도체 파운드리공장을 짓고 있으며 앞으로 약 20년 동안 진행할 가능성이 있는 중장기 투자 계획도 제시했다.
그러나 바이든 정부는 반도체 지원법이 미국 의회를 통과하기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후로 한국 반도체기업 지원과 관련한 뚜렷한 메시지를 내놓지 않고 있다.
자칫하면 반도체 지원법의 수혜가 모두 미국 인텔과 마이크론, 대만 TSMC 등 삼성전자의 경쟁사들에 상당 부분 돌아가는 데 그칠 수도 있다.
윤석열 정부가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과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데 미온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점이 이런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 정부는 반도체 최대 수출 대상국인 중국의 반발과 무역보복 등을 우려해 미국의 반도체 분야 협력 제안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 권력서열 3위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윤석열 대통령이 휴가를 이유로 그와 만나지 않은 점도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미국 정부에서 제안한 반도체 국가 연합 ‘칩4 동맹’ 가입에 한국이 탐탁치 않은 듯한 태도를 보인 점 등 여러 원인이 미국과 대만의 밀월 강화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실적으로 미국 입장에서는 파운드리 1위 업체인 TSMC를 우군으로 확보하면 삼성전자에 크게 의존할 이유가 없어 대만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만을 두고 전체 상황을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미국이 대만에 반도체 분야 지원을 직접 언급한 일은 삼성전자에 다소 불안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에 대규모 반도체 투자 계획을 검토 중인 SK하이닉스 등 SK그룹 계열사도 이런 상황을 면밀히 지켜봐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고 있다.
로이터는 “대만은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협력 대상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적극 앞세우고 있다”며 “특히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에서 믿을 만한 ‘친구’로 이미지를 구축하는 성과를 냈다”고 보도했다.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