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석 기자 stoneh@businesspost.co.kr2022-08-19 16:3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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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포스트] 미국 시장에서 질주하고 있는 현대자동차그룹의 전기차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
미국에서 현지 생산된 전기차에만 보조금(세제혜택)을 제공하는 인플레이션 완화법(감축법)이 시행되면서 국내에서 대부분 생산되는 현대차그룹의 전기차가 가격 경쟁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미국에서 현지 생산 등의 조건을 갖춘 전기차에만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인플레이션 완화법이 통과되면서 현대자동차그룹의 전기차가 지원 대상에서 제외될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차그룹은 빠르게 전기차 판매량을 늘리며 개화하는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고 있는데 2025년 현지 전기차 생산기지를 구축하기까지 앞으로 2, 3년 동안의 대응이 현지 시장공략의 성패를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19일 글로벌데이터서비스기업 익스피리언(Experian)에 따르면 2022년 현대차그룹은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판매량을 크게 늘리며 선도적 입지를 다지고 있다.
올해 상반기 미국에서 현대차그룹은 3만3961대의 전기차를 팔아 점유율 10.0%로 2위에 올랐다. 3위를 차지한 미국업체 포드(2만1820대)를 1만 대 이상의 차이로 여유롭게 따돌렸다.
현대차는 지난해 상반기 판매량의 2.5배인 1만4994대, 기아는 1년 전 판매량의 6배인 1만8967대의 전기차를 미국에서 팔았다.
상반기 미국 전체 전기차 판매량이 33만8609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0% 증가한 것을 고려하면 현대차그룹은 미국 전체 전기차 시장의 성장세보다 훨씬 빠르게 판매 실적을 늘리고 있다.
미국 전기차 시장의 3분의2 이상(약 68%)을 점유하고 있는 테슬라에는 못미치지만 현대차그룹은 기존에 내연기관차를 만들어온 완성차업체 가운데서는 가장 앞선 위치에서 테슬라를 추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의 미국 전기차 판매 질주에 제동이 걸리게 됐다. 16일(현지시각)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북미에서 생산되는 전기차에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하는 내용을 담은 인플레이션 완화법(IRA)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차량은 바로 보조금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인플레이션 완화법은 미국에서 생산된 전기차와 관련해 저소득층이나 중산층에 신차 기준 최대 7500달러 규모(약 989만 원)의 보조금을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상 차량은 권장소비자가격 기준 SUV밴픽업은 8만 달러, 승용차는 5만5천 달러 미만인 전기차다.
내년부터는 7500달러 세제 혜택의 절반은 핵심광물의 원산지 비율에 따라, 나머지 절반은 북미산 배터리 부품 사용 비율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원한다. 전기차 배터리에 사용되는 핵심 원재료와 배터리 부품이 대부분 북미에서 생산되거나 중국 등 적대적 국가가 아닌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동맹국에서 수입돼야 한다는 조건이 붙은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아직까지 미국에서 전기차를 생산하지 않고 있어 현재 미국에서 세제혜택을 받고 있는 현대차 아이오닉5와 코나EV, 아이오닉EV 기아 니로EV, 소울EV, EV6 등은 지원 대상 차량에서 모두 제외된다.
현대차그룹이 6조3천억 원을 투입해 조지아주에 건설하는 전기차 전용공장은 내년 상반기에 착공에 들어가 2025년에 완공된다. 현대차그룹이 최소 2년 이상 보조금을 받지 못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현대차그룹이 인플레이션 완화법에 직접 대응할 수 있는 방안으로는 우선 지원 받지 못하는 보조금 만큼 일정 수준의 구매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한시적 프로모션 전략이 꼽힌다.
본격 개화하는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현대차그룹은 점유율을 지키는 것이 수익성보다 중요한 것으로 분석된다. 현대차그룹은 올 상반기 처음으로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두 자릿수 점유율 기록했다.
최근 현대차그룹은 미국에서 수익성을 크게 끌어올린 바 있어 강력한 프로모션을 진행할 수 있는 이익체력은 갖춘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기아는 미국에서 과잉생산과 그에 따른 인센티브(판매장려금)의 증가로 한동안 적자를 기록해왔으나 최근 미국 판매량 증가와 고가차량 위주로 판매조합(믹스) 개선, 인센티브 축소에 힘입어 반등을 이뤘다.
2020년과 2019년 각각 흑자로 전환한 현대차와 기아의 미국법인은 올해 상반기 각각 순이익 1조33838억 원, 1조1288억 원을 거뒀다. 지난해 상반기와 비교해 현대차는 336.5%, 기아는 74.8% 증가한 수치다.
다만 대규모 프로모션을 실시하는 데 환율의 변동성이 부담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법인에서 올해 순이익이 크게 증가한 데는 1300원을 넘나드는 원/달러 고환율이 기여한 부분이 컸기 때문이다. 올해 2분기 현대차와 기아는 1년 전보다 12% 상승한 평균 환율에 힘입어 글로벌 시장에서 각각 6410억 원, 5090억 원의 이익 증가 효과를 봤다.
2025년 조지아 신공장 구축에 앞서 현대차그룹이 기존 미국 공장에서 전기차 생산라인을 증설하거나 혼류생산을 도입하는 방법을 활용할 수도 있다.
혼류생산은 하나의 생산라인에서 2개 이상의 제품을 생산하는 시스템을 이르는 것으로 시장상황에 맞춰 탄력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현대차는 4월 앨리배마 공장에 3억 달러(약 3600억 원)을 투입하고 전기차 라인을 증설에 들어가 올해 말부터 제네시스 GV70 전동화모델의 미국 현지 생산을 시작한다. 기아 조지아 공장 등에서 생산라인을 추가하면 전기차 생산 물량을 늘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기아는 4월 오토랜드 화성 3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는 전기차 EV6를 K3를 생산하는 2공장에서 병행해서 생산하기로 결정하고 올 10월까지 예정된 보완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기존 공장을 활용하면 조지아 신공장 건설에 앞서 전기차 현지생산 물량을 늘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2025년까지의 단기적 대응을 위해 고정지출인 설비투자를 단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는 시선도 만만치 않다.
올 상반기에 이미 현대차 앨러배마공장 가동률은 90.4%, 기아 미국 조지아공장 가동률은 91.9%를 기록했다. 투자를 단행해 혼류생산 체제를 갖추더라도 전기차 생산을 늘릴 여지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현대차와 기아가 국내에서 생산하는 전기차를 해외에서 생산하려면 노조의 동의가 필요하다. 현대차 단체협약은 국내 생산 차종을 해외에서 생산하게 돼 국내 공장 고용에 영향을 미치는 때는 고용 안정위의 심의 의결을 거치도록 규정하고 있다.
▲ 16일(현지시각)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인플레이션 완화법'에 서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 맨친 상원의원, 척 슈머 상원의원, 제임스 클리번 하원의원, 프랭크 펄론 하원의원, 캐시 캐스터 하원의원. <연합뉴스>
업계에 따르면 인플레이션 완화법의 구체적 조건을 규정한 시행령은 올해 연말이 돼야 마련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시행령이 마련되기까지 남은 기간 공식 또는 비공식 채널을 모두 동원해 미국 정부에 보완책을 촉구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북미 내'로 규정된 전기차 최종 조립 및 배터리 부품(소재) 요건을 완화해 줄 것을 미국 통상 당국에 요청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KAMA)는 우리 정부도 수입산-국산 전기차 차별없이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는 만큼 한국산 전기차가 세제혜택 대상국에 포함될 수 있도록 인플레이션 완화법의 개정을 요청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미국 하원에 전달했다.
인플레이션 완화법은 까다로운 지원 조건으로 인해 현대차그룹뿐 아니라 다수의 완성차 업체들을 지급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어 미국 정부당국을 향한 적극적 로비가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공산이 크다.
경제전문지 포천은 현재 미국에서 판매되는 전기차 가운데 북미에서 생산되는 전기차는 약 30%에 그치며 배터리 소재 조달 조건을 충족하는 차량은 사실상 없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에 GM과 포드, 테슬라 등 이미 미국에서 전기차를 생산하고 있는 기업들조차도 인플레이션 완화법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허원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