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과 중공업도 국내에서 안주하지 말고 글로벌 기업으로 커가야 한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2012년 4월17일 삼성그룹의 건설중공업 사장단과 오찬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이 회장은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 삼성물산 건설부문, 삼성테크윈 등 건설중공업 계열사 사장단으로부터 글로벌 비즈니스 육성방안을 보고 받고 삼성전자처럼 키우라고 주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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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이 회장은 당시 시너지에도 기대를 보였다. 세계적시공능력을 갖춘 삼성물산과 조선 역량이 있는 삼성중공업, 육상 플랜트에 강점을 보유한 삼성엔지니어링, 플랜트 장비를 만드는 삼성테크윈이 각각의 역량을 강화하면서 협업해 발전 플랜트와 해양 플랜트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를 요구했다.
이 회장은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직전 다른 방식으로 삼성중공업에 애정을 표시하기도 했다.
한 달 앞서 세월호 침몰사고가 터졌고 삼성중공업 크레인이 구조활동에 동원됐다. 이 회장은 삼성중공업의 크레인이 사고현장에 도착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안타까움을 나타내면서도 위기상황을 지원하는 데 자부심도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조선사 구조조정의 회오리에 휘말린 삼성중공업을 구하는 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까?
삼성그룹의 건설과 중공업이 위기라는 말은 어제오늘 나온 말이 아니다. 하지만 삼성중공업이 구조조정 대상에 오르며 채권단에 자구안까지 제출한 점은 삼성그룹으로서 굴욕적 상황일 수밖에 없다.
삼성중공업은 지난 17일 밤 늦게 주권은행인 KDB산업은행에 구조조정안을 제출했다. 삼성그룹 역사에서 계열사가 채권단에 구조조정안을 낸 것은 삼성자동차 이래 17년 만에 처음있는 일이다.
삼성중공업은 재무구조 개선과 유동성 확보를 위해 인력감축, 임금동결 및 삭감, 도크 폐쇄, 비핵심 자산 매각 등의 내용을 담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미 업계에서 예측한 수준인 것으로 보인다.
금융당국과 채권단이 이번 구조조정안에 어떤 결론을 낼지는 이달 말경 윤곽이 드러난다. 현재 삼성중공업의 금융권 총 위험노출액(익스포져)은 산업은행이 1조 원, 수출입은행이 4조3000억 원이다. 우리은행과 신한은행, KEB하나은행 등 시중은행도 1조 원 이상 물려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금융당국과 채권단 일각에서 삼성중공업의 위기에 최대주주인 삼성전자를 비롯해 삼성그룹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이재용 부회장이 결단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오고 있다.
이동걸 산업은행장도 한 인터뷰에서 “삼성중공업의 문제는 이재용 부회장이 어떤 결정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며 "다른 조선사들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삼성중공업 유동성 위기를 심각하게 보고 있으며 계열사 위기에 대주주도 어떤 형태로든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라고 주문한 것으로 해석된다.
삼성중공업은 삼성전자가 지분 17.6%를 보유해 최대주주이며 이밖에 삼성생명, 삼성전기, 삼성SDI, 삼성물산, 제일기획 등이 소유한 지분을 포함하면 삼성그룹 지분이 24.1%에 이른다. 이재용 부회장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지분은 없다.
김종중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사장은 18일 삼성 수요사장단회의에 참석하면서 삼성중공업과 관련한 질문에 “삼성중공업에 물어보라”고 말을 아꼈다. 삼성중공업 구조조정 이슈가 삼성그룹 전체로 확대되는 데 대해 부담스러워하는 기류를 보여준 셈이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삼성중공업이 자구안을 제출했고 채권단이 이에 대해 결정을 내릴 것이며 그룹 차원 지원은 검토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채권단이 삼성중공업 구조조정안을 물리칠 가능성은 현재로서 낮은 것으로 점쳐진다. 그러나 최근 조선해운 구조조정과 관련해 변죽만 요란하게 울릴 뿐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점은 채권단에게 부담이다.
업계 관계자는 “금융당국과 채권단은 최대주주 고통분담을 직간접적으로 요구했으나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있다”며 “직원들과 협력업체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대주주는 봐주는 꼬리자르기식 구조조정으로 끝날 우려도 나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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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 |
구조조정 칼자루를 쥔 산업은행은 국책은행이다. 정부와 여론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그룹의 지원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수준에서 이뤄진다면 채권단이 유동성 지원이나 상환유예 등의 결정을 내리는 데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자구안에 삼성그룹 차원의 유상증자 계획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엔지니어링이 자본잠식에 이르자 유상증자로 탈출을 꾀할 때 주식을 사는 방식으로 사재를 출자했다.
삼성중공업 자구안에 유상증자 방안이 포함되고 이 부회장이 삼성엔지니어링 경우처럼 개인지분을 얼마간이라도 소유하게 된다면 회생 가능성에 대한 긍정적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삼성그룹 관계자는 “삼성엔지니어링은 자본잠식을 당해 회사를 살리기 위해 이 부회장이 유상증자 참여를 결정한 것이고 삼성중공업은 상황이 다르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이 최대주주 삼성전자 등 계열사를 동원해 지원에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외국인 주주들이 부실계열사 지원을 곱게 볼 리 없기 때문이다.
삼성중공업 구조조정 사태는 이 부회장에게 개별 회사의 회생에 국한하지 않고 삼성그룹 사업재편의 밑그림을 다시 그려야 하는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