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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녕의 중국기업인 탐구] 화웨이 런정페이(1) 인민해방군 출신 기업인

노녕 기자 nyeong0116@businesspost.co.kr 2022-03-03 1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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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에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이 나온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험할 일이 없다는 의미이다.

중국 기업은 세계무대에서 다방면에 걸쳐 우리 기업과 경쟁하고 있다. 이들과 맞서기 위해서는 이들을 더욱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 기업이라도 이들을 이끄는 핵심 인물들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우리기업의 경쟁상대인 중국 기업을 이끄는 인물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경영전략과 철학을 지니고 있는지 집중적으로 탐구해 본다. <편집자주>

노녕의 중국기업인탐구-화웨이 런정페이
[1] 중국 인민해방군 출신 기업인
[2] 화웨이 러시아시장 위기를 기회로 
[3] 무선통신 시대 개막에 본격 성장
[4] 중국과 미국 갈등 속 생존의 길 찾다

런정페이가 1987년 광둥성 선전시에 설립한 화웨이는 2013년에 처음으로 경쟁사인 스웨덴 에릭슨을 넘고 세계 1위 통신장비업체로 성장했다.

중국 내수시장 중심의 사업 확장을 시작으로 러시아 등 우방 국가를 먼저 공략해 글로벌 시장을 넓혀간 것이 성공의 비결로 꼽힌다. 
 
[노녕의 중국기업인 탐구] 화웨이 런정페이(1) 인민해방군 출신 기업인
▲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

화웨이는 통신장비사업 성장에 힘입어 스마트폰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곧 중국 1위, 세계 3위 스마트폰 제조사로 성장했다.

그러나 2018년 미국 트럼프 정부는 화웨이가 수출하는 5G 장비가 중국의 스파이 활동에 이용될 수 있다고 우려해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동맹국에 화웨이 장비를 이용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스마트폰사업도 화웨이가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등 미국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강력한 제재 영향으로 중국 정부가 운영하는 컨소시엄에 매각하게 됐다.

런정페이가 중국 정부와 특수한 관계가 있는 인민해방군 출신 기업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며 화웨이의 보안 논란에 불을 지핀 것으로 분석된다.

◆ 문화대혁명 시대, 런정페이 군인으로 이끌어

런정페이는 1944년 10월25일 구이저우성 안순에 위치한 작은 산골 마을에서 7남매 가운데 첫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시골 중학교 교사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다.

런정페이는 학구열이 높았던 지식인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은 사람도 흔하지 않던 시절에 대학교까지 진학했다.

1963년에는 훗날 충칭대학에 합쳐진 충칭건축공정학원에 입학했다. 런정페이는 대학을 다니면서 컴퓨터 전자, 디지털 기술, 자동 제어 등 전문 기술을 독학했고 3가지 외국어도 혼자서 공부했다. 

그의 졸업 1년을 앞두고 중국에 문화대혁명이 시작됐다.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마오쩌둥이 주도한 사회주의운동이다. 중국의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기도 한다.

마오쩌둥은 전근대적 문화와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더 확고히 다져 사회주의 문화를 새롭게 세우려 했다.

당시 마오쩌둥 선동에 휘말린 청소년집단 홍위병은 자신의 선생님을 집단 폭행하고 지식인과 과학자, 교수를 사설감옥에 가두고 감시하며 학대했다. 런정페이의 아버지도 피해자다.

런정페이는 대학 졸업 뒤 인민해방군에 지원해 인프라공정병사단의 엔지니어가 됐다. 가장 처음 맡은 임무는 새로 짓는 화학섬유공장에 채울 설비를 연결하고 점검하는 것이었다. 

그는 인민해방군에 지원한 이유를 두고 2019년 모바일월드라이브와 인터뷰에서 “내가 입대할 때 문화대혁명으로 시대가 혼란스러웠다. 공업과 농업 활동은 중단됐고 중국인들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국은 중국인 모두가 새로운 옷을 입게 하기 위해 프랑스의 최신 화학섬유 설비를 수입해 대형 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하지만 공장 부지는 지리적 조건이 좋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고 공장 건설에 지원하는 사람도 없었다. 당국은 군대를 이 건설 현장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특히 화학섬유 설비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작은 기구 하나를 개발한 것이 그의 미래에 큰 영향을 줬다.

◆ 전 아내의 도움과 화웨이 설립까지

런정페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전 아내인 멍쥔과 결혼이다. 두 사람은 대학 캠퍼스에서 만나 졸업한 해인 1967년 식을 올렸다. 

런정페이는 공부만 하는 가난한 집안의 청년이었지만 아내 멍쥔은 집안배경과 학교성적이 모두 좋았던 사람이다. 멍쥔의 아버지는 당시 쓰촨성의 전 부성장으로 지역에서 상당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노녕의 중국기업인 탐구] 화웨이 런정페이(1) 인민해방군 출신 기업인
▲ 런정페이 인민해방군 군인 시절.

아내의 집안 배경이 런정페이가 대학 졸업 뒤 인프라공정병이 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그 시대에는 고급 정부기관의 기밀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곳을 제외하면 인프라공정병만이 대놓고 기술을 연구하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군복을 벗은 뒤에는 아내와 함께 선전난하이석유그룹에 배정 받았지만 아내는 본사 고위직으로, 런정페이는 산하 자회사의 부사장으로 옮겨졌다. 

1987년 런정페이는 회사돈 200만 위안(3억8천만 원)을 손해보는 실수를 저질렀다. 당시 도시 사람의 인당 월급이 100위안(1만9천 원)도 안됐던 것을 감안하면 큰 손해를 끼친 것이다.

런정페이는 전액 배상이라는 짐과 함께 회사에서 쫓겨났다.

같은 해 아내와 이혼하게 됐고 집에는 챙겨야할 퇴임한 부모님과 두 명의 자녀, 여섯 명의 동생들이 줄줄이 있었다.

런정페이가 화웨이를 세우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로 이뤄졌다. 퇴사 뒤 알고 지내던 지인 한 명이 런정페이에게 전화기에 사용되는 교환기를 팔아달라고 부탁하자 세운 것이 화웨이였다. 그해 중국 나이 44세였다.

런정페이의 첫 번째 아내였던 멍쥔은 재혼하지 않고 혼자 생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둘 사이에 태어난 첫째 딸 멍완저우는 현재 화웨이의 부회장이자 최고재무책임자를 맡고 있다. 막내아들 런핑은 화웨이 자회사에서 임원직을 맡고 있다.

1994년 런정페이는 지금의 아내 야오링과 재혼해 슬하에 늦둥이 딸 하나를 두고 있다. 이름은 야오안나이다. [비즈니스포스트 노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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