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라면업계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크게 우려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소맥(밀)과 옥수수의 주요 수출국으로 이들 국가의 수출이 제한돼 원재료 가격이 뛰면 지난해 8월 단행한 가격인상 효과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25일 국내 라면업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치솟고 있는 국제 곡물가격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두 국가에서 주로 수출하는 소맥은 사료용으로 쓰이고 라면에는 대부분 미국산과 호주산 소맥이 쓰인다.
하지만 사료용 소맥은 대개 판매 당시의 가격에 따라 수입선이 유동적이다. 결국 공급난으로 인해 미국이나 호주에서 생산하는 소맥의 가격도 증가하면서 전체 소맥 가격이 급등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식품 원재료는 생산지가 여러 곳으로 거래선을 다변화할 수 있어 생산 차질로는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공급량에 따라 가격 변동에 함께 영향을 받게 된다.
다만 라면업체에 따라 영향을 받는 시기는 다를 수 있다.
삼양식품은 제분업체를 계열사로 두고 있어 소맥 가격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삼양식품 관계자는 “최소 3개월가량의 소맥 재고가 있어 이번 사태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시기는 3~4월로 예상하고 있다”며 “라면에 쓰이는 소맥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수입하는 물량은 아니지만 국제 시세의 영향을 받게 돼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뚜기와 농심은 재고량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아직까지 제분업체의 가격인상이 가시화되지 않아 가격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고 밝혔다.
농심 관계자는 "국내 제분업체를 통해 납품을 받기 때문에 아직 직접적인 영향이 나타나지 않은 상황이다"며 "여러 곳에서 납품을 받고 있어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식품업계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의 여파로 인한 곡물 가격의 급등세가 단기간에 그칠 수 있다는 시각도 나온다.
2014년 크림반도 사태의 경우 러시아가 침공하기 직전 시작된 곡물가격 상승세는 2개월로 한정됐다. 이 기간 소맥과 옥수수 가격은 각각 20%, 10%씩 상승했다.
만약 이번 사태가 장기화되면 국제 밀 가격은 더 오를 수 있다. 이미 이집트 등 밀 수입 비중이 높은 다른 나라에선 밀 가격 폭등 조짐도 보이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제사회의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정상화 되더라도 최근 물류 차질과 기후변화로 인한 작황 악화까지 겹치면 원재료 가격 부담은 더 심화될 수 있다.
물류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국제유가도 계속 오르고 있다. 이날 서부텍사스산 원유 선물가격은 장중 한때 9% 넘게 오르며 배럴당 100.54달러를 보이기도 했다. 서부텍사스산 원유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를 넘긴 것은 8년 만이다.
또 지난해 남미에 가뭄이 심해진 여파로 세계 1위 대두 재배지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모두 대두 작황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생산난이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농무부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소맥 수출국가 가운데 각각 세계 1위와 4위로 전세계 소맥 공급량의 28.3%가량을 책임지고 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곡물 수출도 중단될 수 있어 원재료 가격인상의 우려를 더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 호주 등 주요 서방국가들이 강력한 경제 제재를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24일 기준 시카고옵션거래소(CBOE)에서 밀은 2012년 이후 10년 만에 최고치인 부셸당 9.34달러를 기록했다. 대두(콩)가격도 9년 이내 최고치인 부셸당 16.97달러를 기록했고 옥수수 가격은 8개월 만에 최고치인 7.13달러로 올랐다.
이처럼 원재료 가격이 출렁이는 가운데 국내 라면업계에서는 당분간 사태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라면업계는 이미 지난해 7~8월 제품 가격을 한 차례 인상했다. ‘착한가격’을 내세우던 오뚜기가 13년 만에 가격인상을 결정한 이후 농심과 삼양식품, 팔도 등이 잇달아 가격인상 행렬에 동참했다.
라면업계에서는 가격인상 효과가 지난해 4분기부터 본격화했는데 올해 1분기가 지나기도 전에 다시 원재료 가격이 오르면 효과를 제대로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번 사태로 원재료 가격이 다시 크게 오르더라도 라면업계는 가격인상을 결정하기 어려운 처지다.
오뚜기 관계자는 "지난해 8월에 제품 가격을 13년 만에 올렸는데 그것도 원재료값 인상 부담을 계속 감당해오다 올린 것이다"며 "가격인상 시점이 얼마되지 않은 만큼 당분간은 가격인상을 계획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해상운송비용과 물류비 등의 부담이 커져 외식과 주류 가격 등 생활 전반에서 물가가 오르고 있다. 이 때문에 대표적 서민식품으로 꼽히는 라면은 사실상 가격인상이 불가능한 셈이다.
이경신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를 두고 "공급 차질로 인한 단기 가격 상승 리스크가 확대될 것이다"며 "음식료업체의 원가 부담 가중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바라봤다. [비즈니스포스트 정혜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