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3조 원을 내걸고 비츠일렉트로닉스 인수에 뛰어들었다. 애플이 지금까지 추진했던 인수합병 중 가장 큰 규모다. IT업계 전문가들은 쿡 CEO가 애플의 상징이었던 스티브 잡스 전 최고경영자의 그림자를 떨쳐내려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혁신없이 안정을 택했다는 점에 염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 비츠일렉트로닉스 인수, 애플이 사들인 첫 유명 브랜드
애플이 헤드폰 제조 및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츠일렉트로닉스’ 인수를 추진 중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이 9일 보도했다. 애플은 인수가격으로 32억 달러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
|
|
▲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 |
비츠일렉트로닉스는 유명 힙합가수 닥터 드레(본명 안드레 영)와 음악 프로듀서 지미 로빈이 2008년 설립한 회사다. 수영선수 박태환도 애용한 고가의 ‘비츠 바이 닥터 드레’ 헤드폰 판매로 유명하다. 올해 1월부터 1개월마다 약 10 달러를 내면 무제한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비츠뮤직’도 제공하고 있다.
비츠일렉트로닉스는 애플이 처음으로 인수를 시도한 유명 브랜드 기업이다. 지금까지 애플의 주요 인수합병 대상은 소규모 회사였다. 지난 18개월 동안 쿡 CEO가 사들인 24개 회사도 모두 소기업들이었다.
IT 전문가들은 쿡 CEO가 비츠일렉트로닉스를 통해 애플의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사업을 키울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제음반산업협회(IFPI)는 지난해 말 스트리밍 서비스시장 총 매출은 11억 달러에 이른다고 밝혔다. 2012년에 비해 규모가 50% 이상 커졌다.
반대로 애플이 ‘아이튠즈’를 내세워 강세를 보이던 음악 파일 다운로드시장은 정체상태다. 지난해 다운로드시장 총 매출은 전년 동기와 비교해 3% 줄어든 39억3000만 달러였다. 감소폭은 적지만 2003년 아이튠즈 출시 후 처음으로 매출이 줄어들었다.
애플은 2009년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기업 ‘랄라’를 인수해 양쪽 시장에서 모두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아이튠즈 라디오’를 내놓기도 했다. 비츠일렉트로닉스 인수는 쿡 CEO가 스트리밍 서비스에 좀 더 힘을 싣겠다는 뜻을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쿡 CEO는 비츠일렉트로닉스의 인지도를 얻게 된다. 이 회사에서 만든 헤드폰 비츠 바이 닥터 드레는 여러 인기 연예인들이 착용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관련 업계 전문가들은 쿡 CEO가 비츠일렉트로닉스의 유명세를 이용해 아이폰 등 기존 애플제품과 연계된 이미지 마케팅을 펼칠 것으로 보고 있다.
◆ 팀 쿡, 공격적 경영으로 잡스와 차별화 나서
이번 일로 쿡 CEO는 전임자인 잡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공격적 경영행보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그는 잡스가 남긴 유산을 관리하는 데 치중했다. 그러나 ‘혁신’을 요구하는 시장을 만족시키기 위해 과감한 인수합병에 나선 셈이다.
2011년 취임한 쿡 CEO는 전임자인 잡스와 비슷한 경영기조를 유지해왔다. 잡스 전 CEO는 “회사가 거대해지면 직원은 물론 경영자조차도 주요사업과 제품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많아진다”며 인수합병을 부정적으로 평했다.
잡스의 자리를 이어받은 쿡 CEO도 소극적 태도를 유지했다. 기업평가회사 무디스의 리차드 레인 애널리스트는 “애플은 그동안 인수합병에 매우 신중했다”며 “지난 4년간 10억 달러 이상을 인수합병에 투자한 기억이 없다”고 전했다.
|
|
|
▲ 스티브 잡스 전 애플 최고경영자(CEO) |
그러나 쿡 CEO는 이번 비츠일렉트로닉스 인수에 예상보다 훨씬 많은 돈을 제시했다. 지난해 9월 사모펀드 칼라일그룹이 같은 회사에 투자를 결정했을 때 관계자들은 기업가치를 10억 달러로 추정했다. 쿡 CEO는 이보다 3배가 넘는 인수가격을 내놓은 셈이다.
IT 전문가들은 쿡 CEO가 새로운 혁신요소를 찾기 위해 인수합병에 눈을 돌린 것으로 보고 있다. 애플이 기로에 서 있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애플의 첫 번째 혁신제품인 아이폰은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를 쓰는 스마트폰에 점차 시장을 빼앗기고 있다. 지난해 아이폰 시장점유율은 15%에 그쳤다. 79%까지 올라간 안드로이드에 밀리는 형국이다. 다른 주력상품 아이패드 매출도 계속 감소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쿡 CEO는 사업 다각화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아이워치’ 등 웨어러블기기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음악 스트리밍서비스는 물론 모바일결제 업계 진출에도 관심을 보였다.
비츠일렉트로닉스 인수로 쿡 CEO는 신사업 분야의 기술과 브랜드 인지도를 동시에 얻었다. 이는 그가 앞으로 추구할 사업다각화의 본보기와 같다. 지난달 월스트리트저널과 인터뷰에서 “어떤 것을 정말 잘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며 “우리의 목표는 최초가 아닌 최고가 되는 것”이라고 밝힌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인수합병을 본격화하면서 쿡 CEO는 주주들이 좋아할 만한 행보를 선택했다. 잡스 시절 애플은 현금 자산을 쌓는데 치중했다. 그렇게 모인 돈만 800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러나 쿡 CEO는 지난달 자사주 매입 규모를 전년보다 300억 달러가량 늘릴 것을 지시했다. 덩달아 주주배당금도 커졌다.
자신 외에 다른 유명 경영자들을 영입하는 것도 잡스 전 CEO와 다른 모습이다. 패션업체 버버리 CEO로 일하면서 주가를 3배 이상 올린 것으로 유명한 안젤라 아렌츠를 소매 및 온라인 매장사업 담당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이번에도 비츠일렉트로닉스의 기존 CEO인 지미 아이오빈과 닥터 드레가 애플경영에도 참가할 것이라는 예측이 잇따르고 있다.
업계 투자자와 전문가 일부는 쿡 CEO의 결정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포레스터의 제임스 맥퀴베이 애널리스트는 “스티브 잡스라면 이번 인수 협상을 했을지 알 수 없다”며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이는 애플 안에서 시대를 선도하는 제품을 만들 것을 강조했던 잡스 전 CEO와 달리 외부기업의 기술과 유명세에 의존하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잡스가 세상을 떠난 뒤 쿡 CEO가 사람들의 기대에 걸맞은 ‘혁신’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도 한몫했다.
오히려 애플이 비츠일렉트로닉스의 브랜드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투자전문매체 마켓워치는 “애플의 주주들은 인수합병이 아니라 내부적 혁신을 원한다”며 “애플은 외부가 아닌 자체 ‘DNA’를 통한 제품개발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