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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생전 모습 |
‘삼성 대 제일.’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통합법인 이름은 삼성물산으로 결정됐다.
삼성그룹 내부에서 통합법인명을 어느 쪽으로 정할지를 두고 고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두 이름 모두 삼성그룹의 역사에서 상징적 의미가 워낙 큰 탓이다.
‘삼성(SAMSUNG)’이란 이름은 글로벌시장의 브랜드 인지도에서 ‘제일’을 크게 앞선다. 또 둘 다 이병철 창업주의 정신이 담긴 이름이지만 삼성이 제일이란 이름보다 연대기에서도 앞선다.
삼성물산이 제일모직보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승계와 관련한 삼성그룹 내 계열사 지분율이 높은 점도 고려됐다.
◆ 삼성물산, 청과와 건어물 팔던 삼성상회에서 출발
삼성물산은 이병철 창업주가 1938년 세운 삼성상회에서 출발했다. 삼성상회는 청과물과 건어물을 파는 회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병철 창업주가 ‘삼성의 모체는 삼성상회’라고 주저없이 말할 정도로 명실상부한 모태기업이다.
삼성상회는 설립 10년 뒤인 1948년 11월 삼성물산공사로 이름이 바뀌었고 다시 1951년 오늘날과 같은 삼성물산의 이름을 얻게 된다. 당시 설립 자본금은 5천만 원이었다.
삼성물산이 국내 기업사에서 지닌 또 다른 의미는 1975년 국내 최초로 종합상사 1호로 지정됐다는 점이다. 삼성물산은 그해 말 주식시장에도 상장했다. 해외시장에서 발을 넓히며 1970~1980년대 대한민국 수출신화를 써낸 대표기업으로 성장했다.
삼성물산은 1995년 삼성건설과 합병해 지금처럼 건설과 상사부문 체제를 갖추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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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물산의 전신 '삼성상회' |
◆ 제일모직, 삼성식 '1등주의'의 뿌리
‘삼성’과 함께 ‘제일’도 삼성그룹 성장사에서 남다른 의미와 풍성한 이야기를 남겼다.
이병철 창업주는 제일(No.1)이라는 이름을 무척 좋아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크고 좋은 회사를 만들고 제일 똑똑한 인재를 불러모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이 줄곧 표방한 '1등주의'의 연원이기도 하다.
제일이란 이름을 붙인 회사는 1953년 설립된 제일제당과 이듬해 세워진 제일모직공업이다.
제일모직공업은 1976년 2월 제일모직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제일모직은 이 창업주가 1987년 작고하기 직전까지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려놓았을 정도로 애착을 지녔던 회사다.
삼성전자가 지금은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얼굴이 됐지만 과거 제일모직이 이런 역할을 맡았다.
이학수 전 부회장, 김징완 전 삼성중공업 부회장, 송용로 전 삼성코닝 사장, 유석렬 전 삼성생명 사장, 김인주 삼성선물 사장 등도 제일모직을 거쳐 삼성그룹의 실세로 부상했다.
삼성그룹이 소비재나 유통에서 전자 중심의 제조업으로 급성장하면서 ‘제일’이란 이름도 예전만 같지 못하게 됐다.
특히 제일모직과 함께 삼성그룹의 대표 계열사였던 제일제당이 2대 승계과정에서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의 장남인 이재현 CJ그룹 회장에 넘어간 뒤 제일이란 이름이 삼성과 동격에 놓이는 일이 눈에 띄게 줄었다.
제일병원은 삼성그룹에서 떨어져 나갔으며 결국 사실상 삼성그룹 안에서 제일모직과 제일기획 둘 만이 명맥을 유지해 왔다.
◆제일모직, 회사는 사라져도 이름은 남는다
제일모직 직원들은 9월1일이면 명함을 새로 찍어야 한다. 이들은 지난해 초반까지만 해도 삼성에버랜드라고 적힌 명함을 들고 다녔다.
제일모직이란 이름도 60여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다. 제일모직은 과거에도 계열사 합병과정에서 이름이 사라질 뻔한 위기를 여러 차례 넘겼다.
2013년 삼성에버랜드와 제일모직의 합병이 결정되자 존속회사 이름이 삼성에버랜드가 될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하지만 결국 삼성에버랜드가 제일모직의 사업부로 남는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지난해에도 이어졌다. 지난해 삼성그룹은 제일모직 패션부문과 삼성에버랜드를 합쳤다. 삼성에버랜드는 부동산과 레저사업을 품고 있어 제일모직 패션부문보다 훨씬 덩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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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 |
그런데도 제일모직이 회사이름으로 결정됐다. 당시에도 제일모직이 섬유나 의류를 연상시켜 리조트나 레저사업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았다. 삼성에버랜드가 제일모직을 입는 상황이 재연됐다. 삼성그룹이 제일모직이란 사명에 얼마나 애착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삼성그룹은 합병이 완료된 뒤에도 제일모직이라는 회사명을 보전할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 제일모직이란 이름이 삼성그룹의 사업재편 과정에서 다시 등장할 것이란 관측도 내놓는다.
제일모직 관계자는 "제일모직은 삼성그룹을 상징하는 기업명인 만큼 완전히 없애지 않고 보전조치하기로 했다"며 "추후 사업방향이나 회사사정에 따라 사용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 이서현, 제일모직 사명 부활시킬까
제일모직이 다시 회사명으로 부활한다면 이서현 사장이 이끄는 패션사업에서 명맥을 유지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이병철 창업주는 옛 제일모직 시절 직포, 방모, 염색 등 섬유사업과 기성복시장에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갤럭시’라고 하면 삼성전자가 만드는 스마트폰을 바로 떠올리겠지만 원래는 제일모직이 만드는 남성 신사복의 대명사였다.
지난해 기준으로 제일모직 패션사업부 임직원은 전체 4304명 가운데 1739명 가량이다. 전체 매출 5조1296억 원 가운데 1조8519억 원이 이 사업부에서 나왔다.
이서현 사장은 2012년 ‘에잇세컨즈’를 새로 내놓는 등 시대변화에 걸맞는 브랜드명을 선보이고 있지만 ‘갤럭시’나 ‘빈폴’, ‘로가디스’ 등 제일모직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브랜드도 여전히 버리지 않고 있다.
이 사장이 패션사업으로 독자경영에 나설 경우 회사이름으로 제일모직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진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