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최근 기업들 앞다퉈 각자대표제를 도입하고 있다. 사진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정명철 현대모비스 사장, 김수천 아시아나항공 사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뉴시스> |
국내 주요기업들이 최근 앞 다퉈 ‘각자대표 체제’를 도입하고 있다. 기업 규모가 커지고 사업부문이 복잡해지면서 대표이사 한 명으로는 효율적 경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각자대표는 단독대표와 공동대표의 장점을 모두 지니고 있다. 여러 명의 대표가 모두 단독대표와 같은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단독대표의 장점인 신속한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그러면서도 여럿이 책임을 나눠 단독대표에 집중된 권한에 따른 위험을 관리할 수 있다.
각자대표를 도입하는 기업들을 살펴보면 그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동거형도 있고, 전문경영인들끼리 사업부문을 나눠 맡기도 한다. 경영과 재무를 분리해 권한과 책임을 나눈 기업도 있다. 회사 형편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각자대표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 오너와 전문경영인 동거, 아시아나 박삼구-김수천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투톱체제는 오너 단독경영과 전문경영인 체제의 장점을 모두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기업들이 도입하고 있다.
오너 단독경영은 신속한 의사결정이 가능하고 강력한 리더십이 발휘될 수 있다. 하지만 혼자 모든 권한과 책임을 갖기에 위험부담도 그만큼 크다. 전문경영인 체제는 느리지만 어느 정도 합리적 의사결정이 가능하기에 위험부담은 오너경영보다 적은 편이다. 하지만 제한된 임기 안에 성과를 내야한다는 부담이 크다. 이 때문에 장기적 목표에 집중하기보다 단기적 성과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다.
투톱체제는 오너가 직접 경영하는 그룹 지주사나 핵심 계열사 등에서 주로 나타난다. 이들 회사는 그룹의 미래 전략 수립과 경영권 승계를 담당하는 ‘컨트롤타워’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전문경영인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대표적 사례가 현대모비스와 아시아나항공이다.
현대모비스는 지난 3월14일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정명철 현대모비스 사장 각자대표 체제로 변경했다. 지난해 12월 전호석 전 현대모비스 대표이사의 사임 이후 정몽구 회장의 단독대표로 바뀐 지 3개월 만의 변화다.
현대모비스는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의 핵심이자 사실상의 지주회사다. 따라서 정몽구 회장의 아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현대차 그룹의 경영권을 물려받으려면 현대모비스에 대한 지배력을 높여야 한다.
재계는 정몽구 회장이 정명철 사장을 임명해 오너 단독 경영의 부담을 줄이는 한편 승계에 필요한 사전 정지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몽구 회장이 경영권 승계에 집중하는 동안 정명철 사장이 기업 체질개선 등을 담당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아시아나항공도 지난 3월27일 주주총회를 열어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과 김수천 아시아나항공 사장 각자대표 체제를 도입했다. 아시아나항공을 맡고 있던 윤영두 대표이사는 상임고문으로 물러났다.
아시아나항공이 각자대표제를 도입한 배경에 박삼구 회장의 절박함이 자리 잡고 있다. 이번에 4년 만에 경영에 복귀하면서 책임경영을 통해 아시아나항공의 경영정상화를 달성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아시아나항공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간판이다. 지주사는 아니지만 이곳의 실적은 곧 그룹 전체의 실적과 직결된다.
동생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이 박삼구 회장의 경영복귀에 반발하고 있는 상황에서 실적개선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오너로서 경영에 참여하기 힘들다는 게 업계의 예상이다. 특히 올해 아시아나항공과 주요 계열사들의 워크아웃과 자율협약 종료일이 다가오면서 단기간 내에 실적을 내야 한다.
결국 박삼구 회장은 김수천 사장의 경영능력에 기댈 수밖에 없다. 박 회장은 김 사장과 각자대표제를 통해 책임을 나누는 한편 과거 에어부산의 성장을 이끌었던 김 사장의 능력이 다시 한 번 발휘되기를 바라고 있다. 김 사장은 2008년 에어부산 대표를 맡은 후 3년 만에 회사에 흑자를 안겨줬다. 에어부산은 2010년부터 올해까지 4년 연속 흑자행진을 이어오고 있다.
◆ 전문경영인 간 사업 부문 분담, 삼성전자 권오현-신종균-윤부근
기업의 규모가 커지고 사업 부문이 뚜렷하게 구분되면서 전문경영인들이 각 부문을 분담하는 유형도 있다. 각 부문별로 전문경영인을 대표이사로 임명해 책임경영을 이뤄내겠다는 의도다. 삼성전자가 대표적 사례다.
|
|
|
▲ 삼성전자와 LG화학은 모두 3인 각자대표제를 도입했다. 사진은 위 왼쪽부터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신종균 삼성전자 사장, 윤부근 삼성전자 사장. 아래 왼쪽부터 박진수 LG화학 부회장, 권영수 LG화학 사장, 박영기 LG화학 사장 <뉴시스> |
삼성전자는 지난해 3월 권오현 부회장과 신종균 사장, 윤부근 사장 3인 각자대표 체제로 전환했다. 권 부회장이 부품(DS) 부문을 맡으며 경영을 총괄하고 윤 사장과 신 사장이 각각 소비자가전(CE) 부문과 IT모바일(IM) 부문의 대표이사를 맡는 방식이다. 그 이전까지 권 부회장이 삼성전자의 전 사업부문을 총괄했다.
삼성전자는 각자대표제 도입에 대해 “대표이사에게 권한과 사업의 책임을 모두 줌으로써 사업 부문별로 책임경영을 완성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이미 2012년 말 사업을 지금의 세 개 부문으로 개편했다. 윤 사장과 신 사장은 대표이사로 선임되기 전부터 이미 각각 소비자가전 부문과 IT모바일 부문을 사실상 독립적으로 운영해왔다.
삼성전자가 3명의 각자대표를 임명한 것은 각 사업부의 규모가 급격히 확대됐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의 2012년 매출은 201조 원이다. LG그룹 전체 매출인 158조 원을 상회했다. 휴대폰을 담당하는 IM부문의 매출만 108조5천억 원이다. 이런 상황에서 권 부회장 단독대표 체제를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LG화학은 삼성전자보다 앞서 사업 부문별 각자대표 제도를 도입했다. LG화학은 2011년 말 석유화학사업본부와 정보전자소재사업본부, 전지사업본부의 3개 부문으로 사업을 나눴다. 2012년 3월 주총에서 박진수 부회장과 박영기, 권영수 사장을 대표이사로 각각 선임했다. 박진수 부회장은 CEO로서 LG화학을 총괄하면서 석유화학사업본부를 맡고 박영기 사장과 권영수 사장은 각각 정보전자소재사업본부와 전지사업본부를 책임지고 있다.
◆ 재무의 분리와 위상 강화, LG상사 이희범-송치호
각자대표들이 영업과 관리를 나눠 맡는 유형도 있다. ‘영업통’과 ‘재무통’이 각자 대표를 맡으면서 회사 경영을 책임지는 형태다. 이는 실적부진 등으로 유동성에 대한 불안이 높아진 기업에서 재무를 강화해 재무건전성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난 체제다.
이번에 각자대표제를 도입한 LG상사가 여기에 해당한다. LG상사는 지난 3월14일 주총을 열어 이희범 부회장과 송치호 부사장을 각자대표로 선임했다. 2010년부터 LG상사를 단독으로 이끌어왔던 하영봉 사장은 GS이앤알(구 STX에너지)로 자리를 옮겼다.
이 부회장은 정관계와 학계, 산업계를 두루 거친 ‘마당발’이다. LG상사는 다방면에 걸친 이 부회장의 경험과 화려한 인맥을 통해 국내 및 해외에서 영업력을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1972년 제12회 행정고시에서 수석 합격하며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제3대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을 맡았으며 2003년엔 제8대 산자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장관 임명 전엔 제7대 서울산업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면서 학계와 인연을 맺었다. 2013년 LG상사 고문으로 오기 전까지 STX그룹에서 에너지와 중공업, 건설 부문의 회장을 맡으며 재계와 인맥도 쌓았다.
송 부사장은 LG상사에서 경력을 시작한 ‘전문 상사맨’으로 재무 전문가다. 그동안 재경담당과 경영기획담당, 최고운영책임자(COO) 등을 맡으며 LG상사의 내부 살림을 책임져 왔다. LG상사 내부에선 송 부사장을 ‘독종’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관리업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 각자대표제를 도입한 이마트도 영업과 경영을 분리했다. 이마트는 지난해 12월부터 영업과 경영으로 사업부문을 나눴다. 허인철 전 사장이 영업부문을 총괄하고 김해성 사장이 경영부문을 총괄하게 됐다. 올해 초 허인철 전 사장이 사의를 표명함에 따라 현재 이갑수 부사장이 영업부문을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