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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선대회장 |
제일모직이 60년 역사를 뒤로 하고 사라진다. 31일 삼성SDI가 제일모직을 흡수합병한다고 발표했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숨지기 전까지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려놓을 만큼 애정이 각별했으나 이건희 회장을 넘어 이재용 부회장을 위해 삼성그룹 지배구조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삼성그룹은 삼성에버랜드에서 제일모직이라는 이름을 쓸 것을 검토하고 있다.
◆ 삼성 60년 역사 깃든 ‘모태기업’ 제일모직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생전 제일모직을 각별히 챙겼다. 그는 1938년 3월 대구에서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상회를 창업했다. 삼성상회에서 설탕, 섬유, 무역업을 시작하며 사업기반을 다졌다.
삼성상회의 3개 사업 분야는 이후 제일제당, 제일모직, 삼성물산으로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이들 기업은 삼성의 ‘3대 모태기업’으로 불린다. 이병철 회장은 1954년 9월 설립된 제일모직의 대표이사로 재직했다. 삼성그룹 계열사 중 유일하게 대표이사로 재직한 곳이다. 별세 전 1987년까지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제일모직은 우리나라 섬유산업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 섬유산업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모직은 수공업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국내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이병철 회장은 “누구나 저렴한 가격에 입을 수 있는 국산 양복지를 만든다”는 비전을 내놓았다. 대구에 섬유공장을 지어 ‘골덴텍스’를 생산했다. 이 골덴텍스는 큰 성공을 거둬 국내 시장의 70%를 차지했다. 모직의 원조인 영국에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병철 회장은 1956년 좋아했던 꽃인 장미라는 이름을 따와 서울 을지로에 ‘장미라사’라는 맞춤양복점을 열기도 했다. 이병철 회장은 해외출장을 갈 때마다 장미라사에 들러 정장을 몇 벌씩 맞춰 입고 가기도 했다.
창립 당시 제일모직의 임직원은 고작 49명이었고 연간 매출은 9100만 원이었다. 하지만 2013년 기준으로 제일모직은 임직원 3711명에 매출 4조1111억 원에 이르는 거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병철 회장은 1970년대 제일모직을 통해 의류 브랜드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한국의 첫 남성 기성복 브랜드인 댄디와 여성복 라보떼 등을 출시했다. 80년대 발라드 그린에이지 갤럭시 등의 브랜드를 선보였다. 이후 신사복 통합브랜드인 하티스트를 내놓았고, 폴로를 본따 캐주얼 브랜드 빈폴을 내놓는 등 국내 최고 의류업체로 자리매김했다.
제일모직은 1990년대부터 의류사업뿐 아니라 소재분야 영역에도 진출했다. 1989년 여수공장을 준공해 첨단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소재 사업을 시작했다. 1995년 '산업의 쌀 반도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자재료 사업이 차세대 유망사업으로 부각되자 제일모직은 반도체용 소재사업에도 뛰어들었다. 2002년 경북 구미 공장에 전자재료 양산기지를 세웠다. 반도체에 이어 2012년 스마트폰에 쓰이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를 생산체제를 구축했다.
지난해 9월 OLED 소재기업의 '대어'급인 독일 노발레드를 인수했다. 최종 인수금액이 3455억 원에 이르는 노발레드는 R&D인력이 60% 이상이며 출원 특허 수만 530건에 이른다. 이를 통해 삼성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 대만AU 중국BOE 등에 핵심재료를 공급하고 있다. 앞으로 삼성전자와 시너지를 발휘해 전자제품 전반에 OLED 소재 부문에서 영향력을 넓힐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제일모직은 의류 산업에서 섬유 소재로, 섬유 소재에서 반도체용 소재 사업으로 사업영역을 넓혀왔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그동안 직원들에게 “제일모직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사와 궤를 같이 한다”며 “변치 않는 도전과 변신으로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서달라”고 당부했다.
◆ 삼성에버랜드 품에 안긴 제일모직 패션부문
지난해 9월 제일모직 패션 부문이 삼성에버랜드로 넘어갔다. 인수가액은 1조500억 원이었다. 제일모직은 전자재료와 케미칼 부문 매출이 전체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등 이미 소재 기업으로 변모한 상태였다. 당시 패션 부문을 삼성에버랜드에 넘긴 것은 제일모직을 삼성SDI와 합병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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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서현 삼성에버랜드 사장 |
이서현 삼성에버랜드 패션부문 사장은 2002년 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부장으로 입사해 10년 동안 제일모직과 인연을 맺었다. 지난해 제일모직의 패션부문 매출은 1조7751억 원이었다. 이는 삼성에버랜드 매출 3조69억 원의 3분의1 수준에 이른다. 올해부터 삼성에버랜드에서 제일모직의 패션 부문이 최대 매출처가 되는 만큼 이 사장의 책임도 막중해 질 것으로 보인다.
삼성그룹은 삼성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있는 제일모직의 이름이 사라지는 데 대해 큰 아쉬움을 보인다. 이에 따라 제일모직이라는 이름을 삼성에버랜드의 패션사업부에서 넘겨받아 삼성에버랜드가 계속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제일모직 관계자는 지난해 12월 삼성에버랜드와 패션사업부문 양도 계약을 체결 당시 “빈폴 등 상표 브랜드뿐 아니라 제일모직이라는 상호도 제일모직이 계속 사용하지 않게 될 경우 삼성에버랜드로 이관해 사용할 수 있도록 계약내용에 포함시켰다”고 말했다.
삼성에버랜드 관계자도 31일 “에버랜드는 고유한 테마파크 브랜드로 존속시키되 사명을 변경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며 “제일모직을 사명으로 쓰는 방안도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렇게 될 경우 삼성에버랜드가 제일모직으로 이름이 바뀌어 삼성그룹을 지배하는 회사로 계속 남게 된다.
그러나 이미 삼성이라는 브랜드가 확립된 삼성그룹이 삼성에버랜드를 제일모직으로 바꿀 지는 미지수다. 제일이라는 브랜드와 삼성이라는 브랜드를 동시에 사용하는 방향으로 검토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전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