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윤영 KT 신임 사장(CEO)은 '정통 KT맨'이다. 수장이 바뀔 때마다 경영공백 사태를 빚는 KT 악순환을 끊을 적임자라는 평가가 나온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
[비즈니스포스트]
박윤영 KT 신임 사장(CEO)은 KT 출신이다. 이른바 '원래 KT'다.
참고로 KT 내부에선 임원들을 '원래 KT'와 '올레 KT'로 분류한다. 원래 KT는 KT 출신 임원, 올레 KT는 낙하산 내지 낙하산 CEO를 배경으로 외부에서 영입된 임원을 의미한다. 올레 KT는 KT 민영화 뒤 첫 '낙하산 CEO' 지적을 받는 이석채 전 회장 시절 만들어진 회사 브랜드 '올레(Olleh) KT'를 본 딴 것이다.
박 사장은 또 2023년 KT 기업사업 부문장(부사장) 시절 차기 CEO 후보 경선에 도전해 숏리스트(최종 3명 명단)까지 올랐다가 미끄러진 뒤, 물러나 지난 3년 동안 '백수'로 지냈다.
실용과 원칙을 중시하는 이재명 정부를 만난 덕에 KT CEO 후보로 선임되고, 취임하는 과정에서 정치권과 연결되거나 도움을 받지도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른바 '청와대 메시지'나 '책봉' 절차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정권 실세' 쪽이 메시지를 내지 않으면서 이사회와 노동조합(제1노조)이 제각각 행보를 보이거나 목소리를 내는 등 잠시 혼란스러운 과정이 있었지만, 덕분에 박 사장은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
뭔 소리냐고?
박 사장은 KT CEO로서 따로 뭔가를 챙겨줘야 할 대상도, 갚아야 '은혜'도, 거부하지 못할 부탁을 받을 일도 딱히 없다는 얘기다.
박 사장에게 '친정'은 KT다. KT를 잘 챙기는(회사 경영을 잘하는) 게 최고로 친정을 위하는 일이다. 또 KT 임직원을 재능과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에 잘 배치해 보람차게 일을 할 수 있게 하고, 임직원 일터와 가정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게 진정 친정을 위하는 길이다.
그는 최근 3년 동안 회사를 떠나 있었던 덕에 전임 최고경영자(
김영섭 사장)와 그의 측근들에게도 아무런 빚이 없다.
KT 전·현직 임직원들이 박 사장에게 거는 기대가 큰 이유이기도 하다. KT 전직 CEO 중에선 남중수·구현모 사장도 KT 출신이었지만, 남 전 사장 때는 KT 임직원들조차도 KT 출신 CEO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다. 구 전 사장은 전임자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비서실장과 경영지원부문장으로 전임자를 모시는 과정에서 '손에 묻힌 피' 때문에 임기 내내 사법리스크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박 사장은 지난 3월31일 정기주총과 이사회를 거쳐 정식으로 KT 대표이사(CEO)로 취임하자마자 바로 KT 조직개편 방향을 내놓고 임원 인사를 단행했다. 조직개편과 임원인사 폭이 전례 없이 컸지만, 뒷말이 거의 없다. 물론 '아직까지는'이다.
통신담당 기자로 KT를 35년 가까이 출입했지만, 새 수장 취임 뒤 임원 인사 뒷평가가 이렇게 조용한 적은 처음이다. 늘 '낙하산 인사' 내지 '친정 식구 챙기기' 등 논란이 일었던 것과 비교된다.
박 사장이 첫 조직개편과 임원인사를 하며 앞세운 '조직 개선 방향'도 눈길을 끈다. '단단한 본질로 대한민국 통신 종가의 위상을 회복하겠다'고 했다. 본질을 성장의 기반으로 삼고, 성장을 재투자해 본질이 강화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전임자들이 '탈통신'을 통한 성장을 외쳤던 것과 대비된다.
아직까지는 KT 안팎에서 "'원래 KT' CEO라 다르네"라는 평가가 많다.
KT 한 임원은 비즈니스포스트와 만나 "통신 문외한이 정치권을 등에 업고 '낙하산 CEO'로 내려와 엉뚱하게 탈통신을 외쳐 KT를 망가뜨리고, 아현동 통신구 화재와 지난해 해킹 사태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통신망 고도화 및 안정성 강화'란 본질을 외면해 KT에 대한 국민 신뢰를 훼손하길 반복했는데, 이번에는 달라질 것 같다고 말하는 직원들이 많다"고 전했다.
하지만 KT는 이번에도 수장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장기 경영공백' 사태를 피해가지 못했다.
임기가 올해 3월 정기 주총까지였던 김 전 사장은 지난해 8월 불거진 KT 통신망 해킹 및 무단 소액결제 사태로 연임 동력을 잃었고, 급기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청문회 과정에서 연임 포기 의사를 밝혔다.
이후 KT 이사회는 이사후보추천위원회를 구성해 차기 CEO 후보 공모에 나섰고, 연말 박 사장을 최종 후보로 확정했다.
박 후보는 즉각 '경영 인수위'를 꾸려 조직개편과 임원인사 준비를 서둘렀다. 김 전 사장의 연임 의사 포기에 따른 레임덕과 경영공백 상황에서 서둘러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박 후보는 지난 1월4일 언론과는 처음으로 비즈니스포스트 기자들과 오찬을 하며 "오늘 오후
김영섭 사장을 만나 임원 인사 방안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라며 "1월 하순쯤에는 임원인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김 전 사장 쪽과 의사 조율이 되지 않았다. 김 전 사장 쪽이 '사장 임기는 정기주총까지'라고 주장한다는 말도 들렸다. 김 전 사장이 현장 경영에 나서는 모습도 연출됐다. 조직 개편과 임원 인사는 하염없이 미뤄졌고, KT는 1월 말까지로 돼 있던 임원 계약기간을 3월 말까지 연장했다.
또 KT 그룹 내 주요 자회사 대표를, 일단 기존 대표로 정기 주총을 치른 뒤 임시주총을 통해 바꾸기로 했다.
김 전 사장의 행보를 두고 '몽니 부리기'라고 하는 등 비판이 많았지만, 원칙적으로 보면 옳은 행보를 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정기 주총에서 주주들의 승인을 받아야 비로소 이사 자격이 생기고, 대표이사 내지 최고경영자로 취임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주주 권익 차원에서 보면, 정기주총에서 주주들의 승인을 받는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대표이사 행세를 하는 행태가 비정상이라는 지적도 많았다.
어쨌든 박 후보는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 등 경쟁사들이 지난해 연말에 이미 조직개편과 임원인사를 끝내고, 경영전략을 개선해 내달리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가입자들이 빠져나가고 AI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지난 3월31일로 이런 상황은 끝났지만, 결과적으로 5~6개월의 경영공백 상황은 피할 수 없었다. 김 전 사장 시절 '올레 KT'들은 그 기간만큼 사실상 '놀면서 급여를 받는'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KT에 애정을 가진 '원래 KT'들은 자괴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만큼 KT는 경쟁에서 뒤처졌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 ▲ KT 서울 광화문 사옥 모습. KT가 '원래 KT' 박윤영 사장 체제에서 진정한 민간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연합뉴스> |
KT는 2002년 민영화 이후 CEO가 바뀔 때마다 레임덕과 경영공백에 시달렸다.
남중수 전 사장에서 이석채 전 회장으로 바뀌는 과정에서는 참여정부 시절 취임한 남 전 사장을 내쫓고 이 전 회장을 새 CEO로 앉히려는 시도와 반발이 일며 경영 공백 상태에 빠졌다. 이 전 회장에서
황창규 전 회장으로 바뀔 때는 이 전 회장의 사법 리스크 사태로 경영공백이 발생했다. 황 전 회장은 CEO 공석 상태에서 취임했다.
KT 경영공백 상황은 구현모 전 사장에서
김영섭 전 사장으로 바뀌는 과정에서도 발생했다. 당시는 차기 CEO 후보 선임 과정이 두번이나 엎어지며 정기 주총 때까지 CEO 후보를 확정하지 못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때문에 거의 반년 가까이 CEO가 공석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번에 김 전 사장에서 박 사장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또 5~6개월 경영공백 사태를 빚었다.
새 정권, 특히 보수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KT와 포스코 등 민간기업까지 '전리품' 취급을 하며 벌어진 사태란 분석이 많았다. 두 회사 모두 민간기업이지만, 보수 정권의 일부 실세들은 여전히 둘을 옛 '한국통신공사'와 '포항제철'로 간주해 CEO를 포함한 경영진 인사에 관여했다.
정권 실세가 직접 챙기기도, 선거 때 지지해준 정치 세력에 던져주기기도 했다.
KT가 이명박 정부 때는 김영삼 정부 인사들에게, 윤석열 정부 때는 이명박 정부 인사들에게 던져졌다는 분석이 많았다. 낙하산 KT 경영진이 소유한 법인카드로 등산이나 테니스 모임 뒷풀이 비용은 물론 '어르신 생신' 모임을 했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이석채 전 회장은 김영삼 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과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냈고,
김영섭 전 사장 때는 이명박 정부 출신으로 분류되는 인사들이 주요 보직을 차지했다.
박 사장 임기 역시 3년이다. 2029년 3월까지다.
지금까지 맥락대로라면, 혹시라도 박 사장이 3년 뒤 연임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면, 또 레임덕과 경영공백 사태를 빚을 수 있다. 정권이 바뀔 조짐이라도 있으면 경영공백 사태는 더 커진다.
KT 민영화 이후 수장이 바뀔 때마다 반복돼온 이 악순환을 이번에는 끊어야 한다. 앞서 끊어야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 그대로 '우주의 기운'이 박 사장을 돕고 있다. 빚도 은원도 없으니 거리낄 게 없다. 그가 결심하면 된다.
박 사장은 CEO 후보로 확정된 뒤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비즈니스포스트와 만나 나름 생각해둔 경영 철학과 비전을 공유한 바 있다(
[김재섭의 뒤집어보기] KT 차기 CEO 후보 박윤영이 말하는 'KT의 존재 이유'). 당시 박 후보에게 '3년 뒤 연임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연임은 하겠다고 해서 하는 게 아니라 임직원, 주주, 고객들이 원해야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사람 일은 모른다. 전임자가 그랬던 것처럼, 박 사장도 3년 뒤 연임 도전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질 수 있다.
또다시 레임덕에 따른 경영공백 상황을 피하려면 미리 대비해야 한다. 사람의 선의에 기대게 둬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 작업은 임기 초반에,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해야 힘을 받는다.
이번에 KT 수장이 바뀌는 과정에선 이전에 볼 수 없던 장면들이 연출됐다. 이사회와 노조가 움직였다. 이사회는 경영진의 인사권에 개입할 의사를 내비쳤고, 노조는 경영공백으로 조합원들의 일터가 허물어지는 것을 우려했다.
이전에는 정권 실세의 메시지에 눌려, 차마 내지 못했던 목소리고, 차마 못했던 행보였다.
더욱이 상법 개정으로 이사회는 책임이 더 커졌다. 노조 역시 일단 한 발을 뗀만큼 앞으로 같은 상황이 재현되면 더 큰 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크다.
수장이 바뀔 때마다 레임덕과 사법리스크 등에 따라 발생해온 경영공백 사태를 막는 장치 마련 역시 박 사장이 '깃발'을 들면, 이사회와 노조가 딴죽을 걸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앞서 KT 이사회는 핵심 고위임원 인사를 할 때는 사전에 보고를 하거나 승인을 받도록 규정을 바꿨다가 경영진 인사권을 침해하는 행보란 지적에 휩싸였는데, 비즈니스포스트는 긍정적 평가를 보탰다. 무엇보다 이사회가 움직였다는 점에 주목하고, 긍정적으로 봤다.
그동안 KT 이사회는 '낙하산 CEO'가 오고, 그가 측근을 데려다 핵심 임원 자리에 앉혀 회사를 망쳐도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카펫을 깔아주기까지 했다.
더불어 박 사장이 경계해야 할 상황도 있다.
KT는 박 사장 취임 뒤 첫 임원(상무 이상) 인사를 하면서 일부 자리를 외부 전문가로 채웠는데, 일각에서 이들의 영입 배경을 궁금해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기자도 '박 사장과 연결 지점이 안보이는데, 어떻게 영입된 거냐'는 질문을 여럿 받았다.
일부 질문자는 '대신고교'와 '참여정부' 등을 거론하기도 했다. 이재명 정부 실세로 꼽히는 인사가 박 사장의 대신고 동문이고, CR실장 내정자가 참여정부 청와대 행정관 출신이라는 점을 주목했다. 참여정부 청와대 행정관 출신의 모 언론사 인사 이름도 거론됐다.
KT가 외부 인사를 영입하거나 '뜬금포'로 보여질 수 있는 인사를 할 때는, 박 사장이 직접 또는 홍보실을 통해서라도 배경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자칫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거나 엉뚱한 프레임에 묶여 발목 잡히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KT는 2002년 민영화됐다. 당시 한국통신 통신사업 총괄 임원은 기자를 만나 "KT가 진정한 민간회사로 거듭나려면 30년은 걸릴 것"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전망을 내놨다. 결과적으로 그 전망이 맞아가고 있다.
올해로 민영화 24년째이지만, 수장이 교체될 때마다 레임덕에 따른 경영공백 사태를 겪는 등 진정한 민간기업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박 사장한테 달렸다. 숙제를 하지 않거나 처신을 소홀히 하다 발목이 잡히거나 하면, 결과적으로 KT는 민영화 뒤 30년이 지나도 진정한 민간기업으로 거듭나지 못할 수도 있다. 김재섭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