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희헌 기자 gypsies87@businesspost.co.kr2025-09-03 13: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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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사진)의 베팅 실패가 오히려 롯데그룹 유통 계열사들을 살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비즈니스포스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유통 계열사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베팅에 나섰지만 실패했던 사례들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는 시선이 나온다.
신 회장은 과거 롯데쇼핑의 이베이코리아 인수전, 롯데면세점의 인천국제공항 면세점 입찰 등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당시만 해도 경쟁력이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지만 수년이 흐른 지금, 오히려 과거의 실패가 득이 됐다는 분위기다.
3일 재계에 따르면 신동빈 회장의 보수적 판단이 롯데그룹 유통 계열사를 한숨 돌리게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는 이베이코리아(현 지마켓) 인수 실패다.
2021년 초만 하더라도 유통업계의 최대 화두는 이베이코리아를 누가 품에 안느냐였다. 이베이코리아는 2020년 기준으로 거래액 20조 원을 기록해 네이버와 쿠팡에 이어 국내 이커머스 시장에서 3위에 오른 거대 기업이었다.
20조 원이 넘는 거래액은 이베이코리아가 16년 연속 영업이익을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당시 유통업계의 라이벌인 신동빈 회장과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이 매물에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신 회장과 정 회장은 모두 이커머스 대응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신동빈 회장은 롯데온으로, 정용진 회장은 SSG닷컴을 이커머스 선봉장으로 내세웠지만 독자 플랫폼만으로는 쿠팡의 가파른 점유율 상승세에 제동을 걸 수 없었다.
이베이코리아 인수전은 당연히 후끈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베이코리아의 본사인 이베이가 매각 가격을 5조 원 이상으로 제시한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한 것이었다.
신동빈 회장 역시 그룹 수뇌부를 모아 놓고 이베이코리아 인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라고 주문했다. 강희태 전 롯데그룹 유통BU(비즈니스유닛)장 겸 롯데쇼핑 대표이사 부회장 역시 2021년 3월 열린 롯데쇼핑 정기 주주총회에서 이베이코리아 인수를 놓고 “충분히 관심이 있다”며 참여를 공식화했다.
하지만 롯데쇼핑은 인수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2021년 6월 돌연 이베이코리아 인수 포기를 선언했다.
가격이 발목을 잡았다. 신동빈 회장은 이베이코리아를 인수하기 위해 3조 원까지만 써낼 수 있다며 상한선을 제시했다. 이베이가 원한 5조 원에 크게 못 미치는 금액이다.
롯데그룹이 이베이코리아 인수전에서 발을 뺀 것은 롯데그룹과 신세계그룹 두 리더의 싸움에서 사실상 신동빈 회장이 패배했다는 의미로 이어졌다. 국내 이커머스 시장의 판도가 완전히 뒤바뀔 수 있는 시기에 신 회장의 리더십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부정적 평가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4년이 흐른 현재 시점에서 보면 이베이코리아 인수 포기가 신 회장에게 오히려 ‘신의 한 수’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정용진 회장은 3조4400억 원가량에 이베이코리아를 품에 안았지만 이후 성과를 전혀 내지 못했다. 이베이코리아의 이름은 이후 지마켓글로벌, 지마켓 등으로 바뀌었는데 이 회사는 2022년부터 현재까지 딱 한 차례를 제외하면 매 분기마다 영업손실을 봤다.
지마켓이 2022년부터 2024년까지 본 영업손실만 누적으로 무려 1649억 원이 넘는다. 사실상 지마켓이 신세계그룹의 아픈 손가락이 된 것과 다름없다.
신세계그룹은 결국 지마켓 인수 3년 반 만인 2024년 말 지마켓을 떼어내 중국 알리바바그룹과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방법을 추진하기로 하고 현재 이를 구체화하는 중이다.
롯데면세점의 인천국제공항 철수도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오히려 잘 된 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롯데면세점은 2023년 3월 발표된 인천국제공항 면세점 새 사업자 후보 명단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던 유일한 대기업 계열 면세사업자다.
▲ 롯데면세점은 과거 인천국제공항 면세점 입찰 실패로 22년 만에 인천국제공항에서 철수했지만 2년이 흐른 현재 시점에서 보면 오히려 승자가 된 모양새다. 사진은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인근 전경. <롯데물산>
당시 롯데면세점을 이끌던 김주남 전 대표조차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황했다는 뜻을 주변 임원들에게 전했을 정도로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고 한다.
롯데면세점 입찰 실패는 단순히 공항면세점 운영권을 놓쳤다는 점에 그치지 않았다. 롯데면세점이 인천국제공항에 면세점 자리를 잡은 지 22년 만에 철수하게 됐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면세업계에서는 공항에 매장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를 중요하게 평가한다는 점에서 롯데면세점의 인천국제공항 입찰 탈락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롯데면세점은 당시 “인천국제공항 면세점에서 나오는 매출 비중이 채 10%도 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펼쳤지만 사실상 면세업계 1위 자리를 내줄 위기에 몰렸다는 부정적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이 또한 2년여가 지난 현재 시점에서 평가하면 오히려 잘 된 일로 볼 수 있다.
롯데면세점이 빠진 자리에 들어갔던 신라면세점과 신세계면세점은 현재 인천국제공항 면세점 관련 임대료 탓에 수익성에서 고전하고 있다. 두 회사가 각각 부담해야 하는 인천국제공항 면세점 임대료는 각각 3800억 원, 3700억 원가량으로 적지 않지만 관광객의 소비 행태 변화 등 복합적 요인 탓에 이를 뒷받침할 만한 매출은 내지 못하고 있다.
두 면세점이 인천국제공항공사를 상대로 임대료를 최대 40% 깎아달라며 법원에 조정까지 신청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인천국제공항공사가 배임 가능성 등을 이유로 요청을 거부하면서 두 회사는 현재 공항면세점 철수 카드까지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롯데면세점은 분위기가 좋다.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 218억 원을 내며 면세업계 유일하게 흑자를 기록했다. 업계 분위기가 침울한 가운데 거둔 성과라 더욱 뜻 깊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