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는 자책의 근거가 아니라 미래에 어떻게 할지 즉 성찰을 위한 자료로 활용되면 충분하다.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얼마 전 비 오는 날, 아이가 걷다가 넘어져 콘크리트 바닥에 얼굴을 긁히는 상처를 입었다.
지금은 다행히 상처가 잘 아물었지만 당시에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속상했고, 아이 바로 옆에 있던 내가 조금 더 잘 대처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자책감이 들었다.
릴스나 쇼츠 같은 숏폼 영상에서는 아이가 큰 사고를 당할 뻔한 순간, 양육자가 놀라운 반응 속도로 아이를 구해내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래서였을까. 아이가 다친 상황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 나는 왜 쇼츠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대처하지 못했지?”
그때 옆에 있던 배우자의 대답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쇼츠에 나올 만큼 특별한 일인 걸? 그런데도 스스로에게 그런 기대를 하는 건 너무 가혹한 것 아닐까?”
내가 깨달음을 얻고 감탄하자 배우자는 웃으며 덧붙였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습니다요.”
평소 배우자에게 정신과 의사로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해준 적이 많았는데, 그 시간이 쌓이다보니 마치 인공지능(AI)처럼 배우자에게 그 대화가 탑재된 듯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했던 자책에는 우울로 이어지기 쉬운 두 가지 전제가 숨어 있었다.
하나는, 스스로가 언제나 이상적인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얼핏 겸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는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기대, 즉 지나친 자기애(narcissism)가 들어가 있는 관점이다.
다른 하나는, 어떤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곧바로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사고 방식이다. 나는 실수를 즉각적으로 자기 비난으로 연결하고 있었다.
물론 자책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실수했을 때 “아이고, 바보 같네” 하며 가볍게 스스로를 탓하기도 한다. 그 정도의 자책은 인간다움의 일부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일관된 방식이거나, 그 강도가 지나치면 우울감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럴 때 필요한 태도는 과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다.
다친 아이를 돌보는 지금의 상황에 집중하고, 앞으로 같은 일이 반복될 가능성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이다.
과거는 자책의 근거가 아니라 미래에 어떻게 할지, 즉 '하우(How)'를 위한 자료로 활용되면 충분하다.
여기서 자책과 성찰의 차이가 드러난다.
자책은 과거의 자신을 비난하면서, 미래를 대비할 힘마저 빼앗아간다.
반면 성찰은 같은 경험을 토대로 미래를 준비하게 만들어준다.
작은 차이 같지만, 한쪽은 자신을 무너뜨리고 다른 한쪽은 자신을 성장시킨다.
혹시 지금도 마음속에서 “나는 왜 그때 더 잘하지 못했을까?”라는 목소리가 너무 자주 들린다면, 이렇게 말해보기를 권한다.
“그때 잘하지 못하고 충분하지 못했을수도 있어. 중요한 건, 그 경험을 토대로 다음번에 좀 더 잘 해보려는 마음이야.”
이것이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머무르는 대신 바꿀 수 있는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이다.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여성학협동과정 석사를 수료했다. 광화문에서 진료하면서, 개인이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친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책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 '언니의 상담실', '출근길 심리학'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