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지난 7월18일 오전 9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2024년 하반기 통신이용자정보 및 통신사실확인자료 제공 등 현황 발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과기정통부는 104개 전기통신사업자로부터 정보·수사기관에 통신이용자정보(통신자료)와 통신사실확인자료(통화내역)를 제공하고, 통신제한조치(감청)를 협조한 현황을 반기별로 집계해 발표한다. 먼저 국회에 보고한 뒤 언론에 공표한다.
▲ 국가정보원 로고.
정보·수사기관의 과도한 정보·자료 요구나 통신제한조치 남용을 막기 위해서다. 이른바 국회 통제와 언론 감시를 통해 '빅 브라더' 출현을 막자는 취지에서다.
정보·수사기관은 국가정보원, 경찰, 검찰, 국군방첩사령부 등 전기통신사업법과 통신비밀보호법에 근거해 전기통신사업자에 정보·자료 제공과 통신제한조치 협조를 요청할 수 있는 국가기관을 말한다.
통신이용자정보는 말 그대로 이름, 주민번호, 전화번호, 주소, 사용자이름(ID) 같은 이용자 개인정보를 말한다. 정보·수사기관은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라 공문으로 전기통신사업자에 이런 정보 제공을 요청할 수 있다.
통신사실확인자료는 통화 시간, 통화 상대 전화번호, 인터넷 접속 기록, 발신 기지국 위치 정보 같은 통화내역 자료를 가리킨다. 정보·수사기관은 통신비밀보호법 기준과 절차에 따라 법원 허가를 받아 전기통신사업자에 요청할 수 있다.
통신제한조치는 음성통화 내용을 몰래 엿듣거나 우편·이메일·문자메시지 등의 내용을 몰래 엿보는 것을 말한다. 역시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라 법원 허가를 받아 우체국·전기통신사업자에 협조를 요청할 수 있다. 이 절차를 어기면 불법 감청, 즉 도청이 된다.
그동안 정보통신 분야를 담당하며 반기마다 해오던 대로 7쪽 분량의 보도자료를 꼼꼼히 살피는데, 마지막 쪽 '통신제한조치 협조'에 담긴 '전화번호 수 기준으로 전년 동기 2517건에서 2741건으로 224건 증가' 문구가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국가정보원 감청 협조 요청 건이 전년 같은 기간 2516건에서 2720건으로 204건이나 증가해, 중가분의 91%를 차지했다는 게 눈길을 끌었다.
매체 특성상 크게 다룰 꺼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언론이고 기자인 이상 정보·수사기관의 통신자료·통화내역 제공 및 감청 협조 요청 권한 오·남용을 감시하는 역할에 동참하는 차원에서 기사화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마침 다른 건 취재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고, 꽤 오랜 시간 통화했다. 이후 들은 내용을 동료와 공유하며 기사를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상의하는 과정에서 국정원 감청 협조 요청 증가 발표 내용을 기사화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을 깜빡 잊고 말았다.
이후 열흘 쯤 지났을 무렵, 평소 취재에 도움을 주는 정보인권단체 활동가로부터 '이 건 좀 살펴봐 달라'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문자메시지에는 과기정통부 보도자료가 첨부돼 있었고, 국정원 감청 협조 요청 건수가 추세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대목이 강조돼 있었다.
이 활동가는 2024년 1월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이관됐음에도 국정원의 감청 협조 요청 건수는 오히려 증가했고, 윤석열 정부 이후에는 통신 수단별 감청 협조 요청 통계가 사라진 사실을 짚으며, 왜 그런지를 언론이 취재해 기사화해줬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밝혔다.
이 활동가는 이어 "별다른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디지털 감시 문제를 추적하는 정보인권 활동가로써 아무래도 마음이 걸려 말씀드린다"고 덧붙였다.
이 활동가는 아울러 과기정통부를 향해, 정보·수사기관 감청 협조 요청 통계 양식을 윤석열 정부 이전으로 되돌릴 것을 촉구했다. 국회 정보위 소속 의원들을 향해서는 국정원장 상임위 출석 때나 국정감사 때 왜 유독 국정원 감청 협조 요청 건수만 증가하고 있는지 물어볼 것을 요청했다.
이 활동가는 "국정원 감청 협조 요청이 계절 상품도 아닌데, 왜 해마다 상반기 감청 협조 요청 건수가 하반기의 2배에 이르는지도 궁금하다"고도 했다.
문자메시지를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또한 현장기자로써 엄청 쪽팔렸다. '잊을 걸 잊어야지, 어떻게 그걸 깜빡 해? 너 기자 맞아?'라고 되뇌며 머리를 쥐어박았다.
기자 명함 반납할 때가 됐구나 싶기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언론은 이 건을 어찌 다뤘는지 찾아봤다. 아뿔싸, 수사기관의 통신이용자정보 요청 건수가 줄었다는 점을 주목한 기사만 몇 건 보였다.
그 활동가가 오죽 답답했으면 환갑 진갑 다 지난 늙은 기자한테 취재를 요청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나는 한겨레 정보통신 담당 기자로 30년 넘게 일하다 지난해 정년퇴직한 뒤 1년쯤 쉬고 지난 4월부터 비즈니스포스트 정보통신 담당 기자로 현장에 복귀했다.
고백하건대, 눈이 어두워지고, 귀는 멀어지며, 자주 방금 들은 것도 잊는다. 이에 보고 들을 때마다, 생각 날 때마다 바로 메모를 하고 있는데, 어떤 때는 방금 들었거나 본 것이 생각나지 않아 메모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기자는 시민을 대신해 권력자나 권력기관에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기사를 통해 감시하는 직업이라고 선배와 후배들한테 배웠다. 시민들의 임명을 받고, 당연히 충성해야 할 대상도 시민이다. 기자가 어떤 이유로던 제구실을 못하거나 안하면 1차적으로 시민들이 피해를 본다.
이번에는 내가 기자로써 제구실을 못했다. 나이 핑계로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다는 생각에 이렇게 반성문을 쓴다.
아울러 나 스스로에게 정신 차리라고 호통을 친다. 또 그러면 기자 명함 반납해 너 좋아하는 일 못하게 하겠다는 협박도 한다.
AI는 '더 강력한 빅 브라더' 등장 토양이 될 수 있다. 시민 편의와 권익 보호를 위해 국회는 통제, 언론은 감시 끈을 더욱 조여야 한다. 정보인권보호 활동가들에게 맡겨둘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