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오른쪽)이 어린 시절 소년공 이재명을 안아주는 합성 동영상의 한 장면. 이재명 지지자가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온라인 커뮤니티> |
[비즈니스포스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3일 밤 11시40분경 제21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될 것으로 확실시 되고 있다.
2022년 대선 패배 이후 본격화한 검찰 수사와 기소, 재판에서 정치적 생명이 위태로웠다. 실제 물리적 폭력이 자행되기도 했다. 이런 고비 고비를 넘었고, ‘계엄의 밤’ 국회 담장을 넘었고, 이제 국민은 그에게 '대한민국호'의 키를 맡겼다.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은 소년공으로서 중학교, 고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했다.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입학했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됐다.
개천에서 용이 났지만, 그는 다시 '낮은 곳'으로 되돌아갔다. 시민운동을 시작했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몇 번의 좌절 끝에 성남시장으로, 경기도지사로 몸집을 계속 키웠다.
유시민 작가는 그를 "발전도상인"이라 평가했다. 10년 전, 5년 전
이재명과 지금의
이재명은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가 걸어온 길은 지금의
이재명이 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결정적 3가지 장면을 뽑아봤다.
▲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의 어린 시절 소년공 모습(왼쪽), 2004년 성남의료원 심의보류 직후 눈물을 흘리는 이재명 당시 변호사. |
① 소년공에서 시민활동가로, 노무현 강연 듣고 사회에 몸 던져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은 경북 안동 산골짜기에서 가장 형편이 매우 어려운 집안의 9남매 가운데 일곱 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찢어지듯 가난한 집안 환경 탓에 그는 가족이 경기 성남으로 이주한 뒤 중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공장을 전전하는 소년공으로 살았다.
그는 자서전에서 “공장 생활 6년 동안 쇠붙이와 화공약품이 내 몸에서 이름을 얻는 동안 나는 이름조차 없던 소년 공돌이였을 뿐이다”고 회고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한 뒤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서울대 주요 학과에도 들어갈 수 있는 성적이었지만 장학금과 생활비를 주는 중앙대를 선택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면서 더 큰 꿈을 꿨다.
그는 웹자서전에서 “사법시험이라는 제도를 통해 변호사와 판사, 검사라는 사회의 한 주류계층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사법시험으로 또 한 번의 ‘신분상승’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1987년 사법연수원에 다닐 때 들었던 한 강연이 그의 삶의 궤적을 바꿔놓았다.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던 노무현 변호사의 강연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굳이 판사와 검사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구나’라는 생각과 ‘인권 변호사로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노무현의 강의를 듣고 떠올렸다”고 돌아봤다.
물론 시민활동가로서 살겠다는 결심은 오직 노무현 변호사의 강연 덕분인 것은 아니다. 그는 대학생 시절부터 사회에 어떤 방식으로든 기여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졌다.
대학교 4학년 때 어이없는 실수로 사법고시 2차 시험에 낙방한 뒤 1년의 재수 기간을 보냈는다. 이 당선인은 당시 실패 경험이 인생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기회였다고 돌아봤다.
자신이 당면했던 사춘기 시절의 고통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자 사회적 문제임을 알게 됐으며 자신에게 지워진 역사적 책임을 통감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4학년때 고시에 합격했으면 나는 분명 현직 판사나 검사를 선택했을 것이고 그 선택에 또 다른 핑계를 만들어 변명하여 그 선택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며 “그러나 나는 1년의 재수를 거쳐 고시에 합격한 뒤 변호사로서 사회운동에 참여하려는 생각을 거의 굳히게 됐다”고 술회했다.
사법연수원생 시절 썼던 본인 일기에도 역사와 민족이 노동자들이 핍박받는 모습을 보고 시민활동가로서의 삶을 살 것을 다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당선인은 결국 사법연수원이 끝난 뒤 짧은 안동 검사시보 생활을 마무리하고 1989년 성남시청 앞에 변호사로 개업하며 시민의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 1994년 발족한 시민단체 ‘성남시민모임’에 사무국 차장으로 합류했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에서도 활동했다.
2004년 있었던 ‘성남시립병원 설립 운동’은 시민활동가로서 활동하던 그가 정치에 뛰어드는 계기가 됐다.
그는 당시 성남시민 2만여 명의 동의를 받아 주민발의조례로 상정된 안건이 성남시의 여당인 한나라당의 반대 탓에 47초 만에 부결되자 시민들과 함께 강하게 항의했다.
이재명 변호사는 이에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고발돼 주민교회 지하 1층에 있던 1평 남짓한 기도실에서 약 5일 동안 수배생활까지 했다.
이 당선인은 교회 지하실에서 “정치를 해서 시민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자”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결국 성남시장에 당선된 뒤 1호 공약으로 성남시의료원을 건설했고, 2021년 10월 경기도지사에서 사퇴한 뒤에도 가장 먼저 성남시의료원을 방문했다.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23년 9월26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심사)을 받기 위해 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
② '수많은' 검찰 수사와 기소, 살해 위협에서 살아남아
이재명 당성인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검찰 수사와 기소에 정치적 생명이 끝날 위기를 수차례 겪었지만, 이 과정에서 정치적 체급을 키웠다.
그는 제21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모두 8개 사건으로 기소됐고 선거운동 기간에도 5개의 재판을 동시에 받았다.
단 한 건이라도 유죄 판결이 나온다면 대선 출마는켜녕 정치적 생명이 끝날 위기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를 향한 수많은 수사와 재판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그를 향한 지지층들은 더욱 강하게 결속했다.
앞서 경기도지사 시절에도 '요단강'을 건널 뻔했다. 검찰은 2018년 경기도지사 선거 당시 허위사실 공표한 혐의로 그를 재판에 넘겼고 실제 항소심 재판부는 그에게 당선 무효형인 벌금 300만 원 선고했다. 하지만 대법원이 2020년 7월 이를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하면서 살아 돌아왔다.
최대 위기는 2023년 9월이었다.
검찰은 그를 위증교사와 백현동 특혜 의혹, 대북송금 등으로 구속영장 청구했다.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단식 투쟁까지하면서 검찰 수사의 부당함을 알리고 동료 의원들에게 체포동의안 부결을 호소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안에서 나온 이탈표 탓에 체포동의안이 국회 문턱을 넘었다. 정치 인생의 최대 위기였다.
이 당선인이 대표 시절 오랜 단식투쟁의 후유증을 딛고 지팡이를 짚으며 영장실질심사을 위해 법원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그의 정치적 인생에서 최대 고비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보였다.
그러나 법원이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그는 또다시 되돌아왔다. 이 대표는 당시 사법부를 향해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사실을 명징하게 증명해 주신 사법부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도 고비가 있었다.
'골프 사진'을 둘러싸고 벌어진 공직선거법 사건을 두고 1심 재판부는 유죄에 집행유예 형까지 선고했다. 대선 출마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1심을 뒤집고 전부 무죄로 선고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대법원은 5월1일 전원합의체 심리를 통해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대법원은 대법관 12명이 모두 사건기록 6만 쪽을 나흘 안에 읽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서울고법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재판 일정을 대선 이후로 연기하면서
이재명 당선인은 대선 출마가 가능했다.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24년 12월3일 밤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국회로 향하는 차 안(왼쪽)에서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오른쪽은 이 대표가 국회 담을 넘는 모습. |
③ 계엄의 밤, 국회 담장 넘었다
이재명 대통령 당성인은 2024년 12월3일 밤 국회 담장 앞에 섰다. 사위는 어두웠고 어디서 군인들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은 이날 '난데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 당성인은 4월 내놓은 자서전 ‘결국 국민이 합니다’에서 당일 밤을 회상하며 “‘미쳤네’라는 외마디와 함께 ‘국회로’라는 세 글자만 급히 민주당 텔레그램 단톡방에 올렸다”고 말했다.
이 당성인은 아내인 김혜경씨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국회로 향하면서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들에게 알려야 했다”는 생각에 그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
이재명TV’에서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가슴에 화인처럼 새겨진’ 5·18 유가족 오열 모습과 함께 ‘광주시민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당시 긴급 호소 방송을 떠올렸다”며 “총칼로 무장한 군인들을 국회의원들의 힘만으로 어떻게 막겠는가.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어야 내가 체포되더라도 국민들이 내가 잡혀가는 장면을 볼 수 있지 않겠는가”고 말했다.
실제 그가 국회 담을 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유튜브를 통해 국민에게 전해졌다.
비상계엄 당시
이재명TV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약 107만 명이었지만 해당 방송은 지난해 12월4일 오전 기준 240만 회 넘게 조회됐다.
이 당선인의 월담을 비롯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일부 의원들의 집결 덕분에 국회는 가까스러 윤석열의 비상계엄을 해제했다. 이후 이 대통령은 “윤석열 대통령은 이제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니다”라며 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다.
비록 이후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 실패와 윤석열 체포 좌절, 헌법재판소의 탄핵 선고 지연, 윤석열 석방 등으로 정국 혼란은 지속됐지만 그는 6개월의 탄핵 국면에서 사실상 정국을 주도했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