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23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시민상' 시상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 CJENM > |
[비즈니스포스트]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한국문화산업의 대모로서 영향력을 다시금 전 세계에 알렸다.
그가 문화사업에 투신한 뒤 흐른 30년의 세월은 변방에 머물던 한국 문화가 각 나라 안방에서도 소비되는 보편적 문화로 도약하게 된 역사와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24일 재계와 문화계 안팎의 말을 종합하면 이 부회장이 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로부터 ‘세계시민상’을 받은 것은 그가 일군 문화적 성과가 단순히 문화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인류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인정받은 쾌거로 평가된다.
이 부회장은 23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이 개최한 제 13회 세계시민상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전하며 “문화는 비록 전쟁을 끝낼 수 있는 힘은 아닐지라도 인류에 대한 배려와 희망, 공감의 다리를 건설할 힘”이라며 “K-팝에서 K-드라마에 이르기까지 K-컬처는 세계 곳곳에서 문화적 장벽을 허물고 기쁨, 웃음, 사랑은 보편적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부회장과 함께 수상자로 시상대에 오른 인물들은 나나 아쿠포아도 가나 대통령,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등 각 나라의 최고 정치인이다. 세계시민상이 그만큼 무게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
이 부회장의 세계시민상 수상은 아시아 여성 기업인으로는 최초다. 한국인으로는 2017년에 상을 받았던 문재인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다.
이 부회장은 30년 동안 문화사업에 몸담으며 한국 문화를 세계화하는 데 힘써왔다. 오늘날 한류가 확산할 수 있는 토양을 닦은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영화산업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에서 CJ그룹의 영화사업을 진두지휘했다.
이 부회장이 문화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때는 1995년이다. 당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사 드림웍스에 3억 달러의 투자를 주도했다. CJ그룹 자산규모가 1조 원 안팎이던 시절에 과감한 투자를 결정한 것이다.
이 부회장은 세계시민상 수상소감에서 “1990년대까지 한국은 서구 콘텐츠의 문화와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고 CJ는 식품사업이 주력인 기업이었는데 동생인 이재현 회장과 나는 ‘지금까지는 사람의 입을 즐겁게 해왔으나 앞으로는 눈과 귀를 즐겁게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며 문화사업에 뛰어든 배경을 설명했다.
1997년에는 CJ엔터테인먼트(CJENM 영화사업본부의 전신)를 설립해 영화배급사업을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서울 광진구 강변테크노마트에 영화관 CGV 1호점을 내며 멀티플렉스 시대를 열었다.
이 부회장의 주도 아래 CJ그룹은 1천만 명 관객을 동원한 영화 ‘해운대(2009년 개봉)’ 이후 미국, 중국, 일본에서 직접배급사업을 시작하며 한국영화를 해외 시장에 선보이는 데 힘썼다. 2013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는 세계 167개 나라에 판매하는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영화 세계화의 한 획을 그었다.
그리고 2020년 ‘기생충(2019년 개봉)’이 칸 국제영화제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으며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이 부회장은 ‘기생충’의 책임프로듀서로서 작품 제작의 모든 과정을 세심히 살폈을 뿐 아니라 해외 문화계 인맥을 동원해 ‘기생충’의 글로벌 배급·유통을 지원하기도 했다.
▲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23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시민상' 시상식에서 샤리 레드스톤 파라마운트 회장과 나란히 서서 트로피를 붙들고 웃고 있다. 레드스톤 회장은 이날 시상식에서 이 부회장을 수상자로 소개하는 역할을 맡았다. < CJENM > |
아카데미 시상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인사들과 접촉하며 ‘기생충’에 대한 우호적 여론을 만드는 노력도 기울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성과를 내기까지 고난도 많았다.
영화사업에 뛰어든 초기에는 오랫동안 적자를 감내해야 했다.
2013년에는 박근혜정부 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찍혀 정치적 압력을 받기도 했다. 당시 정부와 여당 쪽에서 볼 때 CJ그룹에서 제작한 영화 ‘광해’, ‘변호인’, TV프로그램 ‘여의도 텔레토비’ 등이 정치적으로 편향됐다는 이유에서다.
이 때문에 이 부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2014년 미국으로 도망치듯 떠나야 했다.
한국 영화의 세계화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던 셈이다.
이 부회장은 음악 분야에서도 한국 문화 세계화에 힘쓰고 있다. K-팝 축제인 케이콘(KCON)을 론칭해 세계적 한류축제로 자리매김하는 데도 기여했다.
CJ그룹이 2012년부터 주최한 케이콘은 매년 미국과 일본에서 개최되고 있으며 비정기적으로 유럽, 중동, 동남아시아 등지에서도 열린다.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겠다는 집념과 의지는 CJ그룹의 미래 비전에도 반영돼 있다. CJ그룹이 2022년 내놓은 20조 원의 중장기 투자계획에서 4대 성장엔진 가운데 컬처분야에 배정된 액수는 12조 원으로 가장 많다.
이 부회장은 사업에 뛰어들기 전인 미국 유학 시절부터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할 때 외국 학생들이 한국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을 보며 문화에 관심을 품게 됐다고 한다.
그는 1년 반 동안 월급을 받지 않고 조교를 자원해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당시 가르쳤던 학생으로는 김용 전 세계은행 총재가 있다.
김 전 총재는 이 부회장의 세계시민상 시상식에도 참석해 “이 부회장은 한국 문화산업의 축복이며 이보다 더 적합한 수상자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전 총재는 “1980년대 중반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겠다는 이 부회장의 비전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이 부회장이 K-팝과 K-드라마를 비롯해 세계인이 열광하는 K-콘텐츠의 바닥을 다지고 길을 열었다는 것을 알게됐다”고 덧붙였다. 류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