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사장은 “SK이노베이션 계열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과거와 현재의 성과, 향후 전망, 수익성, 경쟁력, 리스크 측면에서 냉철히 평가해 이를 기반으로 제한된 자원을 토대로 배분 노력을 기울여 내실 있는 포트폴리오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어 “생존이 위협받는 글로벌 경영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체질 개선이 시급한 상황”이라며 “인풋 대비 아웃풋이라는 효율성 관점에서 전체적 전략 방향을 재점검하고 경쟁력 있는 강화방안을 도출하자”고 말했다.
그러면서 “구성원 모두가 나서 비효율적이고 낭비되는 것들을 찾아 개선하는 노력을 기울여달라”고 촉구했다.
이번 신년사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정유업계의 불확실성을 지적한 것으로 파악된다. 정유사는 원유를 구매하고 정제한 뒤에 판매해 남는 가격인 정제마진에 따라 매출에 크게 영향을 받는데 국제유가의 변동폭이 커지면서 정제마진의 불확실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30일(현지시각) 로이터에서 종합한 정유 전문 애널리스트 34명의 분석에 따르면 2024년 정유업계는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분쟁,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자발적 감산 등으로 불확실성이 계속 커질 것으로 나타났다.
애널리스트들은 석유수출국기구로 대표되는 산유국의 자발적 감산 조치는 국제유가에 내년 상반기까지 상승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입을 모았다.
2023년 11월 기준 석유수출국기구와 협력국들이 합의한 자발적 원유 감산량을 종합하면 일간 600만 배럴이 넘는다. 이는 세계 원유 생산량의 약 6%에 달하는 규모다.
나날이 고조되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과 홍해 위기 또한 정유업계의 불확실성을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31일(현지시각) 홍해 지역에서 작전 중이던 미 해군 항공모함 아이젠하워와 호위전단은 인근을 항해하고 있던 머스크 항저우호의 구조 요청을 받고 함재기와 미사일을 사용해 예멘 반군 10여 명을 사살하고 배 3척을 격침했다고 발표했다.
12월 국제유가는 이 같은 중동 위기의 긴장과 완화 소식에 지속적으로 등락을 반복했다.
국제유가는 15일부터 예멘 반군 후티(Houti)가 홍해를 지나는 선박을 공격할 것으로 발표하며 공급 불안이 확산돼 72달러 대로 급등했다. 가장 높이 올랐던 26일에는 75달러 대까지 올랐다.
28일에는 머스크와 CMA CGM 등 주요 해운사가 홍해 운항을 재개할 것이라는 소식에 원유 공급 불안이 줄어들면서 71달러대로 하락했다.
▲ 달러를 기준으로 했을 때 12월 국제유가 변동폭. 가장 큰 상승폭을 보인 15일에는 예멘 반군 후티(Houti)가 홍해를 지나는 선박을 공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큰 하락폭을 보인 27일에는 머스크와 CMA CGM 등 주요 해운사가 홍해 운항을 재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23년 3분기 기준 석유사업에 매출의 60%를 의존하고 있는 SK이노베이션으로서는 경영 불확실성이 확대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난해 3분기에는 경영 환경이 우호적이었다. SK이노베이션의 2023년 3분기까지 석유사업 부문 매출은 34조6726억 원, 영업이익은 9759억 원으로 집계됐다.
3분기 정유업 호황으로 3분기에만 1조1125억 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1분기에 영업이익 2748억 원, 2분기에 영업손실 4112억 원로 적자전환했던 것과는 대조되는 호실적이다.
그러나 4분기 경영환경은 SK이노베이션 석유사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특히 사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정제마진이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스탠어드앤푸어스(S&P) 글로벌에 따르면 2023년 4분기 복합정제마진은 10월 4달러 대까지 떨어졌다가 11월부터 11달러 선을 회복했다. 통상적으로 정제마진은 4~5달러를 수익 경계선으로 본다.
크플러와 CIBC 등 해외 에너지 관련 금융업체들은 석유수출국기구의 자발적 감산 상황 변화에 따른 공급 변동성이 원유 시장 불확실성의 가장 큰 요인으로 봤다.
레베카 바빈 CIBC 선임 트레이더는 2일(현지시각) 마켓인사이더를 통해 "석유수출국기구가 원유 공급을 제한할 수단이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곧 그럴 수도 있다"며 "그외에도 중국 경제 상황에 따른 수요 변화와 미국의 원유 생산량 증산도 불확실성을 가속화하는 요인"이라고 평가했다.
박 사장이 신년사에서 생존을 위협받는다는 강한 표현을 쓴 배경에도 이 같은 상황이 반영됐다. 미국과 중국의 국제 정치적 대립으로 세계 주요 시장 가운데 중국의 경기 침체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도 우크라이나 전쟁과 고금리 장기화로 경제적 여건이 좋지만은 못하다.
박 사장은 “올해는 초불확실성의 시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며 “미국과 중국 간 주도권 경쟁으로 인한 지정학적 갈등, 글로벌 시장 블록화 등 세계정세 불안정이 지속되고 글로벌 금융 시장에도 역풍이 불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결코 쉽지 않은 한 해가 되겠지만 SK이노베이션이 그동안 축적한 저력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SK이노베이션 계열사)가 가진 역량을 총결집시켜 생존력을 확보하고 본원적 경쟁력을 강화함으로써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박 사장은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에 대비해 선임됐다는 그룹 내외의 평가를 받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2023년 12월 박 사장을 총괄사장으로 발탁하며 “불확실한 경영환경 속에서 지속성장을 위한 내실 강화 및 성과 창출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박 사장은 SK네트웍스 사장으로 재임하던 시기 코로나 위기에 대응해 과감하게 사업을 개편하며 피해를 줄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코로나 위기가 절정에 달했던 2020년 SK네트웍스는 생활가전과 렌터카 등 임대업 위주로 사업구조를 재편했다. 2023년 기준 롯데렌터카에 이어 업계 2위를 차지하고 있는 SK렌터카도 이때 통합법인으로 출범했다. 손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