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국내 배터리업체들이 미국 정부의 중국배제 정책기조에 힘입어 북미 시장을 안마당으로 만드는 데 힘을 받을 것으로 전망됐지만 명확하지 않은 정책기조가 되레 불확실성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에 K배터리업체들은 북미 시장 내 생산능력과 기술적 우위 등 내재적 경쟁력을 바탕으로 외부 정책 환경과 무관하게 우위를 지킬 준비를 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 국내 배터리 셀·소재업체들이 북미 시장 공략 과정에서 미국의 정책적 불확실성에 직면해 시장 내 우위를 지키기 위한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19일 배터리업계에 따르면 국내 배터리업체들은 북미 시장의 정책 불확실성을 고려해 다양한 시나리오에 따른 대응방안을 마련해 두고 정책환경의 급격한 변화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서 보조금 제외 대상으로 분류되는 ‘해외우려집단’을 어떻게 규정할지는 현재 시점에서 배터리 관련 업체들이 안고 있는 중요한 불확실성으로 꼽힌다.
미국 정부는 이르면 6월 중 해외우려집단에 관한 기준을 세부 지침으로 내놓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 결과에 따라 국내 배터리업체들의 대응방안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만약 중국의 배터리 광물·소재 기업들이 해외우려집단으로 지정되면 이들에게 광물·소재를 상당수 조달받아 사업을 하는 국내 기업들도 타격을 입을 수 있다. 그동안 구축했던 공급망의 많은 부분을 수정해야 하는 만큼 그에 따른 비용과 노력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배터리 밸류체인상에서 중국기업들이 광물·소재 분야에서 거의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 정부로서도 광물·소재에서까지 중국 배제 기조를 고수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시각이 많다.
중국 기업을 배제하려다 자칫 미국 정부가 추진하는 전기차 전환이 대폭 늦춰질 수도 있는 만큼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다 태우는' 일은 삼갈 것이란 얘기다.
다만 불확실성이 완전히 해소되기까지는 국내 배터리기업들도 이런 부분을 고려해 중국 광물·소재기업과 합작을 하는 방식으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국내 일부 기업들은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세부지침에서 합작법인의 중국 측 지분율에 따라 보조금 여부가 갈릴 가능성까지 고려해 합작 계약 시 지분율 조정 조항도 넣어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배터리업체들로서는 미국 정부의 중국 배제 기조가 과도하게 적용돼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너무 느슨하게 적용돼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국내 배터리업체들과 글로벌 시장점유율을 다투는 중국 업체들이 북미에서 배제되면 북미 시장이 국내 기업들의 독무대가 될 수 있는데 기대했던 것과 달리 중국기업들이 북미 시장에 잘 정착하게 되면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하다.
최근 미국 정부는 중국 배터리업체 궈시안(고션하이테크)의 미국 내 리튬인산철(LFP)배터리 공급을 위한 양극재, 음극재 공장 건축을 승인한 것으로 확인됐다. 궈시안은 최대 주주가 독일 완성차업체 폭스바겐이라 중국기업이 아닌 독일기업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인이 설립했고 본사도 중국에 있는 만큼 궈시안의 북미 진출이 중국기업들의 북미 진출 신호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앞서 2월에도 중국 선두 셀제조사인 CATL이 미국 완성차기업 포드와 기술제휴 형태로 배터리공장을 짓는 방식으로 북미시장 우회 공략에 나선 바 있다.
기존 정책 범위 내에서 불확실성뿐 아니라 아예 정책 기조 자체가 크게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언론에 따르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반대 진영에 있는 공화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전기차 산업을 지원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예산 규모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미국 하원 세입위원회의 공화당 의원들은 13일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청정에너지 확대 예산을 줄이고 그 돈으로 법인세를 인하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신규 전기차를 구매하면 최대 7500달러를 받게 되는 세액공제 혜택을 줄이고 중고 전기차 구매에 따른 세액공제는 아예 폐기하는 내용도 담겼다.
2024년 미국에서 대통령선거가 치러진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기존의 정책기조가 전면적으로 뒤바뀔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다. 앞서 2016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뒤 미국은 물론 세계 친환경 산업 흐름이 상당 시간 정체됐던 적도 있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K배터리기업들로서는 북미의 우호적 정책환경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인 셈이다.
이에 K배터리기업들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내재적 경쟁력 강화에 힘쓰며 시장에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K배터리기업이 북미 시장에서 가장 돋보이는 경쟁력으로는 양산능력을 선제적으로 갖춰놓았다는 점이 꼽힌다.
가장 적극적으로 북미 증설에 나선 LG에너지솔루션은 2025년까지 연산 300GWh 안팎의 생산능력을 갖추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미 확보한 생산능력을 보더라도 미시간주 단독공장(연산 20GWh), GM과 합작공장(연산 45GWh) 등 연간 65GWh에 이른다.
▲ LG에너지솔루션 미국 미시건주 배터리공장 모습. < LG에너지솔루션 >
SK온 역시 이미 조지아의 단독공장을 통해 연산 20GWh 넘는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는데 여기에 추가 증설 계획을 반영하면 2025년 약 200GWh 가량의 생산능력을 갖출 것으로 보인다.
배터리업계 한 관계자는 “공장 건설에만 아무리 빨라도 2년이 걸리는데 공장을 짓는다 해도 가동률과 수율을 안정화하기까지 적어도 4년이 걸린다”며 “아무리 뛰어난 역량을 지닌 회사라 하더라도 빠른 시일 내에 북미에서 K배터리업체 만큼의 양산능력을 갖춰 경쟁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기술적 우위도 무시할 수 없는 K배터리업체의 강점으로 꼽힌다. 특히 한국기업들은 하이니켈 양극재를 적용한 삼원계 배터리 시장에서 단연 선두주자로 꼽힌다.
삼원계 배터리는 중국기업들의 주력 품목인 리튬인산철 배터리와 비교해 에너지밀도, 주행거리 등에서 유리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안전성 측면에서 취약하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한 높은 기술력이 필요하다.
삼원계 배터리시장에서 K배터리업체들이 앞서 나간다는 것은 기술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말도 된다.
게다가 K배터리업체들도 셀 제조사와 소재업체를 막론하고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리튬인산철 배터리로 제품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기술적 난도 측면에서 리튬인산철 배터리는 삼원계 배터리보다 수월하다고 평가되는 만큼 K배터리업체들도 고객 요구에 맞춰 리튬인산철 배터리로도 일정 부분 시장 확대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북미 시장의 정책적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K배터리기업에 우호적 환경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는 시각도 나온다.
구성중 DS증권 연구원은 “중국 셀 제조사들이 우회해서 북미에 공장을 건설할 가능성이 있지만 현지 공장 수율 안정화에는 시일이 걸릴 것”이라며 “광물·소재 등 업스트림에서 중국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다운스트림(셀·모듈) 내 중국의 과도한 점유율 확대는 인플레이션 감축법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바라봤다. 류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