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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知社知] "독재자" 비난 잠재운 CEO 카라얀, 베를린필을 1등 상품으로

진국영 jineman@careercare.co.kr 2023-06-12 08: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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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知社知] "독재자" 비난 잠재운 CEO 카라얀, 베를린필을 1등 상품으로
▲ 독일 최고 오케스트라 베를린필 종신 상임지휘자였던 카라얀의 리더십은 성과와 좋은 리더십에 관한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카라얀 공식 홈페이지 갈무리>
[비즈니스포스트] 20세기 독일 현대사에는 유명한 오스트리아 출신 사람 두 명이 있다. 

야심만만했던 이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에서 독일로 이주해 청장년 시절 순탄치 않은 시절을 겪었으나 나이 40대 중반 쯤에 이르러 결정적 기회를 잡았고 그 이후 자신만의 성을 구축하고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대중으로부터 스타에 가까운 지지를 받아 적어도 생전에는 그와 견줄만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죽고 나자 그제서야 참고 있었던 새로운 평이 추가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독재자'였고 그들이 쌓아 올린 대단한 성이란 것이 사실은 많은 사람의 분노 위에 건설된 것이었다는 것이었다. 

그 두 사람, 한 명은 히틀러이고 다른 한 명은 1955~1989년까지 34년간 독일 최고의 오케스트라 베를린필의 종신 상임지휘자였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바로 그 사람이다.

"사람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권한을 행사하는 데만 익숙한 사람이다."

"내키면 매력적이고 상냥하게 대하지만 진심인 적은 드물고, 타인에게 거리를 두며 냉정하고 거부적인 태도에 상대가 상처를 받을 정도로 모욕감을 주었다."

"엘리트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명품 문화의 표본."

일부 그를 옹호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사후 쏟아진 카라얀 리더십 스타일에 대한 평은 혹평을 넘어 고발에 가까운 것이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카라얀은 단원들을 대상으로 ‘가스라이팅’에 가까운 심리적 억압을 가하며 조직을 지배했던 나쁜 지도자였던 셈이다.

그런데 그 나쁜 리더 카라얀은 저렇게 불만을 쏟아내는 사람들을 데리고 어떻게 30년 넘게 절대적 지휘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 왜 베를린필 단원들은 그 오랜 세월을 입을 닫고 살았을까?

◆ 음반 녹음 비즈니스로 성공의 길로 들어서다

2차 세계대전 종전 다음 해인 1946년. 카라얀은 여전히 위기에 빠져 있었다. 1908년 모차르트의 고향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음악 신동 소리를 들으며 태어난 그는 1934년 26세 젊은 나이에 독일 서부 중심도시 아헨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음악감독을 거쳐 베를린 중앙 무대로 진출했다. 1944년에는 히틀러 앞에서 베를린필 객원 지휘도 했다. 

'영감과 마법으로 정신적으로 충만한' 지휘로 존경 받았던 상임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의 그늘에 가린데다 당일 연주에서 실수를 하는 바람에 히틀러가 '다시는 저 친구가 베를린필을 지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지만 아무튼 카라얀은 주목 받는 젊은 지휘자였다.

하지만 기회를 잡기 위해 나치에 가입했던 것, 그것도 1933년과 35년에 걸쳐 두 번이나 가입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연합국사령부는 카라얀에 대해 활동 전면 중지 결정을 내렸다. 혐의는 1947년 카라얀의 아내 아니타가 유대계라는 점까지 감안되어 결국 풀렸지만, 활동 기회가 쉽게 다시 열릴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그에게 영국의 유명 클래식 음반사 EMI의 녹음 프로듀서 월터 레그가 찾아 왔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음반을 녹음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월터 레그는 당시 급속히 진보하고 있었던 녹음 기술에 주목했다. 스테레오 녹음 시도가 계속되고 있었고 LP(Long Playing) 레코드판 기술은 바야흐로 기술개발 완료를 앞두고 있었던 시기였다. 

스테레오는 콘서트홀의 입체적 현장감을 풍부한 음색으로 담아 낼 수 있게 하고, LP판은 오케스트라 협주곡 몇 곡은 물론 웬만한 교향곡 전 악장도 담을 수 있는 1시간 녹음 분량을 보장한다. 스테레오 + LP 기술이라는 혁신이 다가 오고 있었다.

"공연으로는 기껏 수천 명 밖에 들을 수 없지만 음반이라면 수십만 명이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클래식 음악계, 특히 보수적 음악감독, 지휘자, 연주자가 장악하고 있었던 유럽의 유명 오케스트라는 월터 레그의 말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공연장이 아닌 거실에서, 연주자가 아닌 기계가 대신 재생하는 소리라니 그것은 음악이 아니고 죽은 소리일 뿐이었다.

필하모니아는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던 레그가 1946년 녹음 전담 악단으로 만든 오케스트라였다. 후에 필하모니아는 영국 최고의 교향악단으로 성장했지만, 스튜디오에서 연주하는 녹음 전용 악단 지휘자를 구하기는 어려웠다.

카라얀이었다. 레그가 하는 말의 의미, 중요성, 가능성, 폭발성을 금새 이해했다. 그는 원래 공학도였다. 음악 쪽으로 길을 돌리긴 했지만 비엔나공대에서 첫 대학생활을 시작했을 정도로 기술은 주요 관심사였다. 

거실 오디오 클래식이 중산층의 라이프 스타일로 떠오를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그는 궁핍했다. 훗날 레그는 "선물로 갖고 간 술 3병을 90일분으로 나눠 하루에 한 잔씩 마시더라"고 당시 카라얀을 회상했다. "해 봅시다" 카라얀의 클래식 제국은 그렇게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1948년 첫 녹음을 시작으로 1954년까지 필하모니아와 카라얀은 EMI 레이블로 수많은 음반을 양산했다. 녹음 시간이 1천 시간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었다. 음반 가게마다 EMI 붉은색 로고가 인쇄된  음반이 깔리기 시작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일부 계층이나 즐길 수 있었던 그들만의 귀족적 취미를 거실에서 참여할 수 있게 된 대중은 열광했다. 

대중적 클래식 음반을 시장이 원하고 음반사는 이를 만들어 돈을 벌고, 오케스트라가 그 돈을 받아 더 많은 레퍼토리를 만들어 내는 산업 순환이 시작됐다. 전형적인 게르만 미남형 카라얀은 대중적 스타가 되었다.

◆ 카리스마로 만든 클래식 제국

음반에서의 성공은 곧 오프라인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1954년 예술가로 존경 받았던 푸르트뱅글러가 사망하자 카라얀은 그 뒤를 이어 베를린필 상임지휘자에 올랐으며 1955년 종전 10주년을 기념한 미국 순회공연을 마치고 난 후에는 그 성공을 디딤돌 삼아 푸르트뱅글러와 같은 종신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베를린필 상임지휘자에 취임하면서 카라얀의 음반 제작 커리어는 본격적인 도약기를 맞이했다. 1958년 EMI와 경쟁하던 독일의 클래식 음반사 도이치그라마폰이 카라얀과 베를린필을 전속계약으로 끌어 들였다. 이후 30여 년, 도이치그라마폰은 카라얀과 함께 EMI 녹음의 2배가 넘는 분량을 녹음해 시장에 대량 공급했다. 

도이치그라마폰에 등록돼 있는 카라얀 관련 음반이 452개다. '노란색 액자에 23송이 튤립'이 그려져 있는 도이치그라마폰의 베를린필 녹음 음반은 클래식 애호가라면 누구나 처음 접하게 되기 마련인 피해 갈 수 없는 상품이 됐으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 오케스트라'는 클래식 음악 그 자체가 됐다. 

음반 녹음 비즈니스의 성공은 카라얀과 베를린필에게 명예와 부를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오늘날 음악 데이터베이스 Discogs.com에 등록돼 있는 카라얀 음반은 2326개에 달하는데 이들 음반은 카라얀 생전에만 1억 1150만 장, 사후에 판매된 양을 포함하면 2억 장이 넘게 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라얀과 단원들의 급여는 당연히 치솟았고 그 외에도 급여의 5배나 되는 돈을 외부 활동으로 벌어들였다. 

하지만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었다. 베를린필의 수입 구조에서 카라얀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 커질수록 악단 내 정치적 관계는 변화가 불가피했다. 자존심 센 예술가 집합체는 지휘자 카라얀의 말대로 움직이는 음악 서비스 조직이 됐고, 예술적 의미는 있겠으나 듣기 어려운 현대 음악 소개보다는 대중들이 원하는 곡을 가장 완벽하게 들려주는 것이 우선시됐다. 

무대도 지휘자 중심으로 바뀌었다. 연주는 오랜 연습을 거쳐 이미 100% 가까이 완벽한 상태. 카라얀에게 있어 무대에서 중요한 것은 연주자가 아닌 지휘자였다. 

그는 콘서트홀 관객들의 음악적 경험을 리드하는 자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포디움 위에서 카라얀은 악보 전체를 암보한 상태에서 눈을 감고 지휘했다. 

단원들 눈을 마주치는 일은 당연히 없었으며 단원들은 지휘자와 교감할 일이 없었다. 카라얀의 지휘는 때로는 음악을 온 몸에 휘감은 듯 했고, 때로는 계시를 받은 듯 격정했다. 황홀한 지휘, 지휘자만이 있는 무대였다. 

좋은 리더십은 성과의 충분조건일까? 

카라얀은 예술가형 지휘자라기보다는 제품을 만드는 장인이자 기업을 이끄는 CEO에 가까웠다. 제품은 흠잡을 데 없었고 성과는 거대하고 지속적이었다. 단원들은 그런 카라얀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를린필의 성과구조에서 카라얀이 차지하는 비중이 명확하고 그 열매를 자신들이 공유하는 한 카라얀은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여야 하는 거대한 존재였다. 고객 - 상품 - 성과 - 리더십으로 이어지는 서플라이 체인 아래 30여 년 세월이 지나갔다. 

흔히 회사에서 리더십 검사를 해 보면 권위적이라고 지적 받는 임원들이 많다. 직원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며, 어디로 끌고 가는지 소통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혐의점이다. 

말하기보다는 들으려 하고, 혼자 하려 하지 말고 일을 나눠 주고, 서두르기보다는 기다리고, 결과를 질책하기 보다는 소통을 늘리도록 하라는 처방이 주어진다.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막으려는 시도다.

많이들 쓰는 처방이니 나름 효과가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원래 그런 스타일이 아닌 사람들에게 갑자기 개방적 수평적이 되는 방법을 배우라고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 일 일지는 의심스럽다.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면 흉내는 흉내에 그칠 뿐 잘하는 일이 되지는 못하며 잘하지 못하는 수준에 불과한 학습된 리더십이 성과를 끌어낼 정도로 힘을 갖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설탕을 넣는다고 짠 맛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되려 이도 저도 아닌 맛이 되고 만다. 짠 음식을 해결할 때 오히려 효과적인 방법은 밀가루든 감자든 고기든 주재료를 더 넣는 것이 답이다. 

리더십이 권위적이라는 비난은 실은 "성과도 없으면서 권위만 부린다. 권위적 스타일을 참아줄 만큼 성과가 충분치 않다"는 말에 가깝다. 

1989년 카라얀이 타계하자 베를린필 단원들은 오랜 세월 기다려 온 민주적 지도자를 뽑을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비밀투표를 거쳐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후임 지휘자로 뽑았다. 이탈리아 출신의 지휘자 아바도는 소통을 중시했다. 권위를 걷어내고 단원들과 소통했으며 예술적으로 의미있는 현대음악을 과감히 무대에 올렸다. 

하지만 10년쯤 후, 이번엔 다른 이유로 단원들이 그를 비토했다. 지휘자의 지시가 애매모호해 리허설 시간만 잡아먹고 있다는 등이 이유였지만 카라얀에 비해 돈 버는 재주가 없던 아바도 탓에 음반 수입이 줄어 들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수입이 없자 단원들은 견디지 못했다.

조직원들의 인격을 존중하며 소통과 공감으로 조직을 이끄는 탈권위적 개방적 리더십은 조직의 성과를 배가시킨다. 기왕이면 다홍치마, 같은 값이라면 리더는 소통법을 배워 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효모가 빵을 부풀리기는 해도 빵 자체를 만들지는 못하는 것처럼 좋은 리더십이 성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높은 성과의 필요조건 중 하나일 수는 있지만 그 자체는 아니며 충분조건은 더더욱 전혀 아니다. 

리더십과 성과의 솔직한 관계는 오히려 이렇게 정의된다. 성과는 리더십의 필요조건이다. 딱 맞는 우리 속담이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진국영 커리어케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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