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북 보은 우당 고택은 꿈에서 얻은 명당이다. 사진은 안채 전경. <문화재청> |
[비즈니스포스트] 구한말 전남 고흥에 우당 선영홍(1862-1924)이라는 갑부가 살았습니다. 고흥의 거금도에서 살았는데 육지에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산물 교역으로도 큰 돈을 벌었습니다. 당시 고흥의 최고 갑부였다고 합니다.
선생은 소작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잘 헤아려 소작료를 다른 지주들보다 훨씬 적게 받았습니다. 그 덕에 선생의 소작인들은 보릿고개 춘궁기에도 굶는 이가 없었습니다.
또, 대흥사라는 기숙학교를 세워 숙식을 제공하며 가난한 집안의 인재들이 공부할 수 있게 도움을 줬습니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일에 늘 발 벗고 나섰습니다. 이에 많은 이들이 선생의 도움을 받았고 그들이 뜻을 모아 1922년에 선생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선생에겐 아주 특별한 소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소망은 자손들이 유복하게 지내며, 또 남들에게 많은 덕을 베풀면서, 대대로 오래 오래 살아갈 명당을 구하여 거기에 터를 잡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구례 운조루나 경주 최부자댁 같은 가문이 자리할 명당을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선생은 유명한 풍수가를 초빙하여 그의 자문을 받으며 특별한 명당 길지를 구하고자 애썼습니다. 그런데 널리 잘 알려진 명당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명문 세가들이 차지하여 뜻을 이루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백방으로 노력하던 중에 어느 날 선생은 아주 기이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누군가가 `육지의 섬에 터를 잡아야 자손 대대로 복을 받는다` 말하며 어느 명당터의 풍경을 보여줬습니다.
육지의 섬이란 말에 먼저 찾아본 곳은 한강의 여의도였습니다. 그런데 여의도 주변의 풍경은 꿈에서 본 모습과 전혀 달랐습니다.
발길을 돌려 충북 보은의 속리산 남쪽에 가니 장안면 개안리에 꿈에서 본 모습과 매우 비슷하게 생긴 땅이 있었습니다.
선생은 바로 이 땅을 구입하여 큰아들과 함께 여기에다 100여 간에 이르는 큰 집을 지었습니다. 재산과 딸린 식솔이 워낙 많아서 이렇게 큰 가옥이 필요했습니다. 워낙 규모가 큰 가옥이라 1919년에 착공하여 2년 뒤인 1921년에야 완공되었습니다.
선생은 이 집에서 3년 동안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생의 사후엔 장자인 남헌 선정훈 선생이 가주가 돼 부친의 가업을 계승했습니다.
남헌 선생은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애썼던 부친의 높은 뜻을 잘 이어받아 많은 선덕을 베풀었습니다. 이 집은 우당 고택, 혹은 선병국 가옥으로 불리며 해마다 많은 관람객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또, 우당 선생의 후손들이 지금도 여기서 살고 있습니다.
특별히 빼어난 명당 길지는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인연이 있어야 하고, 덕을 쌓은 사람이라야 그 인연이 맺어진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명당을 소개한 만산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만산도는 음택명당을 소개한 책인데 거기엔 덕을 쌓은 사람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는 곳들이 여럿 있습니다. 어느 명당은 3대를 적덕한 사람이 들어간다고 씌여 있습니다.
우당 선생은 많은 덕을 베풀었기에 좋은 명당을 현몽으로 점지받았을 것입니다.
우당 고택은 속리산 남쪽에 우뚝 솟아오른 구병산의 서쪽 끝자락 아래에 자리잡았습니다. 우당 고택 터는 속리산 남쪽에서 흘러온 삼가천이 사방을 둘러싼 섬으로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국인 연화부수형의 명당입니다.
삼가천이 고택의 북쪽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흐르다가 동쪽에서 다시 합쳐지는데 집터의 형상이 연꽃잎 하나가 물에 떠 있는 모습입니다. 연화부수형의 명당에서 살면 대개 재복을 많이 누리게 됩니다.
고택의 뒤에는 한 일자 모양의 기다란 산이 단아한 모습으로 솟아있습니다. 이 산이 주산인데, 200미터 이상 길게 뻗어서 3천 평이 넘는 고택터 전체를 든든하게 잘 보호해줍니다. 또, 일자형의 주산은 어질고 현명한 사람들, 인품이 고매한 사람들, 총명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합니다.
이 주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있는데 이것이 고택의 청룡입니다. 그리고, 고택의 북쪽에는 옥녀봉이 높이 솟아 있으며 이 옥녀봉에서남쪽으로 뻗은 야트막한 산줄기가 고택의 백호입니다. 백호는 청룡보다 두 배쯤 멀리 떨어져 있는데 둘 모두 다정하게 고택을 잘 보호해 줍니다.
고택의 앞쪽에는 초승달이나 반달 모양처럼 생긴 산을 뜻하는 아미사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크고 작은 아미사들이 10여 개 있는데 그 형상이 모두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단아합니다.
앞의 안산들이 이러한 형상이면 심성이 아름답고 지혜로운 자손들이 나오며, 또 그런 사람들의 성원과 지지를 받게 됩니다. 좋은 사람들과 친교를 나누며 화목하게 지냅니다.
고택의 동남쪽으로는 수십 리 밖까지 시야가 탁 트여 먼 데 산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모습이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답게 보입니다.
명당 터에서 바라다 보이는 시야가 이렇게 넓으면 터에 서린 좋은 지기가 오래 유지됩니다. 또,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성원과 지지와 사랑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당 고택 터에는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고택을 감싸고 흐르는 삼가천은 동남방으로 빠져나가는데, 넓은 들판을 따라 흐르기 때문에 약 6킬로미터 밖까지 가려주는 산이 없어 그 모습이 환히 드러나 보입니다. 6킬로미터쯤 떨어진 데서 보청천과 만나 합류한 다음에야 율미산과 성미산 사이의 협곡으로 들어가며 모습을 감춥니다.
이렇게 물 나가는 모습이 멀리까지 훤하게 드러나 보이면 한동안 지기가 약해지고 가운도 쇠하게 됩니다. 우당 선생이 초빙했던 풍수가도 이를 알고 처음 얼마 동안은 가세가 번창했다가 쇠약해지고, 집을 지은 뒤 70~80년이 지나면,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여 오래 유지되리라 예언했다고 합니다.
이 예언대로 이곳으로 이거한 뒤 한동안은 가세가 더욱 크게 번창했습니다. 또, 번창한 가세만큼 더 많은 선덕을 쌓았습니다.
남헌 선생은 대동상사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했는데 남해의 해산물을 중국과 일본에 수출하여 아주 큰 돈을 벌었습니다. 선생은 재물을 쌓아두지 않고 어려운 이들과 잃어버린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썼습니다.
선생의 좌우명은 `위선최락(선한 일을 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다)`였습니다. 지금도 선생이 기거하던 사랑채 방문 위에는 위선최락이 쓰인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선생의 덕행과 고택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류인학/자유기고가, '문화일보'에 한국의 명산을 답사하며 쓴 글 ‘배달의 산하’, 구도소설 ‘자하도를 찾아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