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는 평소 정직을 강조했다.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1층에 있는 신격호 명예회장의 흉상. <롯데지주> |
[비즈니스포스트] '정직, 봉사, 그리고 정열.' 롯데그룹의 옛 사훈이다.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가 직접 만들었다.
이 가운데서도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로 '정직'이다.
신 명예회장은 과거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정직을 바르게 살자는 의지, 봉사를 의롭게 살자는 의지의 표현, 정열을 힘차게 살자는 감정의 실현이라고 표현한 것은 좋은 제품을 열심히 만들자는 뜻에서 발전시킨 것이다"며 "그 말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이다"고 말했다.
이는 롯데그룹 공식 블로그에도 자세히 소개돼 있다.
롯데그룹은 2020년 12월 공식 블로그에 올린 '신격호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이라는 글에서 "(신 명예회장은) 기업의 존재 이유가 생산활동을 통해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는 데 있으며 이로써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므로 무엇보다 정직한 기업 정신이 요구된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새해 초부터 롯데그룹과 관련해 정직이라는 말을 꺼내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롯데헬스케어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술도용' 논란 때문이다.
롯데헬스케어가 최근 미국에서 열린 IT·가전 박람회 'CES 2023'에서 공개한 영양제 디스펜서 '캐즐'을 놓고 알고케어라는 스타트업이 자사의 기술을 베꼈다고 주장하면서 이 논란이 점화했다.
정지원 알고케어 대표가 온라인에 올린 글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롯데그룹은 2021년 9~10월경 알고케어에 투자 및 사업협력을 제안하면서 몇 차례나 회사를 찾아와 개발 중인 상품 관련 정보와 아이디어를 물었다. '절대로 알고케어의 사업을 따라할 생각이 없으니 걱정 말고 이야기하셔도 된다'는 롯데그룹 담당 임원의 말에 스타트업 대표는 답변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를 제공했다고 한다.
이후 롯데그룹과 알고케어는 세부적 사항에 합의하지 못해 협력 논의를 멈췄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알고케어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과 유사한 형태로 롯데그룹이 자체적으로 사업을 펼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정 대표는 직접 알고케어 서비스를 따라하려는 것에 대해 롯데그룹 담당 임원에게 항의했다.
그러나 이 임원은 "대표님도 이해를 해주셔야 할 것이, 말씀하시는 사업 모델이 제가 몇 년 전에 생각한 것이다"며 "알고케어에서 먼저 했기 때문에 당신은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알고케어와 비슷한 사업을 펼치는 것에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대응한 것이다.
이후 롯데헬스케어가 CES 2023에 내놓은 제품이 알고케어가 3년여 동안 개발한 제품과 유사하다는 것이 정 대표의 주장이다.
정 대표는 온라인에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시간순으로 나열하면서 롯데그룹 담당 임원과 나눴던 여러 녹취 파일도 함께 올렸다.
이 파일이 공개된 뒤 파장은 작지 않다. 당장 중소벤처기업부가 직접 개입하고 나섰다.
중소벤처기업부는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알고케어에 담당 공무원과 전문 변호사를 파견해 아이디어 탈취 대응을 위한 증거자료 확보와 법률 자문 등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롯데그룹은 기술도용 논란이 알고케어의 일방적 주장일 뿐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사업 정보와 아이디어를 물어본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신사업을 추진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태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 수 없다.
이미 알고케어는 롯데헬스케어를 상대로 공정거래법과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으로 법적 조치를 진행하고 있다. 롯데헬스케어가 알고케어의 기술도용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결국 법정에서 잘잘못이 가려질 것이다.
양쪽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사법부의 판단이 나오기 전에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지를 예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다만 이 사태를 바라보는 소비자들의 시선은 다소 일방적이다. '대기업이 스타트업의 기술을 뺏었다'는 의견에 이견이 보이지 않는다.
한 누리꾼이 "아이디어만 있었을 뿐 개발하려니 힘들어서 그것을 하고 있는 중소기업과 미팅을 했고 곧 비슷한 제품이 튀어나왔다. 일반적인 경우 이것을 '도용'이라고 부른다"며 롯데그룹의 행태를 꼬집은 댓글은 '베스트' 댓글이 됐다.
물론 정 대표의 주장만을 놓고 판단해 여론이 한 쪽으로 몰렸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롯데그룹에 이 사태와 관련해 질문했을 때 가장 처음 들었던 말도 "기술탈취 프레임으로만 사건을 봐서 그렇지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녹취록을 보면 해명에 설득력이 없다는 말에도 "(녹취록은) 알코케어 측의 악의적 편집이다. 전체적 맥락은 결코 그렇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변했다.
정리하자면 롯데그룹은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모두 떳떳하다는 것인데 이쯤에서 롯데그룹이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법적으로는 시시비비가 어떻게 가려질지 모른다. 사업을 추진하면서 이미 법률자문을 받았을 테니 롯데그룹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자신감이 분명 있을 것이다. 실제로 롯데그룹에 잘못이 없다는 판단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롯데그룹만 모르고 있는 사실도 있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CES 현장에서는 롯데헬스케어의 제품을 보고 난 뒤 알고케어 부스를 방문한 사람들 입에서 "어? 이거 아까 봤던 거랑 똑같은데"라는 말이 계속 나왔다고 한다. 누구나 딱 보면 알 수 있을 정도로 두 제품이 유사하다는 뜻이다.
정 대표가 비즈니스포스트와 통화에서 "3월에 알고케어 제품이 나와 보면 알거예요. 누가 봐도 같거든요"라고 한 말도 같은 맥락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이라고 강조했던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가 살아 있었다면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봤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