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채널Who] K-2 흑표전차는 한동안 비싼 내수용 전차라는 소리를 들어왔는데 세계무대, 그것도 유럽시장에서 데뷔를 했다.
흑표는 현존하는 전차 가운데 가장 현대화된 무기로 손꼽히나 100억 원에 이르는 가격 때문에 프랑스 르끌레르전차나 일본 10식전차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비싼 3대 전차로 꼽히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 프랑스 3국의 전차가 비쌌던 이유는 다 내수용이기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글로벌 제조강국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의 무기가 내수시장에 갇혀있었던 이유는 전차 대국 미국과 독일, 러시아의 벽을 넘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전차를 만드는 현대로템 역시 철도와 플랜트 분야에서는 세계로 뻗어가고 있었지만 방위산업에서는 내수기업 딱지를 떼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2022년 폴란드가 흑표를 구매해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계약규모만 해도 1천 대에 이르러 데뷔전을 성대하게 치렀다.
이런 행운은 전차 대국들이 모두 폴란드에 전차를 제때 공급하기 힘든 상황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가 유럽에서 공공의 적으로 떠오른 가운데 다른 축인 미국과 독일은 자국의 첨단무기를 폴란드에 제공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우선 미국은 2022년 폴란드에 116대의 전차를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지만 주문이 밀려있어 2025년에나 첫 물량이 인도될 것으로 예정돼 있다. 이렇게 느긋한 일정은 당장 우크라이나 다음이라는 위협을 느끼고 있는 폴란드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을 수 있다.
같은 유럽국가인 독일 역시 오랜 군축기조를 깨고 이제 막 재무장에 들어가면서 당장은 폴란드 무장까지 도울 여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두 나라 사이에 아직 2차대전 시절의 앙금이 남아있어 서로의 군사력 확장을 내심 꺼린다는 시각을 내놓기도 한다.
또 현대 전차에 요구되는 스펙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흑표의 가성비가 재조명된 영향도 있다.
특히 2022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양상을 보면 최신형 전차들이 재블린과 같은 보병무기에 무기력하게 당하는 일이 많이 연출되면서 전차 무용론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반응장갑과 능동방어장치, 사격통제장치와 같은 첨단옵션들이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니게 되면서 전차 가격이 급격히 뛰고 있다.
풀옵션 레오파드2 전차는 가격은 2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옵션을 모두 장착한 흑표의 가격은 130억 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 한국이 630대를 직접 생산해 공급하고 370대는 폴란드에서 현지 생산한다는 역대급 계약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한국이 자주국방을 위해 노력해왔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해온 미국과 독일, 그리고 러시아의 도움도 있었다.
현대로템은 옛 현대정공 시절인 1981년 미국 제너럴다이내믹스로부터 기술을 이전받아 M1 에이브람스전차의 한국 버전을 개발했다.
이를 통해 1984년 베이비 에이브람스라고도 불리는 K-1 88전차가 탄생했다. 험지가 많은 한반도 지형에 맞게 덩치가 줄어든 대신 장애물 돌파능력은 M1보다 우수하며 뛰어난 도하능력까지 갖췄다고 평가된다.
K-1 88전차는 1997년까지 모두 1027대가 양산돼 한국의 주력전차가 됐다.
이런 개발경험과 노하우가 고스란히 흑표 개발에 활용된 만큼 전차 국산화에 미국의 도움이 가장 컸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러시아다. 러시아는 1995년 불곰사업을 통해 당시 최신형 무기였던 T-80U 중형전차와 T-80UK 지휘전차를 놓고 스펙을 줄이지 않고 판매했고 한국은 이를 통해 전차 개발에 필요한 기술들을 획득할 수 있었다.
당시 현대로템 개발자들은 소수 정예팀을 꾸려 T-80전차를 자유롭게 뜯어볼 수 있었는데 내부 구조와 승무원 규모, 방호력과 같은 전차 개발사상을 확립하는데 도움을 얻었다고 회고한다.
마지막은 독일이다. 한국은 독일 방산의 최대 고객(독일 방산수출의 14%)일 정도로 많은 방산 부품을 수입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자체적 기술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독일의 도움으로 해결해가고 있는데 흑표의 경우 독일산 파워팩을 들여다 쓰고 있다.
독일 입장에서 보면 안방인 유럽시장에 한국이 끼어드는 것이 못마땅할 수 있지만 한국 무기가 팔릴수록 독일도 돈을 버는 구조라 이 협력관계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폴란드 외에도 많은 나라들이 흑표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지만 현대로템은 아직 모든 나라에 전차를 수출할 정도의 생산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로템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조기종전 등 상황이 바뀔 가능성을 고려해 생산역량 확대에 신중하게 접근하면서 우선은 폴란드와 한국 내부 수요에 집중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다만 앞으로 폴란드를 거점삼아 유럽 시장에 흑표를 판매할 가능성은 열려있다. 생산량이 늘어나 규모의 경제가 갖춰지면 100억 원에 이르렀던 흑표 가격은 점점 낮아지고 가성비까지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때 직접 쓸 전차를 보유하기 위해 전차 대국들에 의존해야 했던 한국이 어느새 전차 수출국으로 우뚝 설 기회를 잡았다. 그들만의 리그였던 전차 시장에서 현대로템이 한 자리를 마련하기를 기대한다. 조충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