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맨 왼쪽)이 12월6일(현지시각)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대만 반도체기업 TSMC의 반도체 생산공장 건설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TSMC는 최근 400억 달러(52조6240억 원)을 투자해 첨단 반도체 공장을 확장하기로 했다.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벌이는 '반도체 전쟁'에서 승리할지 주목된다. <연합뉴스/AFP> |
[비즈니스포스트] 전략적 대결을 펼치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가장 가시적인 전장은 반도체 분야이다. 미-중 대결로 인한 반도체 분야의 불확실성을 보여주는 일들이 잇따른다.
한국에서는 최근 반도체업체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가 하락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지난 6일과 7일 증시에서 잇따라 52주 신저가를 기록하며, 8만원선이 붕괴됐다.
반도체 전문 애널리스트인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지난 11월30일 '이코노미 조선'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하이닉스 주가를 두고 “8만원이 바닥이라고 본다. 주가순자산비율(PBR)이 0.8배 수준이다. PBR 0.8배는 사실 ‘망하는’ 산업에 주로 적용하는 숫자다. 그러나 반도체는 성장 산업이다. 이 정도 밸류에이션을 적용할 이유가 없다”고 평가했다.
하이닉스의 주가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의미이다.
또 하나는 세계 최대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대만 티에스엠시(TSMC)가 6일 미국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400억달러(52조6240억 원)를 투자해, 첨단 반도체 공장을 확장하기로 했다.
이번 발표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 이후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고, 미국 내 첨단 생산 능력을 확장하려는 시도 중 최대 성과이다. 티에스엠시가 대만 본토가 아닌 미국에서 최첨단 3나노미터급 반도체를 본격 생산하게 된다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장비를 생산하는 업체인 ASML을 보유한 네덜란드는 지난 11월22일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리제 슈라이네마허 네덜란드 무역부 장관은 의회에서 네덜란드는 중국에 대한 ASML의 반도체 장비 판매와 관련해 자체적인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ASML은 반도체 미세공정에 반드시 필요한 극자외선(EUV) 장비를 독점 생산하는 업체다.
세계 반도체 기업들은 ASML의 EUV 장비 없이는 선폭 1010㎚(나노미터, 1㎚=10억분의 1m) 이하 초미세 공정을 진행할 수 없다. 특히, ASML은 미국이 개발한 원천 기술을 거의 사용하지 않아서, 미국이 ASML의 대중국 장비 판매를 막을 근거도 없는 형편이다.
이들 사례들은 반도체 분야에서 격돌하는 미-중 사이의 전략적 대결이 어느 방향으로 진행될지를 가늠하기 힘들게 하고 있다. 반도체 전쟁에서 미국의 우위는 여전하나, 최근 들어서는 그 미래를 낙관하기 힘들게 하고 있다.
경기침체로 반도체 수요가 줄어들면서 반도체 1위 업체인 티에스엠시 등 전 세계 반도체 회사들의 주가가 하락해, 하이닉스의 주가 하락도 특별할 것은 없다고 할 수는 있다. 세계 D램, 낸드플래시 시장이 당초 예상보다 더 가파른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있다.
4분기 서버용 D램 가격이 25%나 하락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주요 반도체 회사들이 감산을 하고 있는데도, 고객사들의 재고가 소진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특히, 하이닉스는 삼성전자에 비해서 저성능 반도체를 생산하는 데다, 수익창출원이 D램에만 치우쳐 있어 타격이 더 크다.
애초, 미-중의 반도체 전쟁은 반도체 공급을 줄여서 반도체 가격 상승을 부를 것으로 예상됐다. 현재로서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기술과 장비들을 수출 규제함으로써, 중국이 생산하던 상대적으로 값싸고 저성능의 반도체 공급을 막아서 반도체 가격 상승과 부족을 초래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 수혜자는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회사들이고, 특히 하이닉스가 더 혜택을 입을 것으로 전망됐다.
물론 이는 중기적 전망이다. 현재 상황은 코로나19 팬더믹으로 가격 상승을 우려한 수요자들이 반도체를 미리 구매해 놓았다가, 경기침체가 다가오면서 가격이 폭락한 이유가 크다.
그럼에도 이번 반도체 업황 부진은 미-중 대결에 의해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반도체 공급망의 상황과 그 불가측성을 말한다.
내년 말 이후 반도체 시장은 전혀 다른 상황을 연출할 수도 있다. 중국이 제공하는 값싼 반도체가 시장에서 줄어드는 효과가 실제로 일어날 경우 그 파장이 어떻게 나타날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1위 업체인 대만의 티에스엠시가 미국에서 첨단 반도체 공장을 짓는 것도 변수이다. 한국이나 대만 반도체 업체가 미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하지 않은 것은 비용과 경쟁력 때문이다.
미국 연방정부는 이번 티에스엠시의 피닉스 공장에 모두 520억달러 상당의 보조금을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보조금 효과 때문에 한국과 대만 업체들이 미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하겠다고 나서고 있지만, 실제로 자국에서 생산하는 반도체보다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더 큰 문제는 티에스엠시나 삼성전자가 미국에 짓는 반도체 공장들은 이번 피닉스 공장에서 보듯이 중국의 반도체 물량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최첨단 반도체 생산기지도 아니다.
티에스엠시는 현재 최첨단인 3나노미터급 반도체를 오는 2026년부터 생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2026년이 되면 대만에서는 2나노미터급 반도체가 생산될 것이라고 '파이낸셜타임스'가 티에스엠시 관계자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반도체 업계 간부와 분석가들은 대만 밖에다가 최첨단 능력을 구축하는 것은 티에스엠시의 생산모델을 흩트리는 것이라고 본다.
대만의 반도체업황 연구소인 CLSA의 패트릭 첸 소장은 “그런 것은 어떠한 경제적 합리성도 없다”며 “최신 기술은 친추에 있는 티에스엠시의 연구개발센터에서 나온다. 미국에서 이를 복사하는 것은 비용을 심각하게 부풀린다. 그렇게 해야 할 어떠한 인센티브도 없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유치하는 티에스엠시나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들은 기껏해야 1~2세대 뒤진 반도체를 생산할 것이고, 이는 미국이 의도하는 최첨단 반도체 생산 능력 확보와는 거리가 멀다. 사실 티에스엠시의 피닉스 공장 계획은 미국이 팔을 비튼 결과이다.
티에스엠시 창업주 장중머우(91·모리스 창)는 최근 “세계화는 거의 죽었다”, “자유무역은 거의 죽었다”고 말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간접적인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문제는 이런 미국의 강요에 의한 미국 내 반도체 생산 능력 구축이 앞으로 반도체 생태계에 어떤 파장을 부를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애플의 아이폰 생산에서는 최첨단 반도체도 필요하지만, 중저가의 메모리 반도체도 필요하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만약 애플이 한국의 반도체 회사들보다도 약 5분의 1 가격으로 제공하는 중국의 양쯔강메모리테크놀로지(YMTC)으로부터 메모리칩 공급을 받을 수 있다면 고성능 최첨단 반도체의 가격을 상쇄할 수 있을 것이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생산 능력에 있어 2~3세대 정도의 격차를 두려 한다. 이런 전략이 실제 관철되어도, 반도체 생태계에 어떤 파장을 줄지는 알 수 없다. 아마 가장 수요가 많은 2~3세대가 뒤진 반도체의 과잉이나 부족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다.
무엇보다도 중국이 미국의 의도대로 반도체 생산능력을 항상 뒤쳐진 채로 남아 있을지가 의문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중국의 반도체 생산능력을 독립시켜줄 공산도 있다.
네덜란드가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에 순순히 동참하지 않겠다고 밝힌데서 보듯이 중국 시장을 우격다짐으로 막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결국 모든 비용은 기업이나 소비자에게 전가될 것이다. 당장 내년부터 반도체 가격의 급등락이나 공급망 교란이 더욱 잦아들 것이 분명하다. 정의길/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