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슬아 컬리 대표이사(사진)는 최근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장관이 발간한 에세이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를 추천했다. 펠르랭 전 장관이 편견을 극복해온 역사를 보고 느낀 점이 많아 책을 조용히 추천했던 것으로 보인다. |
[비즈니스포스트]
김슬아 컬리 대표이사는 지독한 워커홀릭이다.
그의 곁에서 일하는 동료들에게 물어보면 ‘나도 워커홀릭이지만 소피(
김슬아 대표의 영어이름)는 못 이긴다’ ‘
김슬아 대표님은 일과 결혼한 것 같기도 하다’ 등의 반응이 공통적으로 나온다.
물론 김 대표는 과거 직장 생활을 하며 만났던 사람과 오래 전에 결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과 결혼했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맡고 있는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친다는 얘기로 들린다.
김 대표가 워커홀릭인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그가 컬리를 창업한 이유와도 맥이 닿아 있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평가다.
김 대표는 여러 강연에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 창업했다”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김 대표는 창업 이전에 여러 컨설팅기업을 다녔다. 김 대표는 스스로 언변이 좋은 것도 아니고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라 조용하게 회사생활을 했지만 먹는 것을 좋아하는 직원으로는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동료들이 김 대표에 대해 ‘
김슬아는 먹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라고 한 마디로 정리했을 정도다. 김 대표는 이와 관련해 “신상 백은 모르지만 어느 정육점이 가장 잘 하는지를 물으면 다 알려줬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그는 회사에서 ‘푸디(Foodie, 음식을 두루 맛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였다.
그가 창업의 길로 들어선 것은 우연한 계기 때문이다. 성인이 돼 아토피에 걸리면서 ‘잘 먹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체감한 김 대표는 신선식품의 배송 시스템을 고쳐볼 수 없을까하는 생각에서 동료와 함께 컬리를 창업했다.
김 대표는 컬리를 7년 넘게 이끌면서 ‘나에게 중요한 문제를 한 가지 푸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고객의 후기를 눈여겨 보며 스스로 파악한 문제점들을 하나씩 개선해나가는 것을 컬리의 가장 중요한 철학으로 삼고 있다는 얘기다.
컬리가 유니콘기업(시가총액 1조 원 이상의 벤처기업)을 넘어 상장을 준비하고 있는 단계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김 대표의 도전정신과 일에 대한 열정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김 대표는 컬리를 이끌어오는 과정에서 수많은 편견을 마주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편견은 ‘여성’이라는 점이다.
김 대표는 과거 컬리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투자금을 유치하기 위해서 여러 투자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발로 뛰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여성을 가로막는 유리천장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다.
‘애를 낳으면 회사의 미래는 어떻게 되냐’ ‘컬리의 상징은 곧
김슬아인데 김 대표가 휴직하게 되면 컬리의 성장도 힘들어지는 것 아니냐’ 등의 말을 투자자들로부터 종종 들었다고 한다.
김 대표는 이런 편견에 맞서기 위해 악착같이 컬리를 이끌고 있다. 투자자들의 시각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김 대표와 컬리의 역사는 곧 여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편견을 보란 듯이 깨보겠다는 다짐을 실천해가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보면 최근 김 대표가 왜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플뢰르 펠르랭(Fleur Pellerin)의 최신 에세이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를 추천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프랑스 장관을 역임해 현재 벤처 투자자로 활동하고 있는 플뢰르 펠르랭의 첫 에세이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의 소개 페이지. |
플뢰르 펠르랭은 아시아계 최초의 프랑스 장관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여성이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3~4일 만에 버려져 고아원에 있다가 생후 6개월 때 프랑스인 가정에 입양된 ‘한국계 여성’으로도 유명하다.
그에게는 어찌 보면 자라나며 사람들에게 편견이 쌓일 수도 있는 ‘입양아’와 ‘동양인’, ‘여성’이라는 3가지 정체성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펠르랭은 이런 정체성에 갇히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펠르랭은 “나는 부모님, 더 나아가 프랑스 사회에게 또다시 거부당할 이유를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타고난 기질을 거스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당장 눈앞에 있는 즐거움을 선택하는 편이어서 늘 신경 쓰며 살아야 했다”고 책에서 회고했다.
그는 2012년 프랑스 올랑드 정부에서 중소기업·혁신·디지털경제 특임장관으로 발탁된 뒤 통상·관광·재외교민 담당 국무장관, 문화·커뮤니케이션부 장관을 연이어 맡았다. 특임장관을 맡으며 종종 한국을 찾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이미경 CJ그룹 부회장 등과 친분을 맺은 것도 유명한 잍화다.
현재 펠르랭은 ‘한국계 입양아’ ‘프랑스 장관을 역임한 동양인 여성’ 등 낡은 수식어로 더 이상 평가되지 않는다. 10여 년 동안 프랑스 정계와 재계를 아우르며 활동한 덕분에 그를 수식하는 단어는 더욱 풍성해졌다.
그는 2016년 장관에서 물러난 뒤 벤처캐피탈 코렐리아캐피탈을 세워 ‘벤처 투자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고 있다. 네이버와 라인에서 1억 유로씩 모두 2억 유로를 투자받아 1호 펀드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모두 6개 스타트업을 유니콘기업으로 키워냈다는 점에서 벤처 투자자 이외의 수식어는 더 이상 불필요해 보인다.
김슬아 대표가 플뢰르 펠르랭의 책을 말없이 추천한 이유는 펠르랭이 걸어온 길에서 김 대표가 받았던 사회적 편견이 떠올랐기 때문일 수 있다.
펠르랭은 자신의 에세이에서 “내 이야기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한데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내 사연이 한국의 젊은 여성뿐 아니라 운명을 극복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나름의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책이 아주 소수의 사람에게라도 완전한 자아실현을 방해하는 걸림돌 즉 실재하거나 상상한 유리천장을 깨는 데 작은 역할이라도 한다면 그 존재 목적을 다하는 것이리라”고 썼다.
플뢰르 펠르랭의 생각, 그리고 도전 및 성공의 일화들이 김 대표에게 전하는 울림은 한둘이 아녔을 것이다.
특히 김 대표가 투자자들의 편견과 맞서 싸우면서까지 컬리를 기업공개라는 관문 앞에 세워 놓은 상황에서 펠르랭의 에세이는 김 대표에게 적지 않은 생각을 던져준 것으로 보인다.
물론 김 대표는 여성 CEO라는 이유만으로 언론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조차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보다 한 명의 창업가로서 더 주목받고 싶어하는 김 대표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수많은 편견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생겨난 성향인지도 모른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