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재 기자 piekielny@businesspost.co.kr2022-09-28 16:4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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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포스트] 영국 새 행정부의 경기 활성화를 위한 감세 정책부터 100년 만의 이탈리아 극우 총리 탄생, 프랑스와 스웨덴의 극우 정치세력 약진까지.
유럽 주요국들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정치적 지형변화와 정책 차별화를 통해 ‘각자도생’하기 위한 움직임을 강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 영국의 대규모 감세 정책 발표 이후 달러화 가치가 크게 오르고 글로벌 증시가 크게 하락하고 있다. 사진은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 <영국 보수당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갈무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 러시아 천연가스에 대한 의존도, 신재생에너지 전환 속도 등 각국의 상황이 다른데도 유럽연합(EU)이라는 이름으로 에너지와 안보정책 등에서 하나된 목소리를 내야하는 점이 계속 부담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는 견디지 못해 서서히 각자도생을 찾아가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문제는 유럽 주요국의 이런 움직임이 글로벌 경제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영국의 감세 정책은 이미 유럽을 너머 글로벌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영국은 9월 초 출범한 리즈 트러스 행정부가 최근 발표한 연 450억 파운드(약 69조 원) 규모의 감세 정책 영향으로 파운드화 가치가 급락하고 채권가격이 크게 하락했죠.
영국정부가 세금을 줄인 채 재정을 충당하려면 결국 국채를 발행할 수밖에 없는데 이에 영국국채 투매가 이어지면서 금리가 크게 뛰고 파운드화 가치가 급락한 겁니다. 이 영향으로 달러화 가치가 크게 오르고 영국 재정위기 우려에 미국 뉴욕증시가 크게 하락했고요.
급기야 국제통화기구(IMF)는 27일(현지시각) 이례적으로 성명을 내고 “영국을 포함해 여러 나라에서 물가가 오르고 있는 상황에는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이 추구하는 목표가 엇갈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며 영국정부를 향해 감세 정책을 재고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트러스 총리는 에너지가격 인상에 어려움을 겪는 가계를 지원하고 경제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감세 정책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긍정적 의도와 달리 감세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기 전부터 국제사회로부터 세계시장의 물가상승을 압박할 수 있다며 큰 비판을 받고 있는 건데요.
트러스 총리가 정책 방향을 선회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이제 막 총리에 올라 의욕이 가득하고 영국이 유럽연합마저 탈퇴한 상황이라 다른 나라의 눈치를 크게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또 하나 우려스러운 것은 유럽 주요국들의 이런 각자도생의 움직임은 앞으로 더욱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입니다.
시장은 이탈리아를 주목합니다.
이승훈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28일 리포트에서 “건전성에 문제가 있는 유럽 주요국 가운데 에너지가격을 보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재정정책을 쓰거나 감세 정책을 펼치는 국가라면 위험성이 더욱 커질 수 있다”며 “신정부 출범 이후 이탈리아의 재정정책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바라봤습니다.
이탈리아는 최근 총선 결과 극우 성향의 이탈리아형제들(FdI)을 중심으로 한 우파 연정이 승리했습니다.
이에 파시즘을 창시한 ‘베니토 무솔리니’ 이후 100년 만에 극우 지도자의 등장을 앞두고 있습니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형제들 대표가 그 주인공입니다.
멜로니 대표는 15살에 무솔리니 지지자들이 만든 정치단체 이탈리아사회운동(MSI) 청년 조직에 가입해 정치에 뛰어든 극우 성향 정치인으로 ‘여자 무솔리니’라고도 불립니다.
시장에서는 멜로니 대표가 총리에 오르면 고물가로 신음하는 이탈리아에서 포퓰리즘을 앞세운 재정정책을 펼치고 유럽연합의 반러시아 정책에 균열을 낼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 이탈리아 첫 여성총리로 예정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형제들 대표. <연합뉴스>
문제는 유럽에서 이런 극우세력이 약진하는 곳이 이탈리아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11일 실시된 스웨덴 총선에서는 네오나치에 뿌리를 둔 극우성향의 스웨덴민주당이 ‘이주민 제로’와 ‘외국인 범죄자 추방’ 등을 공약으로 내세워 원내 2당을 차지했습니다.
6월 프랑스 총선에서는 유럽의 대표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RN)이 우파 간판정당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국민연합은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의석수인 15석 이상 확보를 총선 목표로 삼았는데 선거 결과 보수정당 가운데 가장 많은 89석을 확보했습니다. 6월 총선 전 국민연합의 의석수인 8석과 비교해 10배 이상 늘었습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코로나19 장기화로 피로감이 커지고 민생불만이 누적된 상황에서 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가격 급등이 유럽사회의 경제불안을 키우는 동시에 극우세력의 약진으로 이어졌다”며 “아프리카와 중동에 이은 우크라이나 난민의 증가도 유럽 내 극우세력의 외연 확장에 기여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시장에서는 정치와 경제에서 모두 불확실한 현재 유럽의 상황이 한동안 이어진다면 유럽연합의 약한 결속력을 자극해 2010년 유럽 재정위기와 비슷한 상황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시선도 나옵니다.
유럽 재정위기는 2010년 초 그리스의 구제금융을 시작으로 2010년 말 아일랜드와 2011년 중순 포르투갈의 구제금융을 거쳐 2012년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재정위기까지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당시 세계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이웅찬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유럽연합은 최근 들어 3번째 균열 위기를 맞고 있다”며 “유럽연합은 2차례의 세계전쟁 이후 각국의 주권을 중앙기구에 일부 이양해 통합하면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기대와 반성으로 고안해 낸 기구인데 각국의 정책수단이 실종되면서 계속해서 균열점이 찾아오고 있다”고 바라봤습니다.
각국의 경제적 상황이 다른 데도 같은 통화정책을 강요한 부작용으로 생긴 유럽 재정위기, 국경개방에 따른 난민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뤄진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이어 에너지 상황과 러시아에 대한 입장이 새로운 3번재 균열점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유럽연합이 흔들린다면 국내 경제와 증시도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유럽 상황은 국내 투자자들에게도 중요합니다.
유럽연합은 중국의 고성장과 영국의 탈퇴 등으로 출범 초기와 비교해 경제적 영향력이 크게 줄었지만 여전히 세계 GDP(총생산)의 15% 가량을 차지하며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특히 유럽의 경제위기는 달러화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 유럽의 경제상황은 달러화 강세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꼽힌다. 사진은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연합뉴스>
달러인덱스(DXY)는 달러의 가치를 나타내는 객관적 지표로 여겨져 글로벌 각국 환율 움직임에 심리적 영향을 크게 미치는데 유럽 주요국의 통화가치를 기반으로 합니다.
달러인덱스는 유럽연합의 유로, 영국 파운드스털링, 스위스 프랑, 스웨덴 크로나, 캐나다 달러, 일본의 엔 등 6개국 통화를 바탕으로 산출됩니다. 유럽국가의 화폐가치가 흔들리면 변동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현재 달러인덱스는 영국의 감세 정책 발표 이후 114 위로 치솟으며 2002년 이후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습니다.
달러화가 지나치게 초강세 흐름을 이어가면 글로벌 경제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도 위험합니다.
박상현 연구원은 “현재 달러인덱스는 2001년 고점 수준을 넘어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달러 초강세 현상은 궁극적으로 글로벌 부채 리스크를 자극해 글로벌 금융시장과 경제에 또 다른 위기를 촉발할 도화선이 될 수 있다”고 경계했습니다.
이렇게 촉발되는 글로벌 경제위기는 국내증시에서 원/달러 상승이나 한국과 미국의 기준금리 역전보다 더욱 강력한 외국인투자자의 이탈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은행은 9월 발간한 ‘통화신용정책보고서’에서 “과거 외국인 증권자금의 대규모 유출은 내외금리차 역전보다는 글로벌 금융위기, 중국 금융불안, 코로나19 위기 등 글로벌 리스크 이벤트 발생에 주로 기인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올해 겨울은 동태평양의 적도지역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낮아지는 라니냐 현상으로 강한 한파가 찾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시장에서는 겨울이 다가올수록 유럽의 에너지난이 더욱 심각해지면서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 역시 더욱 커질 것이라고 보고 있고요.
아무쪼록 유럽 정치 지도자들이 현명한 판단을 내려 이번 겨울 국내 투자자들의 마음이 더 추워지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한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