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상반기 중대재해로 인한 사망자의 절반 가까이가 건설현장에서 발생했다. 삼성물산 건설부문 등 10대 대형건설사들은 최고안전책임자(CSO)를 따로 두는 등 안전대책을 강화했지만 아직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
[비즈니스포스트] “중대재해처벌법이 기업의 안전의식을 제고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근로자 안전의식의 개선 없이는 아무 소용없다. 부족한 안전인력 충원도 시급하다.“
대형건설사에서 안전관리를 담당하는 실무책임자는 현 상황을 이와 같이 요약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전후로 국내 건설사들은 앞다퉈 안전보건담당 조직을 신설 또는 격상했다. 최고안전책임자(CSO)를 선임한 곳도 많다. 중대재해 1호 사례가 되지 않기 위해 일주일 동안 작업을 중단하고 휴가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어 보인다. 올해 상반기 중대재해로 인한 사망자가 320명인데 이 가운데 거의 절반에 가까운 155명이 건설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9월 한가위를 앞두고 국내 10대 건설사 가운데 한 곳의 안전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책임자와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건설사 측에 매우 민감한 사안인 만큼 익명을 전제로 묻고 답했다.
-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후 기업이 중대재해 예방을 위해 취한 조치는 무엇이고 어떤 성과를 가져왔나.
“법 시행 전보다 안전에 대한 기업의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안전과 관련된 투자를 지속했고 사고예방을 위한 여러 제도를 도입해 현장의 안전을 강화하고 있다.”
- 안전 관련 업무를 수행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안전기준이 강화됨에 따라 업계에서는 안전인력 충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공급은 그대로인데 수요가 늘어나면서 안전관리를 담당할 기본적인 인원 확보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사실 안전인력 부족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5월 전국의 중소제조업체(50인 이상 300인 미만) 504곳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세 곳 가운데 한 곳은 중대재해처벌법을 준수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유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이 ‘안전보건 전문인력 부족(55.4%, 복수응답)’이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기 직전에 만난 한 중견건설사 관계자도 “안전보건담당자의 몸값이 높아져 중소형건설사의 경우 관련 인력을 구하는 게 너무 어려워졌다”고 토로했다.
이런 현상은 기업뿐 아니라 국토교통부도 겪고 있다.
현장안전을 점검할 국토교통부 산하 국토안전관리원에 소속된 인력은 159명에 불과하다. 지난해 133명에서 늘었지만 전국의 16만 개에 가까운 건설현장을 감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심지어 기존의 안전인력이 업무를 꺼리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이강섭 한국경영자총협회 책임위원은 비즈니스포스트와 나눈 통화에서 “현장에서는 안전보건 기피현상이 늘어나고 있다. 잘 해봐야 본전이고 사고 나면 처벌 받는데 누가 하려고 하겠나. 안전보건 담당자들의 부담이 너무 커 전공자들도 다른 부서로 옮기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터뷰를 진행한 실무책임자는 안전인력을 어렵게 확보한다고 해서 꼭 사망사고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며 근로자의 안전의식 제고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 올해 상반기 사망사고 숫자를 보면 지난해에 비해 그다지 줄지 않았는데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안전에 최선의 조치를 취해도 사고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 요소가 있다고 봐야 하는 건가.
“안전에 대한 투자와 안전관리 인력의 투입, 기업과 정부의 관리감독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수많은 협력사와 현장 근로자의 안전의식이 여전히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백약이 무효하다고 생각한다.
안전에 대한 기본이 갖춰지지 않은, 미흡한 상태에서 덜컥 법이 시행돼 버렸다. 정부는 근로자를 대상으로 안전의식 향상을 위한 교육과 제도개선, 제재강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정부와 기업이 협력해서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사안이라고 판단된다.“
요컨대 실무책임자는 기업보다 정부와 현장 노동자의 역할을 조금 더 강조했다. 그런데 그도 노동계가 지적하는 최고안전책임자의 권한 문제를 놓고는 일부 동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기업이 안전관리조직을 신설하고 최고안전책임자를 임명했지만 이것이 근로자의 안전보다 처벌을 피하기 위한 면피용이란 지적이 있다. 최고안전책임자에게 주어지는 권한은 어느 정도인가.
“최고안전책임자의 권한에 대해 노동계가 지적하는 부분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은 기업이 법에서 요구하는 경영자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최고안전책임자를 임명하고 예산 및 작업중지권 등 일부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인사권과 도급계약의 금액, 공사기간에 대한 결정권은 갖고 있지 않다.
그래도 안전사고를 예방하기에는 충분한, 대부분의 권한을 부여받고 있고 실질적 역할도 하고 있다. 경영계의 입장에서도 주장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만큼 최고안전책임자에 대한 명확한 법적 가이드라인이 제정될 필요가 있다.”
기업 쪽은 역시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법률 및 시행령 개정 추진에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 최근 중대재해처벌법 일부개정 법률안이 발의되고 시행령 개정도 추진되고 있다. 경총이 ‘충실히', '필요한’ 등의 모호한 표현 제거와 최고안전책임자가 선임되면 기업대표는 책임에서 면제해달라는 건의를 했고 개정 방향으로 고려되고 있다. 이런 요구 사항들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가.
“법의 표현이 모호해서 각 기업은 스스로 법을 해석해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보수적으로 판단하다보니 업무범위를 크게 해석해 업무에 적용하는 경향도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과도한 투자나 인력과 에너지 낭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보다 명확한 표현을 통해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가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 앞으로 제도적으로 더 발전시킬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근로자, 협력사, 기업의 안전의식이나 안전인력, 예산 등 기본적 필수요소가 미흡한 상태에서 법이 시행됐다. 각각의 당사자들이 혼란 속에서 제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불필요한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 교육과 의식 및 제도개선 등 정부 차원의 노력과 기본적 인프라 확충을 위한 정책 추진이 필요하다고 본다.”
현행 중대재해처벌법의 처벌조항이 과도하다는 의견에 대한 생각을 물었지만 실무책임자는 답변을 피했다. 앞으로 경영계와 노동계가 어떻게 갈등을 해결하고 지혜롭게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지도 물었는데 역시 빈칸으로 돌아왔다.
양쪽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최근 국회 입법조사처는 ‘2022 국정감사 이슈분석 제8권 – 환경노동위원회’를 발간했다.
입법조사처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사후 처벌이 아닌 예방 효과를 내기 위한 개선사항으로 △예방역량 강화 유도 △모호성 제거로 과도한 불안 해소 △중소기업의 안전경영체계구축 지원 △업종별·규모별 안전보건의무 세분화 등 네 가지를 제시했다.
우선 기업들이 예방을 위한 실질적 노력보다 처벌 피하기에 집중하지 않도록 제재의 즉시성과 실효성을 높이고 반복적 안전보건확보의무 방치에 한해 형사제재를 부과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도 법의 모호성 제거를 위한 시행령 구체화를 촉구했다. 중소기업의 경우 인력과 예산이 부족한 현실을 고려해 정부의 지원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봤다.
처벌의 실효성을 강조하는 노동계와 모호성 제거 및 정부 지원대책을 요구하는 경영계 입장을 종합한 것으로 보인다.
‘국정감사 이슈분석’은 입법조사처가 2009년부터 발간해 온 국정감사 대비 종합보고서다. 이번 보고서 역시 다음달 4일 시작되는 국정감사 준비에 활용된다. 임민규 기자 <끝>